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거창하게 지었지만 사실 별 거 없다. 1년 회고라기 보단, 요즘 밤에 잠 안 자고 생각한 주제 3가지가 있다. 2024년을 시작할 때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되돌아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 기록으로 남긴다. 전부 내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여러분의 생각 꽃밭에 한 줌의 민들레 씨가 되길 바라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지 않던가?
몇몇 도시를 다녀온 경험 만으로 그 국가를 판단해선 안될 것이다. 프랑스만 해도 소매치기니 인종차별이니,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느니 여러 고정관념들이 있다. 하지만 그 프레임 만으로 온전히 프랑스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내 프랑스 친구들과 크로와상을, 르누아르의 그림과 야네스 바르다의 영화를. 센 강의 낭만을, 무엇보다 음바페를 사랑한다.
특정 국가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언어 양식은 문화와 맞물려, 보다 많은 것을 내포한다. 영화 자막만 보더라도 서술어로 끝나는 한국어와 목적어로 끝나는 외국어가 작품 내에서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해'와 I love 'you'의 차이랄까, 각자 다른 매력이 있다.)
어찌 됐든 프랑스살이가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된 만큼 프랑스어 또한 내게서 뗄 수 없는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무언가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른 채 단순히 살아봤다는 건 멋없기도 하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처음에 비해 실력이 늘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여전히 시제나 동사 변형으로 인해 열받는 상황은 자주 찾아온다. 때려치우고픈 충동이 들 때면 나는 좋아하는 배우들의 불어 인터뷰를 보며 동기 부여를 받는 편이다. 마리옹 코티아르나 티모시 샬라매의 유창한 프랑스어를 듣다 보면, 유치한 나는 다시 의욕으로 가득 찬다.
그러다 우연히 브래들리 쿠퍼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홍보차 프랑스 방송에 출연하게 됐는데, 유창한 불어를 할 수 있음에도 시종일관 영어로 대답했다. 사회자가 이유를 물었고, 그는 공손하게 함께 온 여배우 캐리 멀리건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프랑스 방송이니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이 모두에게 편하겠지만, 홀로 인터뷰에서 소외될 그녀를 위해 정중하게 영어를 사용하겠다는 말만 불어로 양해를 구했다. OMG 간지 폭발 모먼트.. 불어 실력 뽐내기로 대중의 호응을 얻기보다, 그는 신사답게 행동하기를 택했다.
꽤나 인상적이었다. 개인주의가 물들면서 타인보다 자신을 챙기기 바쁜 세상 아니던가. 그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나 없이는 남도 없으니. 하지만 그의 짧은 인터뷰로 다시 한번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작은'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친절과 다정함.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떠올랐다. 나의 욕망만큼이나 너의 욕망이 소중하고, 그 수많은 가능성과 함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우주의 거대한 무의미함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지극히 사소한 친절함, 다정함 덕분이라는 것을.
내가 아는 유일한 건 친절해야 한다는 거야.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엔 말이야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브래들리 쿠퍼는 그것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했던 것이다.
호들갑 떨지 말고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친절을, 다정함을 베풀자.
그리고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뇌 속에 자연스럽게 코끼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안철수가 '저는 MB의 아바타가 아닙니다'라고 외침으로 인해 그는 MB의 아바타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세금 폭탄'이라는 키워드가 언론에 자주 등장할수록, 국민들의 뇌에는 세금==폭탄이라는 프레임이 활성화되어, 자연스레 세금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보수진영의 전략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규정된 틀을 반박하려 할수록 그 프레임이 강화되는 이 딜레마가.
조지 레이코프의 인지언어학 책을 읽으며 '프레임 이론'에 입문하게 되었다. 인간의 사고 체계는 은유적이어서, 특정한 언어와 관념이 얽혀 있으면, 그 언어가 연상시키는 것으로 관념을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코끼리가 떠오르는 이유다.
고개를 끄덕이다 내 안에 어떠한 프레임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래와 같다.
마블영화 -> 대중을 망치는 주범. 영화관을 '시네마'가 아닌 '테마파크'로 만드는 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축구도 영입도 못하면서 매번 언론에 징징대는 잘못된 팀
홍상수 -> 온갖 똥폼 다잡지만 결국 그게 전부인 영화감독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는 걸 제일 싫어하면서도, 내 깊은 내면에 저런 프레임이 있음을 돌아보게 됐다.
마블영화 중에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보면서 울었으면서... 맨유팬 전부가 나쁜 것도 아닌데... 홍상수 작품 중에 <옥희의 영화>는 보고 박수쳤으면서...
이미 내 인식에 박힌 프레임에 찌들어, '마블' 소리만 들어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나를 반성한다. 나는 또 다른 특정인이나 특정 국가를 볼 때에 이미 특정한 프레임이 사로잡혀있진 않은가? 를 생각한다.
프레임이 아닌, 액자가 아닌. 그 안의 내면을 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 왕자>속 여우의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문화'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거리에 있는 세련된 장식물이나 화려한 건물을 생각하기 쉽다. 우리의 삶에서 문화는 그런 작은 디테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실보다 보이지 않는 것. 즉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한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화의 역할인 것이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듯 말이다.
그러한 문화가 변화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특히 미디어 문화에서 그렇다. 대중들은 이제 긴 러닝타임을 지루해하고 보다 짧고 보다 강렬한 것을 원한다. 영화보다 영화 요약본을 보기 시작했고, 하루에는 수십 편의 인스타그램 릴스가 소비된다.
이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단순히 짧은 것만을 찾으며 사고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위험하지만, 새롭게 변화하는 컨텐츠들이 여전히 '소통'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면 그 또한 새로운 문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자들은, 예술가들은 어때야 하는가? 이런 상황을 한탄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대중이 없이는 절대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무언가를 만들 때 모든 대중을 고려한다고 해서 세계에서 다 알아주는 건 아니다. 나는 대중이라는 모호한 대상을 지향해 작품을 만들면 결국 누구에게도 가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누군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만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신의 내면적 체험과 감정의 탐구를 통해 인간이라는 종의 보편에 닿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 영화 <시네마 천국>이 그랬지 않던가.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이 시네마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 발언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영화가 거대한 오락시설에서 소비되는 생산품으로 전락하는 데에 대한 우려라는 점에서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러닝타임이 세 시간이 넘는 <아이리쉬 맨>, <플라워 킬링 문> 같은 진정한 '시네마'를 연출하며 대중을 설득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시대도 바뀌고 문화도 바뀌지만, 여전히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 환경에 징징대지 않고 증명하는 것이 진짜 예술가 아닐까? 올해 미디어 산업을 지켜보는 재미가 더욱 커질 것 같다.
2024는 보다 더 행동으로 신념을 대변하는 한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