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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HAN Sep 10. 2022

벨 에포크, 아름다움의 미망으로부터

- 앨런 홀링허스트, 『수영장 도서관』, 전승희 옮김, 창비, 2021

 영국 상류계층인 (윌리엄 벡위스) 특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교양있는 취미생활을 영위하면서 지낸다. 화려한 집과 그레이트 러셀 스트리트에 위치한 코린시언 클럽(일명 '코리') 윌의 생활반경의 거의 전부다. 과거에는 명성있는 사교의 장이었을 코리는 이제 인테리어나 장식물 등이 화려함이 아닌 촌스러움으로 인식된다. 고객은  부류로 뉘는데, 젊었을 때의 습관이 남아 계속해서 이곳을 찾는 늙은 남자들, 단순히 운동이 목적인 회원들, 그리고 체력단련실이나 샤워장에서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은밀하게 교환되는 섹슈얼리티를 목적으로 드나드는 손님들이다. 점차 시대의 유산처럼 되어가는 이곳에서 윌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안락함과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외부 세계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생명과 목적의식과 성으로 가득한 우울하면서도 실용적인 지하세계"(p.24)이기 때문이다.

 『수영장 도서관』은 윌이 우연한 계기로 찰스 낸트위치의 자서전 집필을 맡게 되면서 자신과 세계의 연관성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철없는 동성애자-상류층-영국남성이 그동안은 주의깊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을 지칭하는 사회적 수식어들의 의미를 각성해가는 과정이라고   있다. 아름다움은  단계 떨어진 상태에서 느낄  있는, 어느 정도의 거리로부터 비롯되는 환상이다. 윌에게 지금까지의 삶은 일종의 오페라 같은 , 지루하지만 아름다운 어떤 것이었다면 일련의 사건을 겪은 이후의 삶에는 아름다움은 다소 희석되었지만  대신 책임감이라는, 사회에 소속된 자가 지녀야  감각이 자리하게 된다.

 찰스 낸트위치와 윌은 상류계층에 속해있고 게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자서전 집필을 맡으면서 찰스의 일기를 통해 윌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에게 상당한 애정을 갖게 된다. 반 세기라는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학시절과 수단에서의 관료 생활에서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서도 찾을 수 없는 낭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낭만도 거리에서 오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찰스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의 기이한 행적이 드러나는데, 감옥에서 출소한지 얼마되지 않은 이들을 하인으로 들인다던가, 낸트위치컵을 만들어 자선사업을 하는 한편 위선적인 사진가 로널드 스테인스와 가깝게 지내며 벨보이들, 어린 흑인 청년들을 데리고 포르노를 찍는다던가 하는 일들은 찰스라는 인물을 쉬이 이해할 수 없게끔 만든다.

 찰스가 1950년대에 함정수사로 수감된  있다는 사실,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과도한 탄압이 경찰총장이던 자신의 조부 데니스 백위스 경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이후 찰스의 삶은 더이상 윌에게 낭만적일 수만은 없게 된다. 찰스가 윌을 만난  우연이었지만 윌의 존재를 알게  이후 자서전 집필을 의뢰한 것은 철저히 의도된 일인데, 그런 의도의 저변에는 우선 일종의 복수심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찰스가  철없는 귀족 청년에게 보내는 애정으로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윌이   없었고, 알더라도 외면하고자 했던 ,  윌이 영위해온 안정적인 생활은 무자비한 탄압의 역사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윌이 직시하게끔 하려는 의도가 더욱 컸다고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은 자신의 의미가 과거에만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이야, 딱한 녀석." ―p.408

"… 사실들이란, 윌리엄, 무無나 마찬가지야." ―p.411


 과거의 사실들이란 '무無' 마찬가지라는 찰스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이미 지난 일이기 때문에 소용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과거의 사실들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 지니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변화시킬  있는 상상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한번도 소외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윌은 조부의 과거 행적에 의해 자신의 존재―현재까지의 삶과 정체성까지 모든  통틀어서―가 부정당함으로써 상당한 죄책감과 더불어 무력감을 느낀다. 또한  연인 아서를 찾으러  스트랫퍼드 이스트에서 스킨헤드족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무력감을 경험하는데, 불운한 아서의 삶에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윌의 낭만적이고 유치한 희망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도 그저 "망할 호모 새끼"(p.299) 불과하다는 무자비한 현실이 윌을 덮친다.

 그간의 미망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정립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임은 당연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윌은 올바른 방향성을 잡은 듯 싶다. 다소 가혹하긴 했지만 찰스의 삶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통해 지난 세대와 현재가 동떨어진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 제임스가 찰스가 구속된 사건과 비슷한 방식으로 억울하게 체포되자 윌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 없었던 책임감을 느낀다.


"… 그러니까 그건 사실 다른 세상 일이 아니에요, 개빈, 지금도 런던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이잖아요." ―p.452

만일 필요하다면, 제임스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내가 콜린과 한 일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해야겠다고, 그럼으로써 비록 멀고 상징적인 행위라 해도 찰스를 위해서, 그리고 B경의 다른 희생자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극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떤 시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p.478


 여전히 윌은 코리에 간다. 아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는 한때 자신이 비웃었던 "흉근이 늘어져버린 나이 든 사내"(p.24)가 되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코리가 제공해주던 안락함과 세계로부터의 단절감은 이제 없어졌겠지만 그럼에도 그곳이 환기하는 "나의 시절, 아름다운 시절(Belle Époque)"(p.13)을 가끔씩 음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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