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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Sep 30. 2021

친구랑 둘이 제주살이 #6

딱 일주일만 제주에서 살아보는거야.















줄줄이 세워 놓은 깨










침범하면 벌금 천만 원인 이곳은 제주 해녀들의 구역




오늘도 러닝을 위해 아침 일찍 나섰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에 이렇게 멋진 해안 도로를 두고 러닝을 안 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었다. 5km를 뛰고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로 했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눈 뜨자마자 해안가를 달리고 곧장 바다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또 언제 생길지 모른다. 숙소를 나설 때만 하더라도 구름이 많아 그늘졌는데 조금 달리다 보니 점점 해가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어제보다 배로 힘이 든다. 겨우겨우 2.5km 지점까지 도착하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영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운동화 때문에 발바닥에 물집이 자리 잡을 준비를 하는지 슬슬 아리는 데다 골반에서도 통증이 느껴진다. 달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뭐든 만만한 것이 없다. 등산을 할 때도 엔간해서는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민치도 '해가 쨍하니 더 힘든 것 같다'며 천천히 걸어가다가 다시 뛰어보자고 한다. 보석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데 저 멀리 평대 해수욕장이 보인다. 



"민치. 딱 저기까지만 달려가서 물에 빠지는 게 어때?"


"그럴까!"



남은 힘을 끌어모아 조금 더 달린 후 곧장 바다로 들어간다. 아침인데도 바다는 벌써 따뜻하다. 차가운 물을 싫어하는 나도 딱 놀기 좋은 온도의 예쁜 바다였다. 해가 얼마나 뜨겁게 내리쬐는지 볼이 따끔거린다. 바다에 떠다니는 미역 조각을 낚아채 볼 위에 얹으니 촉촉하고 시원하다. "민치. 나 좀 봐봐. 천연 미역팩 하는 중". 민치는 잠시 비웃는 것 같다가 어느새 얼굴에 미역을 붙이고 있다. 












물놀이하기에 더없이 좋은 바다였다. 며칠 전 검은 모래 해변에서의 재앙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정말 바보였다"고 뒤늦게 깨닫는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모두 씻겨나가고 적당한 온도의 물속에 둥둥 떠있는 이 순간 세상만사가 다 무슨 소용일까.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냄새가 나는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바다에 몸을 담그고, 사랑하는 친구와 노래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멀리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손에 쥘 수 있는 행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느리고 조용하게 살고 싶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고 바다에 둥둥 떠있는 채로 나에게 말하고 또 말한다.







바다에서 나와 맨발로 걸어 돌아가는 길. 누군가 예쁘게 엮어서 세워둔 풀이 뭔지 궁금했는데 마침 풀을 엮고 있는 도민들이 보인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깨야 깨! 좀 줄까아? 가져갈래?"


"괜찮아요. 날 뜨거우니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셔요."


"아이고~ 아가씨들이 왜 맨발로 다녀~"



다짜고짜 깨를 주겠다는 할머니도, 맨발로 걸어 다니는 우리를 걱정하는 아주머니도 이웃처럼 따뜻하다. 서쪽에서 들은 얘기로는 동쪽 사람들이 유독 박하다고 했다. 제주의 동쪽은 농사도 잘 안되고 삶이 팍팍해서 외지인들에게도 쌀쌀맞고 폐쇄적인 편이라고 했다. 편견일 수도 있고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는 그 이야기에 보태지지 않는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서 다행이다. 어디든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분이다. 조식은 완벽한 비건식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을 정도로 맛있다. 짜지 않고 새콤한 마늘종 장아찌와 따뜻하게 데운 순두부의 조합이 좋다. 아직 몸이 젖은 채로 수건만 두르고 에어컨 앞에 앉아 있으려니 조금 한기가 들고 있던 중이라 더 반가운 따뜻한 순두부. 향이 좋은 기름에 살짝 볶아서 간을 한 가지볶음도 내 입맛에 딱 맞는다. 집을 나와 다양한 아침을 먹어보는 것도 제주살이의 묘미 중 하나다. 아침 일찍 러닝 하고 온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오늘은 바다 쓰레기를 주우러 갈 계획이라는 사람도 있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계획은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씻고 외출 준비를 마친 후 잠시 툇마루에 앉아 여유를 부린다. 완전히 개인 하늘을 보니 오늘도 민치의 날씨 요정이 실력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손님들을 위한 슬리퍼 대신 고무신이 마련되어 있다. 나름 제각각 다른 사이즈가 있어서 대충 발에 맞춰 골라 신으면 된다. 고무신 신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신을 때는 편하지만 바닥이 그대로 전달되는 착용감 때문에 그리 오래 신지는 못할 것 같다. 




















게하 근처에 당근 케이크가 유명한 카페가 있다. 한동리로 달려오는 중인 손님을 기다리며 잠시 들렀다. 바다를 담은 큰 창이 이 카페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오픈 직후라 손님은 아무도 없다. 조용하고 친절한 직원이 직접 서빙도 해준다. 카페에서 테이블로 직접 커피를 가져다주는 친절을 받아본 적이 언제더라. 작지만 큰 친절이다. 카페에는 귀여운 굿즈와 다양한 독립출판 서적들이 구비되어 있다. 그중에 제주 이야기를 담은 매거진 하나를 골랐다. 메인 기사는 택시투어를 주제로 다뤘는데 택시 기사들의 인터뷰를 읽다가 사뭇 진지해진다. 외국인 관광객 전용이나 고급 외제차로 특색을 더한 기사도 있고 승객이 관광하는 동안 외발자전거를 타는 기사도 있다.(기사가 하릴없이 기다리는 것을 미안해하는 것이 신경 쓰여 연습을 시작했다고)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영업 노하우가 상당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을 다해 임하는 사람들은 빛나게 마련이다. 




계피향이 가득 맴도는 쫀득한 당근 케이크는 오전 내 바삐 움직이느라 떨어진 기운을 올리기에 충분했다. 










제주살이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기로 한 손님은 나의 오랜 친구 감자.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쭉 감자로 불린다. 별로 친분이 없는 사람 중에는 이 친구의 실명은 모르고 '감자'로만 아는 경우도 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모든 친구들이 감자, 감자하고 부르는 것이 조금 가엾기도 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게 더 다정한 것 같기도 해서 유일하게 나만 감자의 이름을 불러준다. 생각 많고 고민 많은 나와 달리 낙천적이고 유쾌한 감자는 고집이 세지만 논리력은 좀 떨어지는 편이다. 뭔가 강하게 주장하다가도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는 무너지고 만다. 그런 감자를 지적하고 무너뜨리는 건 주로 내 담당이다. 예전에는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으나 언젠가부터는 싸우는 일이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감자가 져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이른 아침부터 비행기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달려온 감자를 데리고 제일 먼저 세화 해변으로 갔다. 제주도에 왔으면 바다부터 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민치는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싸들은 협재 해변에, 인싸들은 세화 해변에 간다나. 서로의 독사진을 찍어주고 잠시 바람을 맞다가 이번에는 다랑쉬오름으로 향한다. 다랑쉬오름은 제주의 오름 중에서 가장 높은 오름이다. 마지막까지 끝내주는 날씨로 감동을 주는 제주.










땡볕에 가파른 길을 20~30분쯤 빠르게 오르니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 다랑쉬오름은 그늘이 거의 없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그늘 하나 없는 오름을 다니려니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식사도 못하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감자가 걱정됐지만 그런 나를 안심시키는 듯 씩씩하기만 하다. 



"제주도 온 것 중에 여기가 최고다"


"야 고맙다. 이런 곳에 데려와줘서"



감자는 소설책이나 편지에 쓸 법한 낯간지러운 말도 잘한다. 남자들 중에는 말도 별로 없고 어떤 상황에도 별 감흥이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 있는데 감자는 꼭 여자친구처럼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 어지간히 말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조금 말이 길어지면 영혼이 저 멀리 빠져나간 것처럼 초점이 흐려지기도 한다. 감자나 나나 '굿 리스너'가 되긴 글러먹었다. 그런 작은 서운함을 빼고는 대체로 장점이 많은 친구다. 그중에서도 어딜 가나 사람들의 관심이나 호감을 사지 못하는 나에게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주고 주어진 삶을 파이팅 넘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제일 좋다. 감자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앞으로는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두 명의 죽마고우와 그림 같은 풍경 속을 걷고 있어도 배고픔은 피할 수 없다. 여행 중에는 활동량이 많아서 그런지 끼니를 잘 챙겨 먹어도 자꾸 배가 고프다. 무더운 여름에 제주에서 가장 높은 오름에 올라가면서 물 한병도 챙기지 않은 어리석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루를 놀아주는 조건으로 스스로 짐꾼과 사진사 같은 것들을 자처하는 감자 덕분에 민치와 둘이 있는 모습도 사진으로 남겨본다. 내려오자마자 정자에 누워 버린 모습도. 뜨거운 여름을 걷고 나서 운동화를 벗어던질 때의 시원함이란.






경치 좋은 식당에서 갈치조림과 한치 물회, 성게비빔밥을 먹었다. '한치 물회는 냉동도 맛있으니 이왕이면 저렴하게 먹어라'라는 지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의 조언에 따라 냉동으로 주문했다. 나와 민치는 맛있게 먹느라 정신없는데 감자는 "이 집은 경치가 다했네" 하며 깨작거린다. 입에 맞지 않아서 잘 안 먹는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다음 코스가 수영이라 일부러 덜먹은 건가 싶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배 나온 상태로 상의 탈의는 예의가 아니긴 하지. 한 수 앞을 내다볼 줄 아네. 나는 막걸리까지 마셔서 배가 잔뜩 나왔는데 말이야.






"민치도 감자도 모두 내 죽마고우니까 


너희 둘도 이제부터 죽마고우야. 친하게 지내"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나를 매개로 만난 둘의 조합이 궁금했는데 꽤 잘 지낸다.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을 때도 한참 무슨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다.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분명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하며 어색함을 피했을 감자다. 한순간도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감자라면 그 순간에도 애썼을 것이 분명하다.



















게스트하우스 앞 이름 없는 해변은 수심이 얕고 잔잔해서 아이들도 많았다.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더 아쉬워서 오랫동안 물에서 놀았다. 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으려나. 엉망인 자세로 수영도 하고 짠물을 잔뜩 먹어가며 잠수도 했다. 나는 이전까지만 해도 물놀이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계곡은 물이 차서 발이나 담그는 정도였고, 바다를 봐도 물에 들어가 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것들을 하나씩 알아간다. 취향도, 입맛도 자꾸 변한다. 나 자신조차도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인가. 진짜 살아볼 만하다니까.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늦은 오후 잠에 취해 늘어져 있는 고영희씨들만큼 평화로운 것도 없다. 숙소에서 몸을 씻고 저녁 장을 보러 갔다. 우리가 씻는 동안 맛집을 알아보겠다던 감자는 성산 쪽에 괜찮은 횟집을 알아두었다. 숙소에서 30분을 달려간 식당은 마침 휴무일. 다시 찾은 식당도 문을 닫았다. 결국 회센터에서 사 온 돔과 치킨을 들고 숙소 근처 정자에 앉아 먹는다. 너무 어둡고 술은 다 미지근해졌지만 그런 것이 다 무슨 상관이겠나. 아직은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젊은이라는 사실에 더 취하는 밤. 바다에는 배들이 환한 빛을 내고 있다. 그 빛이 얼마나 훤한지 하늘까지 닿는다. 감자는 또 "오늘 최고의 하루였다. 고맙다"고 말한다. 그 말에 나의 오늘 하루도 최고가 되는 기분이다. 












제주를 떠나는 날 아침 역시나 날이 좋다. 언젠가 민치와 "떠나는 날에 날씨가 좋으면 조금 더 머무를까?"라고 질척대기도 했었는데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자유는 끝났다'는 사실이 엄습해온다. 하-. 오전 비행기라 다른 손님들이 자고 있는 시간에 살금살금 준비를 하고 짐을 싸서 서둘러 나선다. 일단 아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식사는 해장국. 해장국집에는 해장국과 내장탕 두 가지 메뉴가 있다. 약간 음식 꼰대 기질이 있는 감자가 내장탕을 강력하게 추천해서 도전해보기로 했다. 약간 남아있는 숙취를 날려버릴 기세로 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기도 하고 펄펄 끓는 해장국을 땀 내며 먹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감자는 계속 "여기에 찍어 먹어봐", "이거 넣어서 먹어봐" 하면서 잔소리를 한다. 민치만 없었어도 잔뜩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겠지만 꾹 참고 "넵" 하고 만다. 친구 사이에도 사회생활이란 것이 필요하다.




둘이 와서 셋이 되어 돌아가는 길. 마침 감자의 생일이어서 공항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멋진 여성이 앉아 로맨스가 생기기를 바라주었다.(아쉽게도 아주머니가 앉았다고 한다) 나는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깊은 잠에 들었고 김포에 도착할 때쯤 깼다. 그 깊은 쪽잠 때문이었을까. 일주일간의 제주살이가 더욱 일장춘몽처럼 느껴졌다. 바다로 산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유랑이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되새김질하기에 충분한 추억들을 저장고에 든든하게 채웠다. 기억은 자주 꺼내볼수록 선명해진다. 때로는 어제저녁에 무얼 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운전을 배워보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바다 수영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여름이 더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번 여름은 원색으로 선명히 남을 것 같다.







굿바이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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