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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주 Jul 20. 2023

우리는 바다에 산다

다시 만난 과학

  처음으로 학교 밖에서 과학공부를 했다. 학창시절 과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험 준비를 위해 외워야할 것들 투성이었다. 각종 세포의 이름부터 원소 주기율표, 암석 이름들까지. 물리 과목에서 빨간비를 맞고 수학과 데면데면하면서 문과를 선택했다. 점차 과학의 영역은 남일이 되어갔다. 연구자나 과학너드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3년간 많이 괴로웠다. 임용시험을 그만두고 다른 먹고 살 길을 찾고자 했으나 주체적으로 길을 찾아가는 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도, 일상을 운용하는 일도 어려웠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더욱 조급하고 막막해져갔다. 답답한 마음에 공부하는 백수가 되었지만 조급함과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자기 안위만 걱정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습관이 되어 견고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렇게 성실하게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과학공부를 하면서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은 옅어지고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이 올라온다. 과학이 열어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앎과 감동은 선물처럼 마음의 길을 터주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을 필연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허무하거나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천진난만하고 자유롭게, 자기 질문에 적극적으로 몰두하며 살아갔다. 나에게는 이 세계관과 태도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하는 필연성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파도는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동안 필연성을 '모든 일은 예정되어 있고 반드시 그렇게 흘러간다.'는 숙명론으로 이해해왔다. 수업을 들으며 필연성이란 전체로서 그림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온다는 인과의 관계라고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원인을 '나'라는 주체에게 돌리느냐, '나'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같은 거대한 힘에 돌리느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연적인 세상을 믿고 싶지 않았다. 오직 스스로만이 삶을 만들어가는 원인이라고 믿고 싶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힘과 희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더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책하고 조급했지만 삶의 원인을 '운명'에 돌릴 때 느껴지는 억울함이나 무력함보다는 나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현재를 긍정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지였고 나는 전자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이론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주변 상황을 함께 읽어가다보니 절대 그 혼자만으로는 천재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고독한 몰입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연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었더라면,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엘자 없었더라면, 특허국사무소에서 일했던 시간이 없었더라면, 에딩턴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으로 인해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었더라면, 뉴턴의 고전역학이 없었더라면, 기차가 없었더라면,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인쇄기술이 발명되지 않았다거나, 원주민들이 에딩턴의 천문관측 도구를 옮기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혹은 실험으로 증명되지 못해 영영 묻혔을 수도 있다.


  답은 주체 혹은 운명, 둘 중 하나에 있지 않았다. 온전히 '나'로만 이루어지는 원인도, 전체로서 정해진 그림도 없었다. 전혀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 개개인의 욕망과 상황적 조건들이 만나 원인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집중했고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조건으로서 원인을 형성한 것이다.


  요즘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기나긴 방황이 끝나 드디어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문득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다시 학교로 갈거라면 지난 3년이 무슨 의미가 있지?', '다시 원점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허무함과 창피함 말이다. 기존의 내 관점에서 '결과'가 같은 것이 되어버린거다.


  그런데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선생님'이라는 결과는 같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조건도 같은가? 전혀 다른 조건이 만들어낸 마음이다. 3년 전과 지금 선생님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다르다. 그때는 적당한 사회적 지위와 돈벌이, 여유시간, 시험에서 실패하고 싶지 않은 오기 때문이었고, 정규코스를 밟아 온 내가 할 수 있는 상상력이 그만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3년간 방황하면서 느꼈던 어려움과 공부를 통해 길을 찾아가는 기쁨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고, 공부하며 배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마음들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3년간 만났던 시공간의 조건이 전혀 다른 원인을 형성하고 있다. 같은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결과이다!

 



파도는 다시 바다로 간다

  필연성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해하게 되면서 결과에 집착하는 마음도 옅어졌다고 느낀다. 나에게는 항상 결과가 중요했다. 경금의 특성 때문일까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각이 나올 것 같은 결과에만 마음을 써오곤 했다.  친구를 사귈 때도 첫만남부터 마음이 통하는 친구에게만 마음을 줬고 결혼할만한 애인이 아니면 마음 한켠엔 항상 헤어짐을 생각했다. 일도 마찬가지다. 그 일이 내 평생을 바칠만한 것이 아니라면 항상 다른 일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럴수록 허무하고 공허해졌고 '정답'이랄 것을 찾는데 집착했다.


  근샘께서 힘역학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설명해주신 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갈릴레이 갈릴레오,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뉴턱역학까지. 위대한 발견이 그 시대의 사고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며 놀라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때마다 위대했던 사람들이 작아보이기 시작했다. 안타까웠고 실망스럽거나 허망했다. 그 이론이 틀린 것이라고 밝혀질 때 그 사람들의 삶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득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갈릴레오가, 갈릴레오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뉴턴이, 뉴턴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도, 지적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다. 시공간의 한계 속에서 그들이 낸 최선의 결과였다.


  그런데 나는 왜 허무하다고 느꼈을까? 결과가 곧 끝이고 그게 곧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결과가 과정의 의미를 지배하고 있었고 결과가 틀렸다거나 부족하다는고 밝혀지면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창피했고 자존심이 상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삶이 결국 그렇게 결론이 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두려움은 절대적인 정답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만들었다. 절대적이지 않은 것에는 허무함을 느끼고 스스로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방어기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결과'라는 것을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만 두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다시 조건이 되어 한 사람을 넘어 시대를 넘어 연결되고 있다. 결과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조건이 될 뿐이라니!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결과는 생성했다가 소멸해 또 다른 것을 생산하고 있었다. 마치 파도가 쳤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끝이 아닌 운동만이 존재하는 바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과학을 공부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고자 하는 방향 위에서 마음을 다해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알 수 없는 조건들이 모여 원하지 않은 결과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끝이 아닌 또 다른 생성이다. 조건을 만들어가며 쌓이는 근력이야말로 자기 삶의 지도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이지 않을까. 내가 이룬 성취가 나의 삶을 긍정하게 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다해 힘을 쏟는 집중이야말로 삶의 긍지를 느끼는 원천이다. 그동안 공부를 하는 기쁨 속에서도 매일 조급하고 두렵고 불안했다. 공부가 이롭고 즐겁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줘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지금 어떤 조건을 만들고 있는지, 그 위에서 마음을 다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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