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HAN Jan 27. 2022

그럼에도 감당할 수밖에 없어 고독한 사람 또는 사람들

이디스 워튼, 『이선 프롬』,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겨울이 오면,  고요한 적막 어딘가에서 간절하게 외치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파리를 모두 떨군  날선 바람을 견디는 나무들과 추위를 피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이 사는 곳으로 모여드는 길고양이들,   서울역 광장과 수레를 끌고 가는 부르튼 손등들을  때면  모든 광경이 하나의 외침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겨울은 여름의 활기와는  다른 의미에서 강렬하게 () 인식하게 되는 계절인데,  이유는 경계가 모호해지는 생과 ()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을 붙잡고자 하는 절박함 때문이지 않을까.

 『이선 프롬』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 중 하나로, 한국에는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아마 이디스 워튼의 또 다른 대표작 『여름』과의 대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선 프롬』은 그 자체로도 겨울의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부각된 작품이다. 주인공 '이선 프롬'은 그의 일생 자체가 한겨울에 머물러있는 것만 같은 인물이고, 그의 삶은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마치 죽음과 나란히 병렬되어 있는 것 같다.


또한 그의 외로움이 단순히 비극적이리라고 생각되는 개인적인 곤경의 결과가 아니라 그 속에 … 스탁필드의 허다한 겨울 추위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p.18)


 소설은 발전소 일로 근방에 파견된 '나'가 스탁필드에 머무는 동안 우연히 이선 프롬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가문 대대로 스탁필드에서 살아온 프롬네 집안은 유난히도 가난과 질병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운명을 이선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건초를 걷어들이다 말에 받혀 죽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몇해를 앓다가 죽었다. 젊은 시절부터 부모의 병간호를 하느라 말 그대로 '때를 놓친' 이선은 스탁필드를 떠나지 못했고, 어머니의 장례 이후 "혼자 남게 된다는 근거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p.67)혀 사촌누나인 제노비아 피어스(지나 프롬)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건강했던 지나도 결혼 후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만다. 부모의 질병과 생을 감당했던 이선은 그렇게 또다시 누군가의 생을 감당하게 된다.


장례가 끝난 뒤에 지나가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을 보고 이선은 농장에 혼자 남게 된다는 근거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나에게 자기 집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로 가끔 그는 어머니가 겨울이 아니라 봄에만 돌아가셨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 (p.67)


 그런 이선의 인생에 매티 실버는  줄기 빛처럼 등장한다. 지나의 조카인 매티는 오갈  없는 처지였으므로 하인을 고용할 처지가  되는 프롬 부부에게 마침 제격이었는데, 처음의 의도와 달리 이선은 점점 매티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매티에 대한 이선의 열망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지나에게 청혼했을 때와 같이 고독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저이는 스탁필드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난 것 같"(p.10)다는 설명처럼 이선은 이미 자신의 삶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는 무력감에 깊이 잠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선은 매티와 함께 죽음을 각오한 순간 배고픈 말의 울음소리와 불만이 가득한 지나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썰매가 나무에 부딪히기 직전 방향을 틀고 만다.


 "오, 맷. 난 우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어."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밤색 말이 울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말에게 여물을 줘야 할 텐데.' (p.155)


 이후 이선은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는데, 몸에 심한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매티가 그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몫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매티는 충돌 사고로 인해 척추를 다쳐 목 아래로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생과 사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그 사이에 있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 사실 이 소설이 이선 프롬의 비극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바는 꽤나 명확하다.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롬 집안의 무덤에 묻힌 이들의 삶과 이선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이란 단순히 생과 죽음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삶'에 내포되어 있는 또 다른 요소는 아마도 이선이 젊은 시절 포기한 학업, 대도시에서의 생활과 같은 꿈 혹은 이상일 텐데, 다만 이 소설을 읽고 이상이 없는 삶은 아무 가치도 없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건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고, 생이란 게 생각보다 단순히 치부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은 빈번하게 이상과 대립하고 우리를 고뇌에 빠트린다. 따라서 이선의 짙은 고독은 스탁필드를 벗어날 수도 생을 포기할 수도 없다는 절망, 즉 변화의 가능성이 소진된 삶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한 삶이란 말 그대로 버티는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지만 이선에게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이라는 건 때로 그걸 넘어설 정도의 힘과 잠재력을 개인에게 부여하지만, 때로 잔인할 정도로 개인을 무력한 고독 속에 남겨놓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