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환대로 살펴보는 영화 ‘쓰리빌보드’
혐오의 연쇄와 그 종결로써 환대를 중심으로.
Ⅰ. 서론
“무례함은 무례함을 낳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2017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배우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 중 일부다. 그녀의 수상소감은 당시 양극화된 미국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말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대니얼 지블랫은 자신의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오늘날 미국사회가 ‘혐오’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심리적 기제마저 무너진 상태라고 진단했다. 정치적 올바름을 부르짖으며 표현의 자유를 제단하는 리버럴 좌파와 혐오할 자유를 달라며 그들을 조롱과 비웃음으로 대응하는 ‘트럼피즘’ 추종자들의 대결로 혐오를 해서는 안된다는 도덕률은 소멸되었고, 타협없는 대립만이 미국 사회에 남았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극심한 양극화로 이미 심리적 분단 상황을 겪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양극단의 진영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저주하고 야유한다. 그들의 싸움판에 서로에 대한 관용과 환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협과 대화를 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굴종이자, 굴욕이다. 그들이 펼치는 증오의 서사는 적대하는 상대가 존재해야 자신이 존재한다는 기이한 ‘존재론적’ 서사로 이어진다.
위 사례처럼 혐오가 만연한 현실에서 혐오는 끊임없이 자기 복제를 시연하며, 사회를 혐오로 전염시킨다. 혐오는 피해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혐오로 대응하도록 만든다. 혐오와 증오같은 강한 심리적 반응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각인되고, 전파력이 강하다. 이렇게 사회적 규범과 도덕률이 붕괴되면 사회 구성원들간의 혐오가 쉽게 용인되고 표출될 가능성이 상승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혐오는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확대된다.
영화 ‘쓰리빌보드’는 혐오의 악순환을 전면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등장인물 밀프레드와 제이슨은 자신들이 품은 신념과 정의를 위해서 폭력까지 감수하며, 타협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일련의 행동은 혐오와 폭력의 연쇄를 가지고 오며, 갈등의 정점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여준다. 본 연구에서는 혐오의 시대를 승화한 듯한 영화 쓰리 빌보드를 주제로 극 중 벌어지는 혐오의 악순환과 종결부의 환대를 살펴본다. 결말의 환대를 본 연구자는 연쇄적 혐오의 종지부이자 또는 극복으로 분석한다.
Ⅱ. 쓰리빌보드, 혐오의 진창에서 환대를 가리키다.
1. 영화 속 혐오의 동력, ‘행동하는 정의’란 이름의 전차
영화의 주인공 밀프레드는 ‘행동하는 정의’의 표본이다. 그녀의 딸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으며, 그 시체는 불에 탔다. 그녀는 자신의 딸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감행한다. 대표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멸하는 세 개의 ‘빌보드’를 마을 도로에 세우는 것이다. 빌보드에 적힌 내용은 그녀의 괄괄한 성격을 또렷이 보여준다. “내 딸이 죽어가며 강간당했다”, “아직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거죠, 윌러비 서장?” 이 표지판은 마을 구성원 모두에게 존경받는 윌러비 경찰서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밀프레드는 자신을 설득하는 신부에게 모욕을 가하고, 자신이 시한부임을 밝히며 빌보드 개재를 만류하는 윌러비 서장에게도 “당신이 죽은 이후에는 효과가 없잖아요.”라고 대응하며 이른바 물불 가리지 않는 행동하는 정의를 보여준다.
또다른 영화의 주인공 딕슨은 윌러비 서장을 충실히 따르는 경찰로 밀프레드의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다. 딕슨 역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에 대해서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달려가는 ‘행동하는 정의’의 특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윌러비 서장의 자살 이후에 그 책임이 밀프레드에게 있다고 믿고, 빌보드 개재를 맡은 광고회사 사장인 레드 웰비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밖으로 내던진다.
행동하는 정의란 단순히 올바른 것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올바른 행동을 실천하여 사회적 불의나 부당함을 바로잡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뜻한다. 즉, 실제 행동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행동하는 정의’란 말이다. 밀프레드와 딕슨은 각자 자신의 신념을 올바르다고 믿고 정의로 삼는다. 그리고 물불 가리지 않고 실천한다. 그들의 행위가 비사회적으로 보이는 데는 타협이 불가능한 극단적인 ‘행동하는 정의’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행동이 정의롭지 않더라도, 그들의 내면에서 그들의 행위는 옳은 것이며, 곧 정의다. 그들은 그렇게 내면화한 행동하는 정의를 행위의 근거로 삼았다.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하는 정의’는 그들 스스로에게 만족감은 줄지 몰라도, 사회적인 고립을 야기하고 혐오의 연쇄를 배태한다. 밀프레드는 광고판 개재이후 신부를 비롯한 경찰서장 윌러비와 척을 지며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와 적대한다. 그리고 딕슨은 윌러비의 복수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경찰의 신분으로 광고회사 사장을 구타한다. 여기서 행동하는 정의는 혐오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인간이 세운 ‘도덕률’을 형해화한다.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딸의 복수라는 행동하는 정의에 사로잡힌 밀프레드는 자신을 도와준 제임스에게 고맙다고 표현하기는커녕, 그의 신체적 장애를 비하하는 혐오 발언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또한 딕슨의 구타는 윌러비 서장에 대한 복수심 뿐만 아니라, 광고회사 사장인 레드가 미국 백인 사회에서 멸시의 대상이었던 ‘아일랜드계 백인’이었다는 사실이 작용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처럼 ‘행동하는 정의’는 정의의 적극적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극단적으로 발현될 시에는 행위자의 눈과 귀를 막고 기본적인 도덕률마저 무감하게 만든다. 이렇게 행동하는 정의를 동력으로 삼아 상호간의 피튀기는 보복으로 전개되던 혐오의 연쇄는 밀프레드가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는 사건으로 정점을 찍는다.
2. 혐오하고 적대하는 자와 혐오받고 적대받는 자, 그 선과 악의 모호성
밀프레드는 오랫동안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피해자였다. 그녀의 전남편 찰리는 이혼한 전 아내에게도 손을 댈 정도로 손버릇이 나쁘다. 밀프레드가 오랫동안 혐오와 적대의 객체로 살아왔지만, 앤절라의 죽음 이후로 본격적으로 그 입장이 뒤집힌다. 그녀는 자신의 정의를 만류하는 이들을 방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경멸조의 언어로 모욕을 주고, 사회적 고립을 자처한다. 자신을 돕는 제임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보다는 그의 장애를 비하하는 언사를 가할 뿐이다. 이렇듯 영화에서 밀프레드는 ‘행동하는 정의’를 앞세운 인물이지만, 실상 그렇게 고결하거나 선하지 않다. 그녀 역시 ‘혐오받고 적대받는 자’임과 동시에 ‘혐오하고 적대하는 자’인 것이다.
경찰 딕슨은 전형적인 남부 백인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인종차별을 일삼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호모포비아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향인 윌러비 서장을 존경하는 상사로 따른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혐오 기제를 폭발적으로 터뜨리는 원인이 된다. 그는 평소에 ‘진저’라고 혐오하던 광고회사 사장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2층 사무실에서 던져버린다. 그의 이런 막장 행각은 윌러비의 죽음 이후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 앞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새로 부임한 흑인 경찰서장 앞에서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그를 조롱한다. 그 결과 그는 ‘형사’란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제복경찰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처럼 딕슨은 ‘혐오하고 적대하는 자’의 위치에서 타인과의 연대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고립을 자처하는 인물로 살펴볼 수 있다.
영화는 이들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서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각자의 사연을 규정하여 행동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들이 ‘악’해서 혐오와 적대의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밀프레드는 딸의 죽음이라는 근거를, 딕슨은 존경하던 상사의 죽음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각자의 행동하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밀프레드와 딕슨의 행동이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각축전이기는 했지만, 이들의 행위를 그저 악하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일견 거칠어보이는 밀프레드는 버둥거리는 벌레를 원상태로 뒤집어주는 이타심을 가졌고, 딕슨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상사에 대한 존경을 가지는 인물이다. 그들 개인이 도덕적인 흠결이 있을지언정, 악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이처럼 영화는 혐오와 적대가 특수한 경우에 발현될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고, 일상성과 보편성에도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렇게 선과 악의 모호함이란 어느 지점에서 발아한 혐오가 결국 방화와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3. 혐오의 연쇄, 복수 당해야 마땅하다는 응보라는 악순환
앞서 말했듯, 혐오는 끈임없이 자기복제하며 사회를 혐오로 전염시킨다. 혐오는 끊임없는 연쇄 고리에서 순환하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고, 피해자가 또다른 가해자가 되게끔 만든다. 영화 속 밀프레드 역시 남편의 폭력과 혐오를 겪었던 피해자임과 동시에 자신의 복수심으로 타자에게 적개와 증오를 보이는 가해자이다.
이런 분노와 혐오의 폭력적인 분출이 어떤 식으로 순환하는지 영화는 일련의 사건들로 보여준다. 우선 밀프레드는 혐오와 적대의 객체였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또다른 혐오와 적대를 표출하는 인물이다. 밀프레드의 행동은 딕슨의 혐오와 적대라는 결과를 도출한다. 딕슨은 밀프레드의 과격한 고집이 자신의 상사 윌러비 서장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광고를 게재한 사장을 폭행한다. 이렇게 ‘혐오하고 적대하는 딕슨’의 행동은 또다시 ‘혐오하고 적대하는 밀프레드’로 이어졌다. 이후 빌보드가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밀프레드는 딕슨이 보인 그간의 행적만으로 그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행동하는 정의를 방해하는 요주의 인물인 딕슨이 실제로 그랬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에게 보복을 감행하기로 한다. 그녀는 화염병을 경찰서에 던지며 화재를 일으킨다. 딕슨이 빌보드를 태웠으니, 자신 역시 그의 직장을 불태우겠다는 일종의 ‘응보’였던 셈이다. 문제는 빌보드 방화 범인이 딕슨이 아니었으며, 그 경찰서 안에 윌러비 서장의 편지를 읽고 있는 딕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이들은 주어졌든 아니면 스스로 뒤집어썼든 혐오와 적대의 주체와 객체라는 구도에서 돌고 도는 보복의 순환을 감내한다. 그리고 그 강도는 단순한 모욕에서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방화에 이르기까지, 점차 강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밀프레드는 이런 보복의 악순환이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는 윌러비 서장이 스스로 시한부임을 밝히며 만류를 하는 것을 두고 “당신이 죽으면 효과가 없다.”고 응수하는 인물이다. 용서와 화해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당장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행동하는 정의’를 곧장 실현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이러한 고집은 딕슨이라는 반동인물로 하여금 상호간 혐오의 연쇄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딕슨 역시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경찰의 신분을 이용해 밀프레드를 거세게 압박하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과격하고, 혐오가 기저에 깔린 행보는 밀프레드의 경찰서 방화 사건을 초래했다. 눈여겨 볼 점은 혐오의 악순환의 한 축을 담당하며, 초반부에는 혐오의 가해자의 위치에 서있던 그가 경찰서 방화 사건에서는 목숨을 위협받는 혐오의 피해자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4. 연쇄적 혐오와 증오의 종지부, 결말의 환대
영화의 결말은 뜻밖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혐오의 연쇄가 연대와 환대로 종지부를 찍는다. 경찰서 방화 사건 당시 경찰서에 있었던 딕슨은 윌러비 서장이 자신에게 남긴 편지를 읽고 개심하였다. 그는 밀프레드가 던진 화염병에 경찰서에 화재가 발생하자 앤젤라의 사건파일을 필사적으로 안고 탈출한다. 자신의 상사를 죽였다는 의심으로 혐오해 마지않던 밀프레드의 딸 관련 사건 파일을 가장 먼저 챙겨 나온 것이다. 이는 밀프레드에게 폭력적으로 보복하려고 했던 딕슨의 자기자신에 대한 ‘반성’이자, 그녀에 대한 ‘배려’임을 알 수 있다. 이후 딕슨은 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바로 옆 병상에는 자신이 2층에서 던졌던 광고회사 사장 레드가 누워있었다. 딕슨이 벌인 돌출적인 일방적인 행동의 희생자였던 레드는 처음에는 옆에 화상을 입은 환자가 딕슨이라는 사실을 알고 분노를 금치 못하지만, 이내 오렌지 주스에 빨대를 꽂아 그에게 건넨다. 자신을 가혹하게 폭행했던 그에게 주스를 건넨다는 것은 용서의 의미도 있지만, 일종의 ‘환대’와 ‘배려’의 의미도 있다. 만약 레드가 관용을 베풀지 않고, 영화의 중반부처럼 증오의 연쇄를 이어갔다면 결말은 딕슨의 죽음으로 귀결되었을 테다. 이처럼 경찰서 방화 사건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배려와 환대의 흐름은 딕슨을 휘감고 있던 혐오의 악순환이 종지부를 찍고 있음을 시사한다.
밀프레드 역시 경찰서 방화 사건 이후 스스로에게 가했던 사회적 고립과 타인에 대한 지독한 증오의 연쇄를 서서히 끝맺기 시작한다. 우선 경찰서 방화 당시 자신에게 유리한 알리바이를 제공한 제임스의 부탁대로 그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환대’를 의미하는 ‘메타포’로 널리 활용되곤 한다. 영화 속 식사 장면은 종종 '환대'의 의미를 가진다. 식사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강화하고, 신뢰와 우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순간이며,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은 그들이 서로를 환대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이는 갈등의 해결, 화해, 혹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퀀스에서 충격적이게도 경찰서 방화사건의 발단이 된 빌보드 방화가 전남편인 찰리의 소행임이 드러난다. 그녀는 분노로 찰리에게 즉각적인 보복을 가하고자 하지만, 이내 멈추고 식당을 나온다. 이제껏 그녀의 행보를 보면 찰리는 즉각적인 보복을 당했어야 맞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자신의 오인으로 딕슨이 화상을 입고, 자신을 증오하던 그가 앤젤라의 사건파일을 안전하게 들고 나온 것을 지켜본 이후 그녀는 행동하는 정의를 동력으로 뿜어대던 증오와 혐오를 거두었다.
이후 딕슨은 앤젤라의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성을 의도적으로 도발해서 DNA를 채취하여 검사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검사 소견을 받게 된다. 그 결과를 딕슨은 밀프레드에게 알리고, 그녀는 실망한다. 그런 그녀에게 딕슨은 앤젤라가 아닐 뿐 실제로 유사한 범죄를 저지른 그 남성을 사적 재제하자고 제안한다. 다음날 딕슨과 밀프레드는 같은 차를 타고 그 남성이 사는 아이다호로 향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동승한 차량에서 밀프레드는 얼굴에 화상을 입은 딕슨에게 경찰서 방화사건의 범인이 자신임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딕슨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반응을 보인다. 이 얘기를 들은 그녀는 작중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다. 이 장면에서 직접적인 화해의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혐오의 연쇄에서 서로에게 폭력을 쏟아붇던 양자가 종국에 환대와 연대로 화합했음을 보여준다.
Ⅲ. 결론
지금까지 영화 쓰리 빌보드를 혐오와 증오의 연쇄, 그리고 환대의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갈등의 양상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서로를 증오하고, ‘지연된 정의’를 참지 못해 맹목적인 ‘행동하는 정의’를 추구한다. 혐오 범죄는 또 다른 혐오를 잉태하고, 우리의 삶이 폭력의 무한한 반복에 놓이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사회의 문제를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말부를 통해 나름대로의 해결법도 제시한다. 바로 환대와 연대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가 그나마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자신을 구타한 딕슨에게 레드가 빨대를 꽂은 주스를 건네는 것, 밀프레드가 빌보드를 방화한 범인이 자기라고 고백한 남편을 구타하지 않고 인내한 것처럼 작은 배려와 관용에 있다. 특히 혐오의 연쇄에서 무한히 회전만 반복할 것 같았던 딕슨이 윌러비 서장의 편지를 읽고 개심하여 자신의 직업적인 사명을 다하려는 모습, 적대하던 밀프레드를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은 우리의 극단적인 혐오 사회가 대화와 타협의 사회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점점 ‘휴머니즘’의 개념이 퇴색되는 현실이다.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혐오과 증오가 일상화 되었다.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보의 공식을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외치고 절대 진리로 숭상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더욱 가속화 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럴 때 일수록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듯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과 연대하고 그들을 환대해야한다. 남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이 영화는 이 시대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