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HAN Jun 29. 2022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노지양 옮김, 글항아리, 2021

  『사나운 애착』은 엄마와 딸의 깊고 질긴 애증을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써내려간 에세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비비언 고닉은 40대 후반이 된 지금, 자신이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쓴다.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는 일이란 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 이해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여기 이 부엌에서 …(중략)…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p.26)


 고닉은 21살 때까지 유대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브롱크스 다세대 주택에서 살았는데, 고닉이 말하는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란 곧 이곳 여자들의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곳 여자들은 결혼과 체면이 중요한 유대인 사회의 여자들이며, 이상적인 여성상을 추구하지만 누구도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하층민의 지리멸렬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체념과 자기 연민이 뒤섞인 일종의 냉소가 깔려있다. 고닉은 이곳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들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과 태도를 피부로 실감하고 체화했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거나 누군가의 감정에 깊게 연루된다고 할 때 그 조건 중 하나는 성별일 것이다. 외모, 물리적 요건, 사회적 지위 등 성별(sex)이 함의하는 여러 요소로 인해 대체로 이성보다 동성에게 동질감을 느끼기 쉽다. 동질감을 느낀다는 건 상대방에게 발생한 사건이 나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딸이 엄마의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고닉의 엄마는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과 결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신념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하는 고집과 성격을 지녔다. 엄마의 폐쇄성, 단순함, 수동성은 그녀의 삶을 우울과 불안으로 점철되게 하고, 외로움에 굴복하게 만든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 주변까지도.


엄마는 당신의 악착스러운 불행이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하이고 판단이라는 사실을 읽지 못한다. 마치 한탄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 너로는 부족해. …(중략)…" (p.195)


 그러나 고닉은 이웃주민들, 브롱크스의 여자들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엄마로부터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삶의 기질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그런 모습들을 통해 모두 엄마와 같은 태도로 어떤 사건(남편의 죽음, 결혼관계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장장 30년이라는 질긴 애증을 낳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고닉이 스스로 꼽는 엄마와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두 가지 사건은 네티-엄마 사이의 불화, 그리고 시티칼리지 입학이다. 네티와 엄마가 회복할 수 없는 관계로 치닫는 걸보면서 고닉은 결혼이라는 제도와 성적 욕구가 반드시 병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게 남자로부터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재한다는 사실도.


나와 네티 사이에는 어떤 장벽도 어떤 방해물도 없었다. 나는 네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실재였다. 이 남자는 아니었다. (p.240)


 시티칼리지에 입학한 이후로는 이론적 각성이 뒤따르면서 고닉은 엄마뿐만 아니라 브롱크스 여자들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삶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고닉과 엄마의 갈등이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엄마는 딸이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엄마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고닉은 일종의 배신감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한다.


엄마의 반응에 나는 움찔했다. 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딸이 뭔가 이해 안 되는 말을 하면 뿌듯해해야 하는 거 아닌가? (p.167)


 엄마가 위와 같은 태도만 보인 것은 아니다. 남편이 죽은 이후 고닉을 대학에 보내 공부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엄마였다. 자신과 달리 딸은 경제적, 사회적 의미에서 당당한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누군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이라니.

 고닉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고집과 성격이 있기 때문에 엄마에게 지지 않는다. 왜 그들이 서로 떨어져살지 않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들의 갈등 상황은 극적이다. 고닉과 엄마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과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데,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기와 곤두선 신경의 지겨운 반복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점점 그 존재 자체로 드러난다. 고닉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 고닉 그 자체가 된다.

 애착은 어떻게 보면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에세이를 읽는 내내 고닉이 엄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물리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의 영향관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왜 평생토록 애를 써야만 하는지, 그 과정이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엄마는 딸에게 결국 벗어나고 싶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는데, 애착의 속성이 그런 것이라면, 엄마와 딸이 애증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필연적 귀결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고닉은 엄마에게 삶이란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제각각이고, 극복 가능한 것임을 증명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딸이 평생 외로운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걱정되고, 또한 딸에게 일종의 위안을 바랐을 것이다. (그 위안이 엄마에게는 자신의 삶과 존재를 인정받는 방식일 것이다.)

 엄마와 딸에 관한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이 에세이는 엄마를 이해하는 일과 엄마와 불화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걸, 궁극적으로는 불화를 통해 진정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엄마와 딸이 아닌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p.301)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그 순간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가 끝나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