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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Oct 01. 2021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 #1. 윤환

꿈의 방향성을 찾아서


나에게 환은,


환과 나는 09학번 동기로 만났다. 서로에 대한 공통점이 많지 않은 신입생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뉘었다. 통학파, 기숙사파, 자취파. 나는 1학년 1학기를 기숙사에서 지냈고 환이는 통학파였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통학파와 함께 다니게 됐다. 환은 개명을 한 이름이다. 그전에는 슬기였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 따라가는 것인지 바뀐 이름에 따라 변한 것인지 슬기와 환은 조금 다른 사람 같다. 슬기였을 때는 귀엽고 명랑한 친구였다면 환이 되고 나서는 몹시 진중해졌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도 가끔 환에게서 슬기의 웃음을 발견할 때도 있다. 지금까지 쭉 지켜본 환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을 그녀는 가장 잘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한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 부러웠고,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있는 그녀가 빛나 보인다. 20대에는 환이 계속해서 말하는 "그림 그리며 살고 싶어" 하는 소리가 무모해 보였던 적도 있다. 늘 현실에 쫓겨사는 나의 세계를 기준으로 규정짓고 바라본 환의 꿈이 팔자 좋아 보여서 질투도 났던 것 같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지금은 환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한다. 꿈을 꾸고, 말하고 그 방향으로 계속해서 정진하면 정말 그렇게 살아지는구나. 이뤄 놓은 것이 없다고 해서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이어트 하나를 해도 온 주변에 알려야 주변 사람들을 나의 '조력자'로 만들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사람을 하나의 우주라고 한다면 나 한 사람이 어떤 궤도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주변도 어떤 방향성 혹은 운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환에게서 내 우주의 방향성을 찾았다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를 시작으로 (재미로 하는) 지인 인터뷰 프로젝트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첫 인터뷰이가 되었다.





'유난'은 그녀가 작품 활동할 때 쓰는 예명이다. 윤환을 발음 그대로 쓰면 유난이 되기도 하지만, '유난스럽다'라는 중의적 의미도 있다. 유난스러운 유난!(@yooonan, @yoonan_atelier)




유난은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일하다 작년에 회사를 나왔다. 다시는 회사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포슬린을 배우더니 지금은 식기에 의미 있는 그림을 그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예비부부가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고민해서 고른 청첩장이 남들에게는 의미 없이 버려지는 게 안타까웠던 이 친구는 청첩장 디자인을 활용한 그림을 식기에 그리는 '추억 보존 사업' 중이다. 제법 주문량이 많아지고 있다고. 









Q. 너 자신을 3가지 키워드로 정의한다면?



A.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얼음. 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차가운 면이 많다고 생각해. 특히 낯선 사람에게 상냥하지 못하지. 가까운 친구들도 고민 상담할 때 보면 공감해 주기보다는 현실적인 얘기부터 나오니까.."내가 이상한 건가?"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두 번째는 그림. '나' 하면 그림이지. 전에는 회사 다니면서 필요에 의해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그림의 진짜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아. 요즘은 내 그림을 좋아해 주고, 내 그림에 감동받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많이 느끼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이라서 좋고. 그것도 어떻게 보면 선한 영향력이잖아? 예전에는 그저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좋았는데 지금은 사람들한테 그림으로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에 더 큰 보람을 느껴. 세 번째는 가정? 가정적?이라고 해야 되나.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예전에는 결혼도 안 할 거라고 하고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애들 보면 진짜 이해 못 했잖아. 좀 한심하게 바라봤지. 자기 자신의 인생이 없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랬던 내가 어쩌다 결혼도 하고. 결혼 후에 현모양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어.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사는 삶도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





Q. 완전히 바뀌었네 생각이.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는 너 자신을 탈피할 수 있었던 요인이 있어?



A. 남편. 남편은 그냥 내가 즐거워하면 자기도 웃는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라면 나를 희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정말 자연스럽게 들었어. 어떨 때는 진짜 맨날 내 의견만 물어보는 게 좀 싫을 때도 있어. "뭐 하고 싶어?', "어디 가고 싶어?" 맨날 나한테만 물어보니까. 그래도 그런 부분에서 '주는 사랑'이란 걸 진심으로 느끼지. 내가 자라온 가정은 서로한테 진짜 관심이 없었거든. 각개전투랄까. 그런데 남편이 자라온 가정은 우리집이랑 완전히 달라. 화목하고 서로를 위해주는 분위기야. 남편과 남편의 부모님을 보면서 가족 간의 애착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아. 아, 이런 가족도 있구나. 가족이 이렇기도 하구나. 어떻게 보면 내가 이기적이고 차가웠던 것도 자라온 환경의 영향일 수도 있지. 남편을 만나고 내 성격이 진짜 바뀌었나 보다 느꼈던 게 좋아하는 색도 바뀌더라고. 그전에는 파랑, 초록 같은 차가운 색을 좋아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핑크, 노랑 이런 색이 좋아지는 거야. 그런 색이 좀 희망적이고 사랑스럽잖아. 정말 신기해. 사람 마음이.




Q. 10년 전의 너와 지금의 너를 비교하면 그게 가장 크겠네?


A. 응. 이기적인 내가 조금은 이타적으로 변한 거. 얼음이 녹았지.





Q. 남들과 다른 너만의 최종병기는 뭐라고 생각해?


A. 적응력. 어딜 가든 사람들과 트러블 없이 지내. 실제로 나랑 인연이 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아직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니까. 환경을 빠르게 파악하고 적응하는 게 내 무기라고 생각해.





Q.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좌절이나 실패가 있다면?


A. 그렇게 큰 도전을 안 해봐서 그런지 기억에 남는 큰 좌절은 없었어. 



Q. 우와. 정말 행복한 삶이구나?


A. 응. 지금 생각해 보면 행복한 삶인 것 같아. 굳이 좌절의 경험을 꼽자면, 돈 가지고 싸우는 어른들을 봤을 때? 일가친척들이 돈 때문에 맨날 싸우고 혈연관계를 다 망치는 모습을 자라면서 많이 보고 자랐어. 어렸을 때 어른들을 보면 다 그렇게 보였어. 그게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였던 것 같아. 지금은 나도 성인이니까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어렸을 때는 내 가족, 친척들이 세상이었으니까. 





Q. 반대로 살면서 너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어?


A. 내가 꿈꾸던 대학에 입학했을 때. 고 2 때 어떤 아트디렉터를 만난 적이 있었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종합예술이라는 세계에 완전 반한거지. 그래서 그 종합예술계의 직업을 갖고 싶어서 목표로 잡은 학교가 우리 학교였지. 미대 입시생한테 제일 부담되는 때가 정시 준비할 때잖아. 수능 후에도 놀지 못하고 미술 학원에 아침부터 밤까지 처박혀서 그림만 그리고.. 수백만 원의 학원비 걱정까지 해야 되니까. 나는 정시까지 가기 정말 싫었거든. 학원비가 너무 아까워서. 무조건 수시로 대학 갈 거라고 다짐했는데 정말 수시로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 거지. 진짜 잘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또 하나 생각나는데, 베네치아에서 한 달 살기 했을 때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했어. 그 전시회에 어떤 이탈리아 남자가 와이프랑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내 그림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거야. 이탈리아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손해를 본대. 사회/문화적인 특성이 그런가 봐. 그런데다가 원치 않게 와이프가 임신을 하게 돼서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했다고 했나. 아무튼 그래서 괴로운 심정이었는데 내 그림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거야. 그런 이야기 들었을 때 그게 진짜 내가 그림 그리는 이유구나 또 한 번 느꼈지.



in Venice




in Venice





Q.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누구야?


A. 훈데르트 바서. 그 작가 전시회에서 유독 큰 감명을 받았었어. 엔돌핀이 막 솟는 느낌. 작품들이 자유로워. 나는 직선적인 것보다 곡선적인 것을 좋아하는 곡선을 잘 활용하고 자연친화적이야. 내가 그림을 그릴 때 지향하는 것과 결이 같아. 뚜렷한 형태를 그리기보다는 색이나 분위기로 표현하는 그림이 좋거든. 내 그림도 그렇고. 그림만 보고 있는데도 나와 공감대가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제일 좋아해.




Q. 환에게 집이란? 


A. 행복함. 안락함. 남편과의 즐거운 시간들로 채우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 작업도 하는 공간이니까. 결혼 전에는 집이 정말 싫었어. 너무 조용하고 고요하고. 머무르고 싶지 않고 피하고만 싶었지. 그땐 정말 집이 잠만 자는 공간이었어.




Q. 집에서 일과 주거를 병행하잖아. 만약에 당장 해야 할 일이 없다고 하면, 남는 시간에는 뭘 해?


A. 육아 중인 친구한테 전화해서 수다 떨어. 시간 남는 친구를 찾지. 왠지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친구한테 전화해. 아니면 요리. 남편과 함께 있다면 여행이나 카페 투어를 하고. 돈을 어디에 쓰는지가 참 중요한데, 명품처럼 물질을 소유하는데 쓰는 것도 그 나름 좋은 게 있겠지만 나는 경험에 투자하는 편이 좋아. 맛있는 거 먹고, 좋은데 가고, 뭔가를 배우고 하는. 새로운고 배우는 기분 너무 좋아.





Q. 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A. 돈? 돈은 당연히 내 전부가 아니고, 삶의 도구지. 돈이 많으면 좋지만 적으면 적은 대로 맞춰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필요에 따라 벌면 되고. 



Q. 너 진짜 가난해 본 적 없구나?


A. (웃음) 맞아. 그런 것도 있지.





Q.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하는 실천이 있다면?


A. 환경적인 것들. 일회용품 최소화하고, 천연 제품들을 사용하고, 웬만하면 에어컨 켜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것들이지. 나는 요즘 코로나보다 환경 오염으로 인한 재앙들이 너무 두려워.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 같아 요즘은. 




Q. 너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어?


A. 나는 딱 우리 시엄마처럼 늙고 싶어. 열정적으로. (환의 시엄마는 가수다. 결혼식 축가도 시엄마가 부르셨다. 환의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시엄마의 축가라고 말할 정도.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시는 분) 요즘 코로나 때문에 행사를 못하니까 유튜브를 시작하신거야. 근데 시엄마 좋아하는 팬이 엄청 멀리서 찾아와서 취재를 했다는 거야. 나는 방송하시는 거 그렇게 거창하게 하시는지 몰랐거든. 방에 무대 만들어 놓고 라이브로 콘서트처럼 노래를 하시는데 시청자가 꽤 되나 봐. 정말 그렇게 철없이 열정적으로 늙고 싶어.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순수하지. 그런 마인드 너무 멋있어. 나는 순진하고 싶지는 않은데 순수하고는 싶거든. 우리 시엄마, 시아빠 만나자마자 결혼 결심했던 것 같아. 




Q. 10년 전 혹은 10년 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마디 해줘.


A. 과거는 지나간 거고, 미래의 나에게 한마디 해볼게. 나이 들면서 한발 한발 내딛기가 점차 힘들어지는데, 제발 그러지 말아줬으면 한다. 현실에 찌들지 않고 고민 없이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잃지 마!




Q.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뭐야?


A. 당연히 나지. 그리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






예고 없이 "오늘 널 인터뷰할 거야"라고 돌발 선언을 했음에도 흔쾌히 응해준 환에게 고맙다. 내가 하는 것은 대부분 응원해 주거나 조언을 해주는 환은 우리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늘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내 주변에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은 나의 진중함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안 하는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쓸데없이 길고 깊게 이야기를 하고,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 질문을 자꾸만 하는 그런 나를. 




거창한 꿈이 아니더라도 혹은 무모한 꿈이더라도 계속 꿈꾸고 계속 실행하고 실천하고 행동하면 인생이 그 방향으로 흐른다. 나는 환의 발자취를 통해 그것이 변치 않는 진실이고 그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제 몫을 열심히 살고, 행복을 찾으며 사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한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스스로의 행복을 찾기를 바라며 나 자신에게도, 그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한다. 내가 멋진 사람이 되면 내 주변 사람들도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다. (지금 멋지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나의 노력을 환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블로그에 공개하지 않은 나의 비밀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 친구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것이다. 환의 행복한 에너지가 다시 나에게로 전달되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면 우리는 사는 내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2021.08.23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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