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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원 May 20. 2021

종교에게 관용이 필요한 이유

국가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종교적 관용 신앙의 이해

Ⅰ. 종교의 관용, 그 기원에 대한 고찰. 신앙과 애국심


 종교의 관용에 대한 기원은 국가의 역사와 그 특징에서 비춰 찾을 수 있다. 고대에 종교에 대한 신앙은 애국심이 가지는 감정적 특징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발현되어왔다. 애국심은 국가를 이루는 국민이 국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설정했을 때 품는 감정이다. 국가는 자신의 일원인 국민에게는 아낌없는 보호와 시혜를 보장하는 대신에, 외부의 다른 국가를 잠정적 적 내지 현존하는 적으로 만들어 국민들의 단결을 이끌어낸다. 국가는 단결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인다. 이처럼 애국심은 살아가는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두 얼굴을 가진 감정인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웃나라에 대한 관용의 태도가 국민의 단결과 애국심을 저해하는 행위이며 국가의 이익이 보장되는 선을 넘는 타국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지양할 수밖에 없다. 종교에 대한 신앙심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와 성당의 자비는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으며,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감히 누릴 수 없는 하늘의 시혜다. 때문에 종교의 신앙심은 적국을 설정해야 발현하는 배타적 성격을 띤 애국심처럼,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소위 말하는 이단이 존재해야 발생할 수 있다. 그 결과, 종교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자신들이 점유하는 종교적 헤게모니의 붕괴로 인식했고, 그 주도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타 종교를 ‘이단’으로 설정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권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은 종교의 정점으로서 고귀한 존재로 여겨졌지만, 당시 교황청이 중심이 된 유럽권의 인식은 청산해야 할 이단세력의 수괴일 뿐이었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타 종교 박해는 여러 종교 중 특히 크리스트교에서 주도해왔다. 그들이 강조하는 사랑과 관용의 교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크리스트교는 온갖 명분과 이유를 대며 철저히 다른 종교를 탄압해왔다. 로크는 관용에 대한 편지를 발표하며 자신이 믿는 크리스트교의 뿌리 깊은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모순에 대해 지적했다. 크리스트교 특유의 타 종교 배타성은 로크가 활동하던 유럽 근대에 와서 더욱 심해진다. 타 종교를 배척하는 것을 넘어, 도덕적으로 타락한 크리스트교의 수뇌부를 비판하는 강직한 프로스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외부로 향하던 배타성의 잣대가 내부를 향하자 그 대가는 가혹했다. 비판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들의 다툼은 신교와 구교의 분리로 이어졌다.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말하는 성경의 본질은 이전투구 양상으로 치닫는 신교, 구교 간의 소모전에 의해 철저히 묻혔고, 이들은 서로를 배척하며 과거의 동지였던 이들조차 이제는 다르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였다. 종교 개혁으로 인한 기독교 내부 분열의 원인을 딱 한 가지로 설명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쌓아왔던 병폐가 많았고, 서양권 전체를 지배했던 헤게모니의 분열을 애초에 단 한 가지의 이유만으로 정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로 대표되는 한 종교의 분화와 갈등의 기저에 크리스천에게는 사랑과 자비를, 이단에게는 오직 죽음뿐을 강조했던 과거 기독교 전체의 배타적 신앙심이 짙게 깔려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적이 존재해야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한 거대 단일 종교는 그 배타적 감정이 자신들을 향할 줄은 몰랐고, 그 화살이 내부를 향하는 순간 개혁과 정통, 신교와 구교라는 이름으로 쪼개졌다. 

    


관용에 대한 편지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태두라 불리는 존 로크는 1632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유럽에서 기독교는 본문 제1장에서 언급되듯, 신교(정통주의)와 구교(복음주의)로 분리되어 극단적인 대립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두 종교는 1517년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분열된 이후, 자신이 속한 종교에는 무한한 관용을, 상대측에는 독한 저주를 퍼부으며 유럽 종교 사회의 대혼란을 지속시켰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존 로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다양한 고서를 접하며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의 꿈을 키우게 된다. 존 로크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던 분야는 ‘종교’였다. 종교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현 상황은 정치학자로서 흥미를 갖고 탐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로크는 현 혼란의 원인을 ‘종교적 관용’의 부재라 결론짓는다. 이후 로크는 1689년 자신이 탐구했던 ‘종교적 관용’의 문제를 집대성한 ‘관용에 대한 편지’라는 책을 출판한다. <관용에 대한 편지>에서 로크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 원인을 자신의 종교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이라고 우선 정의한다. 종교 갈등의 복합적 원인을 하나로 묶고 나니 그 다음 해결책의 도출은 명쾌했다. 타종교에 대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맹목적 충성’은 배제하고 사랑과 관용을 베푸는 ‘종교적 관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로크는 <관용에 대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첫째, 정치행위는 특정 종파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이뤄져야 한다. 둘째, 갈등과 이해차이로 분화된 각 기독교 종파는 서로 존중하는 미덕을 가져야 한다. 즉 정교의 분리와, 상호 관용의 태도가 ‘종교적 관용’을 실현하는 주요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로크의 모국이었던 영국은 영국 국왕이 교회의 수장의 자리에서 시민의 종교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히 억압해왔다. 정치와 종교의 최고 권력이 융합되자 다른 목소리와 다른 종교는 영국 사회에서 용인 받지 못했다. 국왕은 정치영역에서도 종교영역에서도 최고권을 행사하며 영국 사회의 다양한 종교적 목소리를 짓밟았다. 공적 영역인 정치에 사적 영역인 종교가 결합하자 영국에서 국왕이 수장을 자처하는 종교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었다. 로크는 이러한 자국의 상황이 당시 유럽의 신교와 구교의 갈등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로크는 국가운영과 정치를 철저히 세속화 한다. 로크에 의하면 국가는 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원들의 사회계약을 통해 세워졌으며, 이를 운용하는 정치는 철저히 세속적인 일이다. 영적 구원은 철저한 교회의 일이며 국가는 간섭할 수 없다. 국가가 영적 구원에 간섭하는 행위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월권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통치자나 정치 지도자는 종교지도자의 자리와 겸직할 수 없다. 이는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종교의 책무는 자신들을 믿는 교인들의 영적구원을 돕는 것이지 정치와 국가 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 또한 국가의 세속성을 무너뜨리는 월권이 된다. 


 정교 분리에 대한 로크에 이러한 견해는 로크가 평생을 연구했던 ‘자유주의’ 사상을 기초로 한다. 정치가 종교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국가는 시민의 안전과 자유보장이라는 사회계약의 세속화된 목적을 실현하는데 집중할 수 있다. 종교 역시 정치와 분리되면서 국가의 강제력이라는 수단을 잃고 신도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며 영적구원이라는 책임에 충실할 수 있었다. 로크는 <관용에 대한 편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본인의 저서에서 ‘자유주의’의 원리를 끈임 없이 강조해 왔다. 로크에게 있어 인간은 본인의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로서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진다. 때문에 로크는 한 개인이 종교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종교가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여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지는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다. 그리고 타자에 의해 강제되는 신앙은 진실한 믿음으로 성립될 수 없다. 신앙을 강제받는 사람은 진실하게 그 믿음을 내면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크는 교회가 무력으로 개인에게 신앙을 강제하는 것을 종교가 정치와 결합하여 국가의 세속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월권행위이자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탈로 봤다. 로크가 규정하는 개인에 대한 교회의 권한은 그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범위내의 충고와 훈계 정도에 국한되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영적구원에 힘써야 하지만, 이후 선택은 신도 개인에게 달려있다. 철저한 정교분리와 개인의 선택권의 보호는 양방 간 존중의 기틀을 마련하고 궁극적으로 ‘종교적 관용’의 실현을 가능케 만든다.


 또한 로크는 분화된 종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단편적으로 양방간의 갈등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신교 내 무수히 많은 교파들이 분리되어 다투는 다자간의 대치였다. 구교와 신교 내의 많은 종파들은 자신이 옳다며 서로를 배척하고 ‘이단’으로 낙인찍었다. 로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기존 성경 교리 외에 각자의 종파들이 자신들의 주관적 해석을 첨언한 새로운 명제들을 근거로 ‘분리’와 ‘배척’을 일삼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칭했다. 로크에게 있어 ‘이단’이란 크리스트교의 근원적, 기초적 토대인 성경 이외의 근거와 해석으로 파벌을 이루고 갈등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구교(정통주의)는 성경 이외에 교황의 칙령을 교단의 새로운 종교적 규칙으로 삼았으며 신교 내 다양한 교파들은 각자 자신들의 논리대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 자신들의 관점에 맞는 해석본을 새로운 교리로 삼아 적용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 자신이 창조해낸 새로운 교리와 규칙만이 옳다며 상대를 비난하고 배척했다. 로크의 관점에서 구교와 신교는 ‘이단’이자 ‘이교도’였다. 서로를 이교도라 비난하는 구교와 신교도 모두가 사실상 내용과 형식의 차이일 뿐 성경 외 규칙을 자의로 ‘신앙의 기초’로 규정하고 갈등을 일삼는 이단이라는 것이다. 로크는 기독교 각 분파가 서로가 다른 해석과 교리를 가지고 있음을 우선 인지하고 존중하는데서 ‘종교적 관용’이 시작된다고 했다. 교파마다 다른 성경에 대한 자의적, 이념적 해석은 그 성격 상 분명 이교도적 이지만 해서는 안되는 불법은 아니다. 구교든 신교든 성경 말씀 외 내용을 교리로 삼아 전파하는 이단적 행위를 자신들이 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선’과 ‘악’의 단순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로크에 따르면, 모든 종교적 교리는 인간의 자유와 시민사회 전체의 안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존중받을 수 있다. 이렇듯 로크는 자신의 ‘자유주의’사상을 기반으로 당시 크리스트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며 정교분리를 실현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관용의 미덕을 체득해 ‘종교적 관용’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교와 구교 모두를 비판하는 <관용에 대한 편지>가 1689년 출간되자 갈등과 대립으로 경직되어 있던 유럽 사회에는 일대 파란이 일어난다.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강조하는 로크의 책이 돌풍을 일으키자 한 프로스트가 로크의 <관용에 대한 편지>를 비판하는 글을 익명으로 기고한다. 익명의 프로스트는 로크가 주장하는 종교적 관용과 선택의 자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는 통칭 이단 척결을 위해서는 관용과 자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이단은 성경을 자신이 속한 종교와 다르게 해석하는 집단과 다른 신을 섬기는 타종교를 의미한다. 이에 로크는 1690년 여름, 가명을 사용하여 <관용에 대한 두 번째 편지>를 출간하여 익명의 프로스트의 주장에 반박한다. 그 프로스트 역시 1691년, 가명을 사용해 <관용에 대한 두 번째 편지>에 대해 재비판한다. 재밌게도 이때 로크는 ‘필안드로푸스’라는 가명을, 프로스트는 ‘필로그리스투스’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필안드로푸스( Philanthropus)’는 ‘인간을 사랑하는 자’를 ‘필로그리스투스(Philochristus)’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를 의미한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의 논쟁의 원인은 각자 살아온 삶의 양식과 가치관의 차이에 있다. 우선 로크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철저히 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종교의 문제점을 파헤친 인물이다. 그를 비판한 프로스트는 영국 청교도 신부로 정통 기독교 교리를 엄격한 전통으로 여기며 자랐을 것이다. 이제껏 자기가 믿어왔던 진리를 자유와 관용이라는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사고로 비판하는 것이 프로스트는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자 모욕이었을 것이다. 로크가 폐단과 악습이라 보았던 것이 그 프로스트에게는 절대적 진리이자 불변의 규칙이었고, 자신이 속한 종교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무리는 ‘이단’이며 척결의 대상이었다. 즉 프로스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의 ‘그리스도’의 의미를 자기 자신이 사유하고 있는 진리로 제한시켰고, 오직 그 진리를 믿는 자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로크는 익명의 프로스트가 제한시킨 ‘그리스도’의 의미를 뛰어넘어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서 기독교의 배타성과 불관용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 것이다. 1691년, 프로스트의 재 비판 이후 1692년 6월에 로크가 장문으로 ‘관용에 대한 세 번째 편지’를 작성해 다시 반박하는 것을 끝으로 이 논쟁은 마무리 된다. 



오늘날 종교와 국가신앙과 애국심.


 다시 1장의 내용으로 돌아와 보자. 필자는 1장에서 종교와 국가의 유사적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와 사회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타국을 배척해야 성립하는 감정이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앙은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한 사랑이기 전에 내가 믿는 종교 외의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낙인찍어야 성립한다. 그러나 애국심과 신앙의 특징적 유사성은 국가와 발전과 맞물려 변화한다. 유럽사회에서는 십자군 전쟁 이후 종교개혁을 겪으며 임마누엘 칸트와 볼테르와 같은 사상가들이 내세운 계몽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후 근대 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당시 유럽 크리스트교 사회를 비판한 로크에 의해 ‘종교적 관용’은 화두로 떠오른다. 그러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기초로 하는 계몽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팽창하는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에 의해 잠시 사장 당한다. 이 당시 서구 열강의 팽창은 동아시아 종교 사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동아시아 국가 백성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전파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각 나라 정부는 선교사와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기존 헤게모니의 붕괴를 우려해 신앙을 배타적 감정으로 만들어 타종교를 배척했던 과거 크리스트교의 행적과 유사한 양상이 똑같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제국주의 광기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치닫았고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라는 애국심의 어두운 부분을 극단화 시켰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제국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했다. 개인은 오로지 국가의 명령에 따라야 하며 국가의 성공이 곧 개인의 성공이 된다. 


 이 당시 전체주의로 극단화된 애국심은 국가의 성공을 위한 절대적 자양분 이었다. 절대적 필요 요소가 된 애국심은 일종의 신앙의 형태가 된다. 믿음의 객체가 ‘신’과 ‘교리’에서 ‘국가’와 ‘민족’으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신앙의 속성과 매우 유사하다. 즉 국가의 발전으로 탄생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는 애국심과 신앙을 하나의 형태로 결합시킨다. 전체주의가 용접한 애국심은 국가를 ‘세속의 화신’에서 ‘영적 구원’을 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만들어진 ‘애국심’은 로크가 살아있던 당시 유럽 종교 사회의 ‘믿음’처럼 타자를 철저히 배척하고 탄압한다. 실제로 2차세계 대전 당시에는 탄압의 대상이 ‘타종교’에서 ‘타민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치 파시즘의 ‘대주교’로 등극한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에게는 무한한 자비를, 월등한 게르만 민족에게 해가 되는 타민족 유대인에게는 오직 죽음 뿐을 강조하며 대략 천만명 이상의 유대인을 죽인다. 전체주의가 신앙화 시킨 애국심은 과거 종교개혁 당시 신교와 구교처럼 ‘종교적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국가, 민족이 아닌 다른 집단은 ‘이단’이며 무력을 사용해 무릎을 꿇려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로크의 <관용에 대한 편지>를 비난하며 강제적 ‘신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한 프로스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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