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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Aug 26. 2023

<소설> 운명과 우연

8탄 너의 목소리가 들려

"우리가 아무리 옆에서 떠들어 대봤자 니는 헤어질 마음이 없네. 이 쑥맥아 찌질하게 굴지 말고 당당해져라. 헤어지지 못하겠으면 그 가시나 더 이상 못 까불게 밟아줘야지. 뭐가 무서워가지고 이렇게 니 혼자 판다눈이 되어서 소주 나발을 불고 앉아있는데. 내가 속에서 천불이 난다. 다음에 셋이서 또 만나게 되면 최예나가 말할 때마다 실실 쪼개라. 당황하며 얼굴 붉히지 말고!! 우영이 오빠 옆자리는 니라는 걸 확실히 알게 해야지."

다혈질인 수영은 답답한 친구의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숨 쉴 틈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렸다. 이게 수영과 아린의 차이였다. 아린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집에 와서 이불킥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혼자서 두고두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고구마 100개 먹은 행동에 수영은 항상 불같이 화를 냈다. 극과 극인 두 친구는 그래서 지금까지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영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아린은 핸드폰 뒤에 붙어 있는 스티커 사진을 바라봤다. 처음 만난 날 술에 취한 우영이가 갑자기 찍자고 해서 수영커플과 함께한 사진이었다. 어색해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우영의 팔을 잡아당겨 아린이는 팔짱을 꼈다. 거침없는 스킨십에 수줍어하던 우영의 표정이 떠올랐다. 활짝 웃고 있는 아린과 눈웃음을 짓고 있는 우영이가 이 날 얼마나 설렜었는지 지금도 아린은 마음이 떨렸다. 소개팅 후 집 앞까지 바래다준 우영은 아린에게 온전히 나를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서 자신에게 너무 아쉬운 만남이었다며 속삭였다. 달콤한 말을 들으며 아린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 멋있는 척을 하는 건지, 정말 멋진 사람인건지.


계속되는 면접의 탈락으로 지쳐가는 그녀에게 우영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존재하는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아린은 사랑에서 얻는 힘이 너무 컸기에 헤어짐이 힘들었다. 항상 자기 자신이 1순위였던 그녀에게 우영은 처음으로 자신보다 더 아꼈던 사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영에게 모닝콜을 했다. 잠이 덜 깨 목이 잠긴 그에게 나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했던 그 말이 아린을 세뇌시켰는지 모른다. 우영과 하루아침에 남이 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의 여자들이 바람둥이 남편들 때문에 울고불고 엉망이 되어가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봐온 아린은 우영이 회식을 할 때마다 그를 괴롭힐 것이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를 해서 도대체 언제 집에 가냐며 들들 볶다가 그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아마 수백 통의 부재중 전화를 남길지 모른다. 남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침대에 묶어놓은 영화 미저리 속 주인공처럼 집착의 끝을 보여주는 상상을 하다가 아린은 몸서리를 쳤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며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아린이었다.

친구가 말없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수영은 찬물을 건넸다. "또 혼자서 소설 쓰지 말고 오빠에게 전화해서 내일 만나자고 해라. 오빠가 니를 놓치기 싫으면 그 가시나 정리하겠지."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친구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수영이었다.


"오빠가 내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겁난다. 두 번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니까."

"지금은 화가 나서 그런 거고, 내일쯤 전화하면 괜찮을끼다. 원래 화 잘 안내는 사람이 한 번 폭발하면 무섭잖아. 오빠가 먼저 전화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딱 좋은데. 니가 혼자서 이렇게 안절부절이니 내가 열불 터진다 진짜. 이제 육 개월 밖에 안 됐는데 그렇게 좋나? 쫌 곰같이 굴지 말고 여우처럼 행동해라! 딱 봐도 니가 훨씬 오빠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운명을 믿어서 그런갑다. 첫눈에 반했잖아. 사귀는 동안 이렇게까지 싸워본 적도 없고... 항상 오빠가 다 맞춰줬지. 소년 같이 여린 목소리도 얼마나 귀여운데. 들을 때마다 막 마음이 간질간질거린다."

"세상에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자기 엄마 닮았다고 반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니 마더 콤플렉스가? 운명이 어디있노? 그냥 우연일 뿐이다."


연애라는 걸 처음 해봐서 환상에 빠져있는, 이 사랑이 전부라고 믿고 있는 아린에게 수영은 일침을 가했다. 운명이 아닌 우연이라고? 정말 그런 건지 내일 오빠를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만약에 최예나랑 선을 긋지 않는다면 수영이 말대로 그에게 아린은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마지막 소주잔을 비우며 아린은 우영에게 톡을 보냈다. '오빠... 내일 저녁에 퇴근하고 서면 투썸에서 봐. 할 말이 있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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