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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Mar 09. 2024

진실과 진심

<추락의 해부>, <버닝>,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한국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갤러리를 뒤적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써 준 편지를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한 글귀가 나에게 닿았다.


돌틈 사이에 홀로 서있는 한 꽃봉오리
무심히 길을 걷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한 꽃이
홀로이기에 더 아름답다

혼자 핀 꽃은 저 자신이 꽃인지 모를 수 있어도

저 꽃은 세상 아름다운 꽃이다


내가 가족처럼 애정하는 영민이가 나태주의 '혼자서'를 읽고 쓴 시다. 참 곱다. 그런데 저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은 놀랍게도 '진실'에 관한 것이었다.



저 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진실인가? 적어도 저 관찰자에게는 그러하다.

하지만 그 꽃은 홀로이기에,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애초에 관찰자가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이라는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또 다른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겨울에 태어난 하루살이가 함박눈을 맞고 지구에서의 '하루의 생'을 마감한다.

하늘나라로 가서 하루살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지구는 차가움 뿐인 세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봄이면 벚꽃이 피고, 가을엔 코스모스가 피는 지구 아니던가?


보이는 것은 진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판단 불가능한 것이라면.

하루살이가 믿는 진실을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진실이 각자에게 가변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뜬구름 같은 몽상이지만 '진실'에 관한 나의 의문은 공교롭게도 최근에 본 영화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 덕에 진실에 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역시 영화가 최고야



추락의 해부


남편의 추락사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아내.

유일한 목격자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과 안내견뿐.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우발적 자살, 혹은 의도된 살인?


'진실'을 두고 벌어지는 법정 공방극 속에서 '추락'은 철저히 '해부'된다.

부부의 재정적 문제부터 아내의 성 정체성, 나아가 외도까지. 모든 것은 난도질당한다.

하지만 사건에 얽힌 정황과 관계가 명료해질수록, 진실은 더욱더 흐릿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결정하는 거야.
한 가지를 믿어야 하는데,
두 가지 선택이 있으니.
너는 선택해야만 해.


시각장애인 아들 다니엘은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을 '선택'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이거다 :

'발췌한 현실의 일부분이 진실이 될 수 있는가? '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온전히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존재다. 각자가 판단해야 할 뿐이다.


나는 내가 믿는 어떠한 것에 관하여, 그것을 '왜' 진실이라고 믿는가.

그것은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 더 소중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무엇'에 앞서 '왜'가 되어야 한다.


버닝



버닝은 언제 봐도 미스터리 가득한 영화다.


우물은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종수(유아인)에게 걸려온 전화는 누가 걸었던 것일까.

벤(스티븐 연)은 사람을 죽였을까.


진실의 실타래는 하나도 풀리지 않고 끝나기에, <버닝> 만큼 호불호가 갈리고 다채로운 해석이 나오는 영화도 드문 것 같다.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


해미(전종서)의 이 대사는 사실 작은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종수가 중학교 시절 자신을 못생겼다고 놀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해미는, 성형수술을 한 뒤 다시 나타나 자신의 미모에 관해 이 질문을 던진다.


유치해 보이는 이 대사가 나에게 인상 깊게 다가온 까닭은, '자신의 진실'을 '상대의 판단'으로 말하기를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닝>에는 진실에 관한 또 다른 해미의 대사가 등장한다.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그게 다야


귤이 먹고 싶을 때 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

그것은 귤이 없다는 '진실'을 부정함과 동시에,

귤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다는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우물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 영화를 파고들다 보면, '정말 우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물의 진실에 관해 사람들의 증언이 엇갈린다는 것. 나아가 종수는 풀리지 않는 여러 진실들에 관해 자신만의 판단을 내린다는 것. 그렇게 진실을 선택한다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의미를 찾는 이 청춘의 이야기에서, 진실에 관한 영화의 태도는 <추락의 해부>와도 닿아있는 듯하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민정(이유영)은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다닌다는 소문으로 의심을 받고, 남자친구와 대판 싸운다.

영수(김주혁)는 곧장 화를 냈지만, 정말 자신의 여자친구가 그랬는지 진실을 궁금해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이유영이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시는 장면은 자주 등장한다. (관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그때마다 여자는

'저를 아세요?',

'저는 민정이가 아니에요',

'민정이는 제 일란성쌍둥이 언니예요'

따위의 말을 하며 상황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남자들은 황당한 반응을 보이거나 한숨을 내쉬고, 화를 내기도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홍상수 감독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남자와 술을 마시던 꽃뱀 같은 그 여자는 민정일 수도, 비슷한 외모를 가진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민정이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외모인가, 언행인가, 성격인가.

인간은 모든 소문과 이미지,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진실로만 한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가?



극 중 민정은 이런 대사를 한다.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아요.


이 영화 또한 '진실'에 대해서 앞선 두 편의 영화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나아가, 인간을 애초에 온전한 진실을 알 수 있을 만큼의 물리적 능력을 가질 수 없음을 강하게 역설한다.




영화의 제목은 생뚱맞게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다. 처음엔 홍상수답게 폼만 잡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깊이 생각해 봤다.


'당신자신': 말 그대로 당신 스스로의 자신, 말하자면 선천적 존재. (절대적 진실)

'당신의 것': 당신을 정의하는 또 다른 방법. 당신의 것들로 정의되는 당신. 즉 후천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는 당신. (인간이 바라보는 진실)


어차피 내가 '당신자신'을 다 아는 것이 불가능하니, 나는 그저 '당신의 것'이 되어 당신 곁에 머물겠다는 다짐. 그것으로 이 영화의 엔딩을 바라보니 무척 훌륭하다.




이 사진에서 당신이 발견한 진실이 궁금해


가치 판단에 있어 인간은 절대적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진실을 선택한다.


'산타클로스는 없다'는 차가운 진실을 선택할 것인가,

'산타클로스 덕분에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따뜻한 진실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진실과 진심'으로 지었다.


당신은 어떤 진실을 믿고 있는가?

그보다 소중한 것은 당신의 진심임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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