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워튼, 『여름』,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성숙해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흔히들 사춘기 또는 이십대의 열병을 앓고 나면 한층 성숙해진다고 얘기하지만, 그 회오리치는 내면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사라진 것은 무엇이고, 남은 것은 또 무엇일까.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모두 다르겠지만, 전체 삶을 놓고 봤을 때 그러한 젊음은 찰나인 반면에 그로부터 나아가는 길은 길고 긴 허물을 통과하는 것처럼 지난하고 길기만 하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제목이 지니는 상징성 그대로 '여름'을 통과하는 한 인물을 통해 삶이란 역설적이게도 생명력을 분출시키는 것이 아닌 점차 꺼트려가는, 그리고 그것을 감내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채리티는 지루한 나날이 이어지는 노스도머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다. 가상의 지명인 노스도머는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산'과 활기가 넘치는 도시 '네틀턴' 사이에 위치해있는 시골 마을이다. 채리티는 다섯 살 때 변호사인 로열 씨가 '산'에서 데려온 이후로 쭉 노스도머에서 생활했다. 어렸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노스도머에서 살게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채리티는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 즉 '산'의 존재를 잘 의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노스도머에서의 생활이 지겨울 수밖에 없다. 채리티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노스도머의 생활에 루시어스 하니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니는 뉴욕에서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18세기 저택 연구를 하기 위해 잠시 노스도머에 오게 된 건축가인데, 채리티가 사서로 있는 도서관 문제로 얽히게 되어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채리티는 하니와의 사랑을 통해 노스도머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상상하게 되고, 자신을 이곳에 묶어두는 기제로 작용했던 '산'의 존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를 얻는다.
사랑이 핏속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데 어디에서 태어났건, 누구의 자식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p.74)
그러나 하니에게 채리티와의 사랑은 여행 중 만나게 된 짧은 유희였을 뿐이고, 결국 계급과 경제적 수준이 맞는 애너벨 볼치와 결혼한다.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실연을 당한 채리티는 상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태어난 '산'으로 향하는데,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곳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주고 보듬어 줄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 채리티가 도착했을 때 그녀의 친모인 메리 하이엇이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산'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란 채리티의 눈에 노스도머의 삶과 결코 비교할 수조차 없이 비참해보인다. 차마 그곳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채리티는 다시 '산'을 떠나고, 내려가는 길에서 그녀를 데리러가던 로열 씨를 만난다. 모든 상황에 지쳐버린 채리티는 결국 로열 씨와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하니와의 이별 이후 '산'에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과정은 채리티가 한차례 내면의 폭풍을 겪은 이후 발생한 여정이라는 점에서 채리티의 앞으로의 삶의 방향과 정체성을 결정짓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된 여정에서 채리티는 누구보다 자신의 감정에, 열정에 솔직하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산'과 '도시'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기보다 노스도머의 삶에 만족하기로 스스로 체념했다. 그런 채리티의 상태를 반영하듯 로열 씨의 마차를 타고 노스도머로 돌아오는 길의 풍경은 어느새 여름이 다 지나고 쓸쓸해진 시골 풍경으로 바뀌어있다.
아마도 이후 노스도머에서 채리티는 지난 날의 활기를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평온한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때로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떠올리듯 하니와의 짧았던 한때를 떠올리며 집안에 흐르는 정적의 일부처럼 앉아있을 것이다. 아무리 멀어져도 다시 돌아가버리고 마는 그 순간으로부터 끊임없이 되돌아나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