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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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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Jun 18. 2024

'나 글 쓰는 사람이야' 라는 말

H는 글을 쓰지만, 정작 책은 읽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예스 24에서 내려받아 읽는, 일 년에 몇 권 안 되는 e북이 독서량의 전부다. H가 글을 쓰면서도 늘 어딘가 찜찜하고 석연치 않은 것은 다 이런 빈약한 독서량에 기인한다. 뭔가 쓸 역량이 안되는데 괜히 척하는 것 같아 가끔 혼자 찔리곤 한다.


 '이렇게 설익은 걸  발행해도 되나'


H에게 있어 글쓰기는 좋은 취향이긴 하지만, 속되게 보자면 은근한 허세나 허영의 산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고해성사가 스스로 괴로우면서도 왠지 폼나는 그 느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겉멋에 담배를 피웠던 고등학생 시절 같다. 좀 유치하긴 해도 취향의 시대에 희소한 무언가를 향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특별한 일이니까. 브런치 내에 활동하는  작가 수를 대략 5만 명 정도로 잡아도, 혹은 오차범위를 감안해 넉넉히 10만 명 정도로 퉁쳐도 통계적으로 대한민국에 글 쓰는 사람은  0.2%에 지나지 않는다. 희소성에서 오는 만족감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타이틀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는 특정 공간에서 작가라 불러주지 않나.


반면에 H의 아내는 정말 다독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독서논술 선생으로 책을 가까이한다. 처음엔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동화류 정도거니 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교과 문학에서부터 최신 소설, 시사, 저널리즘, 심지어 생소한 일반 과학상식까지 읽는 범위가 다양했다. 직업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평소 즐겨 읽는 작가나 작품적 취향도 확고하고, 최근 출판업계의 동향도 줄줄이 꾈 정도로 아내는 이쪽 분야에 대해선 빠끔이다. 여러모로 H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아내는 글은 쓰지 않는다.

많은 책을 읽고, 감상과 지성으로 돈도 벌고 있지만 스스로는 글다운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가끔 H는 '누가 더 나은 사람일까' 하고 물음을 던져보곤 했. 일종의 이상형 월드컵으로 '책 읽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 을 비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물론 이런 질문의 바탕에는 '내가 좀 더 나은 사람 아닌가 '라는 은근한 우쭐함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아닌가.'  좀 읽으라는 잔소리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무적의 방패는 '나 글 쓰는 사람이야' 였다. 하지만 최근에 어반 스케치를 배우며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양립되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H는 스케치를 시작하기 전에 스케치에 많이 나오는 나무 그리기나 건물, 인물, 등의 묘사법에 대해 미리 유튜브를 주구장창 시청했는데 막상 야외로 나오니 그런 것들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실제 그리는 것과 영상은 아예 달랐다. 그것은 눈으로 배워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참고는 되겠으나 결국 쓰기는 쓰기다. 글쓰기를 통해 글쓰기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대결시켜 봐야 누가 더 나은지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 다만 H의 심리상으로 글쓰기가 더 우위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나 글 쓰는 사람이야' 가 고개 빳빳이 들고 복도를 걷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웬만해선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H도 누가 물으면 글쓰기나 SNS나 유튜브나 다 비슷비슷한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 것이다. '누구는 글을 쓰고, 누구는 사진을 찍고, 누구는 영상을 찍을 뿐이다' 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그 속에 '난 니들과 다른 사람이거든' 이란 은근한 우월감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게 좀 이상하긴 한데 물론 H가 누구 블로거나 누구 유튜버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산해 내는 콘텐츠로서 글이 가지고 있는 고유함이나 고상함이 '영상이나 사진과는 비교할 것이 못된다'우월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 그것은 순전히 글이라는 텍스트가 지닌 태생적 고상함에서 온 것인데 언제부턴가 H는 그것을 자기 체화하여 제 인격에 대입하고 있는 것이 화근이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인데 그걸 최근에 깨달았다. 좋은 문장과 문체를 시중들다 그 정제됨에 취해 양산적 생산의 사진이나 영상 콘텐츠를 한 수 아래로 깔본 격이랄까.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게 틀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런 고집이라도 있어야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H가 건방지게 자신이 조판하는 글을 영상이나 사진보다 더 높은 상석에 앉혔다 한들 그게 뭐 대순가.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과대망상일 뿐인데. 다만 글에 쏟는 공이 사진이나 영상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영적이며, 성찰적이라는 데는 진심이다. 쓸 때마다 자꾸 빗나가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 행위 자체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소소한 즐거움이며, 이상한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H의  가슴에는 이런 문장이 아주 깊게 새겨져 있다.


"살아보니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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