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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Sep 25. 2023

요즘 읽고 생각하는 것들

최근 읽은 책들. 포크너, 괴테, 다자이, 체호프,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교제 관계, 활동 범위 등의 나의 실제 삶은 얼마나 편협한가. 일천하기 짝이 없는 나의 경험 세계에서 나는 늘 벗어나고 싶었다. 항상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려고 애쓰지만 그 모든 의식의 주체가 '나'란 점에서 한계는 뚜렷하다. 그럴 때마다 '진정한 새로움'을 선사하는 건 다름 아닌 영화와 문학이었다. 그렇기에 자의식 과잉처럼 보이기도 하는 내 취미들은, 적어도 나에겐 나를 둘러싼 알을 깨뜨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네 멋대로 해라> - 장 뤽 고다르


여기 살면서 프랑스 고전 영화들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말하자면 장 뤽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의 누벨바그 영화들. 그들은 뻔하디 뻔하다 못해 경악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요즘 영화들 틈에서, 나를 좋은 의미로 넋 놓게 만든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한국 자막이 없다는 것. 영화적 미장센과 외국어 자막을 동시에 캐치하기엔 아직 난 안구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고, 이는 꽤나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어와 영어 범벅인 작품들에 빠져 살다 보면 한글이 너무나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주프랑스한국문화원은 그런 나에게 그저 한줄기 빛이 되어 주고 있다. 한글로 번역된 책들을 공짜로 빌려주다니. 매번 설레지만 결국 빌리는 것은 항상 고전이었다. 꽤나 많은 고전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하게도 읽지 않은 게 훨씬 많았다. 아직 <전쟁과 평화>는 책으로는 손도 못 댔고, 그렇다고 자기 계발서는 성격상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고민 끝에 고른 책들, 그리고 그것들이 내게 불러일으킨 것들에 대해 짧게 끄적이려 한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무릇 예술가라면 답을 외치는 대신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위대함은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닌 텍스트가 독자에게 일으키는 생각 방울방울들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 각자의 삶이 다르듯, 작품을 받아들이는 독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작품 해설이 아닌 예술이 던진 질문에 자신만의 대답을 내놓을 때, 독자도 예술의 주체가 될 수 있다.



1.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나는 관 속에 누워있고, 내 관을 둘러싼 주변 이들의 속내를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이 질문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엄마는 죽었고 남겨진 건 자식들과 아빠, 그리고 이웃들. 그들 각자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겉으로 어떤 언행을 드러내는가. 전지적 시점이 아닌 1인칭으로 각자의 독백만이 나열되어 있기에, 독자는 그 심연을 훨씬 더 깊이 있게 내려다볼 수 있다. 절대적인 사건에 대한 견해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인간 존재에 대한 허무함과 애틋함,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작품 내내 엄마의 존재와 죽음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게 중요하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나는, 나를 떠나보내는 이에게 무얼 바랄까. 눈물 몇 방울과 짧은 회고와 함께 서서히 잊힐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했다. 사진과 기억, 그리고 글 몇 편이겠지.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 흔들리는 촛불 같은 거면 좋겠다. 가진 거에 비해 이상은 드높고,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형편없지만 애썼다는 것. 적어도 내 사람들이 나를, 추락과 흔들림 속에서도 위를 바라보며 발버둥 쳤던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난 만족하겠지. 그게 진짜 나니까. 언젠가 나의 죽음이 그것을 대변할 수 있길 바란다. 책을 다 읽고 빈지노의 <If I die tomorrow>를 계속해서 들었다.


가장 좋아한 문장

죄가 단순히 말의 문제인 사람에게는 구원도 단지 말에 불과하다.



2.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이 두 작품을 묶어 쓴 이유는 둘 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와 작품의 주인공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두 작가가 삶에서 겪었던 실제 사건들이 소설 속에 녹아들어 있음은 사실로 드러났기에 그것에 중점을 둬서 읽었다.



<인간 실격>을 5년 전에 읽었을 때는 왜 이런 감정을 가지지, 를 생각했었다. 이번엔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보다는 그 감정들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에 집중했다. 이 책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는 실제로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원하는 대로 삶을 거두었다고 한다. 나는 온전한 그의 삶을 알 수 없기에 그 선택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렇기에 얼마나 힘들었으면..이라는 껍데기뿐인 동정 또한 보내고 싶지 않다.


베르테르의 마지막 선택 또한 마찬가지다. 초반부의 그의 애틋한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렇게 까지 갈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선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분명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같은 듯 다른 두 작품을 읽고 나는 비극의 필요성을 생각했다. 작가는 왜 비극적 결말을 쓰는가? 그리스 비극을 읽을 때도 생각했던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왜 자신의 눈을 찌르고, 그것으로 왜 이야기가 끝나야 하는가. 고통이란 인간의 숙명이다. 비극의 순기능은 감정의 공유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때로는 부조리하게, 때론 무자비하게 찾아오는 고통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살아가는 인간이 느껴야 하는 통과 의례적인 것이라는 것. 쉽게 말하면, 사샤 슬론의 <Is it just me?> 같은 노래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같은 것이다.


늘 큰 위로를 주는 곡. 고통의 공유


하지만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단순한 감정의 공유에 그쳐선 안된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스파이더 맨 : 노 웨이 홈>에는 세 명의 피터 파커가 등장한다. 그들의 고통의 공유와, 공동체적 투합이 없었다면 영화가 그토록 아름다운 엔딩을 가질 수 있었을까?



가장 좋아한 문장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인간 실격>의 첫 문장이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타락의 방패다. 부끄러움 많은 윤동주가 그의 걸작들을 써냈듯이. 그 감정을 잊지 않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3. <체호프 희곡 전집> + <바냐 아저씨> - 안톤 체호프


소설만 하도 읽어서 희곡도 좀 읽어야겠다 싶어서 택했지만, 단숨에 내 최애 작가에 등극한 안톤 체호프. 체호프는 늘 작은 것들에 주목한다. 그의 작품에 흥미진진한 설정이나 놀라운 사건 따위는 없다. 지극히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이야기는 진행되고, 사건보다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면에 주목한다. 게다가 그 결말이 대부분 미결 사건으로... 모호함을 던진다. 이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체호프 글을 읽다 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 느낌이 난다. 내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정답보다는 질문을 주는-에 가장 부합하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단연 <바냐 아저씨>. 나를 구원해 준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의 크나큰 밑바탕은 바로 이 작품이었다.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난다는 것. 그들에게도 일어났다는 것. 그런 일을 겪어도 살아간다는 것. 삶은 그렇게 계속되어 왔고 계속될 것이라는 것.'

가장 삶에 닿아 있는 울림을 준다.


가장 좋아한 대사. '그 대사'다.



4. <햄릿> -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는 왜 GOAT인가? 알고 싶었고 무턱대고 읽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초등학생 때 단편으로만 읽었지 햄릿 극 전체를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읽으면서 유명한 대사가 그리도 널리 유명한 까닭, 그리고 셰익스피어라는 작가가 추앙받는 이유를 고민했다. 내가 내린 해답은 다음과 같다.


셰익스피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햄릿>에서는 꿈(환상) 같이 비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도구도 마다하지 않고 사용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나약함, 그 속의 위대함'을 동시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독자의 보편성에 닿는다.


나는 운명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꽃이 피기 전에 자신의 색을 정할 수 없듯, 이 세상에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의에 반해 작용하는 운명의 나쁜 힘 또한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다. 세상은 내 선의대로 흘러가지 않거든. 박찬욱이 그것에 스러져 간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면, 이 비극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그 운명에 저항할 수 있음이 부각된다. 그 저항이 드라마틱한 반전을 가져오지 않고, 비극으로 머무는 것 또한 중요하다.



햄릿이 숙부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지만 그 숙부가 기도를 하고 있었기에, 이대로 죽으면 천국에 갈까 복수를 포기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잔인한 동기와 그렇지 않은 결과라는 아이러니, 복수심이라는 얄팍한 감정에 대한 유머스러운 풍자. 그것에서 나아가 항상 선택과 도덕적 딜레마 사이에 고민하는 햄릿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지 않던가.)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아이러니 속에서 고민과 후회와 선택을 반복하는 우리의 모습은, 그 보편적 인간상은. 햄릿에 닿아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널리고 널린 시대다. 하지만 그것이 만담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인류 거대 담론을 설득하기는 어렵다. 봉준호가 훌륭한 이유도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다. 대중에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모두에게 닿을 순 없다지만, 나는 개성이 꼿꼿하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예술이 좋다.




되돌아보니 온통 어두운 작품들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최근에 빌린 책은 심지어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다.. 취향은 역시 고칠 수 없나 보다. 사실 고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지경을 넓히려면 더 넓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독서를 위한 독서는 무의미하다. 그것이 알을 깨는 도구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À bientô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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