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HAN Mar 26. 2022

그 순간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가 끝나버렸다

최재원,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민음사, 2021

 7년이라는  세월을 땅속에서 보내다가 성충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매미는  세상이 마치 자신을 위한 무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운다. 매미는 내리쬐는 태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강렬한 소리로 여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같다. 그렇게 2 간의 짧고 강렬한 삶을 살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매미의 생은 아름답다. 7년간의 오랜 기다림과 2주간의 짧은 삶의 대비를 삶에 있어  절대적 요소인 시간에 대한 극복이라고 부를  있다면 말이다. 땅속에서의 7년에 대한 보상도, 2주간의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도 없이, 시작과 , 탄생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는 매미의 생은  순간 비로소 완전하다.

 최재원의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에는 시간, 유한성, 아름다움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독특한 탐구가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발현되는 시들이 많이 수록 되어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개념에 대한 사유를 가장  드러내주는 시어는 '매미'인데, 2주라는 짧은 성충의 삶을 살기 위해 7년이라는  변태 과정을 거치는 매미의 한살이는 역설적이게도 삶의 유한성과 대비된다. 모든 생을 찰나의 순간에 바칠  있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영원의 삶이 아닐까. 매미는 한순간을 살았지만 영원을  것이 된다.


고장 난 매미가 첫 번째 나무에 달려 있다
두 번째 나무의 고장 난 매미가 조용하다

(중략)

고장 난 매미들을 모으며
고장 난 매미들을 고쳐 달라고
아무도 매미를 고쳐 쓸 생각을 않고
떠나간다 내년으로

-  「고장」, p.18


 그런 매미의 삶이 슬퍼지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을 인식했을 때이다. 7년과 2주의 간극을, 시간의 불합리함을, 삶이 지닌 유한성을 인식했을 때 매미는 슬퍼진다. 모든 것을 삭게 하는 시간 속에 매미의 생이 놓인다. 그래서 마치 인간이 매미의 생을 규정하는 것처럼 매미도 자신의 생을 규정한다. 2주 간의 짧은 삶을 마치고 다시 흙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슬픈 생으로. 그래서 매미는 "조용하다". 시인의 표현대 로라면 "고장 난 매미"가 된다. 하지만 멈추는 법이 없는 시간 속에서 고장 난 매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시인만이 "아 그 소리가 모조리 뜨거운 점토로 짜부라지고 나면 남은 올해를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올 해」, p.21) 하고 걱정할 뿐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조건이란 오로지 순간 속에 존재한다. 지속되지 않는 형태의 것, 일시적인 것,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끊임없이 끝을 지연시키고 싶은 것이다. 한 해의 한 철, 한 철 중에서도 단 2주만을 사는 매미처럼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영원해지는 성질의 것이다.


너만은 시간의 흐름에서 구해 주고 싶다. 그것은 박제와 가깝지만 박제는 아니다.

(중략)

그러니까 그는 의미를 밟고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걷는 곳마다 의미가 피어나는 사람인 것이다. 아. 어떻게 그를 가지고 싶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어디엔가 있다. 사정은 끝까지 피하고 싶다.

-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p.57


 그래서 시인은 "사정은 끝까지 피하고 싶다"고 말한다.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 속 에 놓이게 되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현실감이 닥쳐온다. 아름다움이 사라진 현실 에서 시인은 "자꾸 역겨워"질 뿐이다.


그리고 왜 지금에서야 나는 이렇게 추상적이어야만 하는 아름다움을 눈앞에서 만나는가. 이 버스에서!

- 「종로 3가에서의 죽음」, p.77


 장소와 장소를 잇는 대중교통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통로, 옮겨가기 위해 잠시 멈춰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아무도 태어나지 않는 새벽"(「올 해」, p.22)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 순간만이 존재하는 / 가장 배타 적이며 완전하게 포괄적이고 / 규칙적인 / 망각"(「이런 게 0이다」, p.46-47)이 가능한 시간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버스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왜 지금에서야 나는 이렇게 추상적이어야만 하는 아름다움을 눈앞에서 만나"느냐고 애석해하고 있지만, 사실 그 아름다움이란 버스 안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은 인간의 삶이 지니는 유한성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 시간의 절대성을 깨달은 매미처럼 인간은 매 순간 슬퍼진다. 인간의 생이 삶과 죽음이라는 순환 속에 놓여있다는 것, 삶의 유한성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바로 신체다. 신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시인이 말하는 "이사에서 이동이 제거된, 짐을 싸고 풀고 싸고 다시 푸는 것의 반복"(「말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p.183)인 삶이란 신체/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변화의 가능성이 소거된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집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전환/이탈의 상상력은 그러한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이사는 '이사'가 아니라 짐을 싸고 푸는 거라고, 나의 삶은 이사에서 이동이 제거된, 짐을 싸고 풀고 싸고 다시 푸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 「말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p.183


아무것도 자랄 수 없던 내 몸에
그래도 곰팡이는 피는구나

(중략)

하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다
한 조각씩 잘라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 뒀다가
토스터기에 돌리면 어차피 살균도 되고 곰팡이도 죽지 않을까

- 「배양」, p.91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아름다움과 신체 너머를 상상하게끔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게끔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소진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손바닥에서 / 나사못이 / 쏟아"(「흰자만 자꾸 나온 다」, p.138)지게 만들고, 무의미한 반복 속에 놓이게 하는 걸까. 말 그대로 그건 인간의 상상력―우리는 늘 반대급부를 상상하기 마련이니까―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가 한순간 경험했던 영원에 대한 기억, 혹은 완성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버린 영원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수도 있다. 무한의 반복일 뿐인 이러한 기억을 ‘나’라는 존재를 최초로 느낀 순간이라고, 즉 근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근원적 경험은 있고,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기억은 교묘하게 희석되고 변질된다. 그래서 최초의 순간은 닿을 수 없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 갈망의 대상이 된다.

아름다움 혹은 근원에 대한 최초의 경험, 그로부터 끊임없이 지연되고 멀어지는 것. 그것이 곧 삶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나의 어린 그대여
아직 오지 않은
널 뭐라고 부를까

너는 놀이터에 떨어진 케이크
너는 찢어진 편지
너는 나의 찢어진 입술
너는 나의 찢어진 기집애
나는 매일 여기로 돌아와

- 「그대여」, p.206


작가의 이전글 찰나의 여름, 돌아가는 긴 여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