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전

흐릿한 기억 속의 그대

by 책방별곡

노을빛이 지붕을 핥고 지나가던 늦가을의 저녁이었다. 낡은 대문을 밀고 들어선 그녀는 마당 끝에 고요히 서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허리 굽은 어머니의 실루엣은 오래된 나무처럼 굳건했지만, 그 눈동자엔 묵은 슬픔이 고여 있었다. 노모가 치매 판정을 받은 지도 벌써 몇 년째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도, 가족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한 상태다.


어머니가 문득 흐릿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밤전... 참 맛있었는디..."

바람에 실린 그 말은 여자의 귓가를 간질이며 파문처럼 번졌다. 어릴 적, 어머니가 부쳐 주시던 밤전을 떠올리며 조용히 시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부여의 특산물인 통실하고 꽉 찬 밤은 없었다. 눈을 흘기는 가게 아주머니의 시선을 못 본 척한 채 뒤적뒤적거리며 좋은 걸로 골라 사 왔다. 딱딱한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고 삶은 뒤 곱게 으깼다. 설탕을 조금 넣어 단맛을 더하고, 밀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했던 방식대로 조심스럽게 반죽을 빚고 기름을 두른 팬에 노릇하게 부쳤다. 익숙한 향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접시에 따뜻한 밤전을 담아 어머니 앞에 놓았다. "엄마, 밤전이여. 엄마가 해주시던 거랑 똑같이 만들어 봤슈."

노모는 희미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 천천히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던 어머니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이 거 우리 옥이가 어릴 때 참 좋아했었는디."

그녀는 놀라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다.

"맞어유, 어릴 때 엄마가 해주면 손도 대기 전에 하나 더 달라고 했었잖여."

어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랬었제... 어린 게 뜨거운 것도 못 참고 입안 가득 넣고는..."

옥이는 순간 눈물이 돌았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자신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엄마, 더 드실거여?"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바삭하고 고소한 밤전의 맛이 혀끝에 감돌자, 깊숙이 묻혀 있던 기억이 살아나는 듯했다. 그녀는 그런 어머니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렇게 모녀는 밤전 한 조각을 나누며 오래된 시간 속으로 함께 걸어갔다.

따뜻한 기름 냄새와 달콤한 밤향이 두 사람을 감싸는 듯했다.

햇살은 점점 어두워지고, 마당 끝 감나무에는 바람이 스쳤다.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어머니와 딸은 서로를 찾고 있었다.


모녀는 마당을 건너 방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이부자리에 누웠다. 작은 전등 하나가 희미하게 빛을 흘렸고, 바깥에선 감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누운 채, 옆에 누운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었다. 노모는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문득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어릴 적 겨울밤 생각나냐… 눈 많이 왔던 밤이었는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먼 곳에서 건너온 듯 낮고 떨렸지만, 단단한 기억이 묻어 있었다.
“그날도 네 아부지가 도박판에서 안 돌아와서… 나는 밤새 부엌 아궁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렸쟤. 네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디, 약 살 돈도 없고, 가게 외상도 끊겨서… 내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는지…”
그녀는 그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릴 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 시린 밤공기와 꺼져가는 연탄불, 등을 토닥이던 어머니의 손길이 다시 피부 위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때 마음먹었제… 너희 삼 남매만큼은 꼭 따뜻하게 키우겠다고. 배곯게는 안 하자고.”
노모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녀는 이불속에서 조심스레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마르고 차가운 손끝이, 한때는 온 집안을 지탱하던 두꺼운 기둥 같았다는 걸 생각하며.

이전 01화입 안에서 기억이 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