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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남주 Aug 09. 2021

운동선수 뒷바라지하기

    

올림픽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많은 시간이다. 스포츠는 이기고 지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물결이다는 명언이 나온 에피소드로해서 힘이 나는 시간이었다.

중학교부터 운동선수로 활동하게 된 딸래미의 일상에 응원하는 부모로써 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시간을 돌이켜 본다. 운동선수로 어떻게 키울 수 있었는지 돌아보니 새로운 마음이 든다.      

 

일단은 전학시키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처음 축구선수가 되는 과정에서 엄마의 뒷바라지는 여자축구팀이 있는 학교부터 찾아야했다.  뙤약볕에서 땀 흘리고 하는 운동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을 때였다. ‘꼭 한 번만 하게 해 달라’고 매달리는 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축구연맹’을 검색해서 전화번호를 내밀면서 통화를 부탁하는 딸래미의 적극성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통화를 하는 몫은 어른이 해 주는 것이라 생각해 일단 호응해 주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을 키우는 엄마인데요~ 

아이가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      

연맹에서는 사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왔고 수도권이 넓은 관계로 우리가 사는 근처에는 없으니 서울 송파에 있는 ‘ㅇㅇ중학교’로 안내를 해 주었다. 감독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연락해 약속을 하고 만나보면 된다고 했다. 절차를 밟아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다. 보통 한 학년에 선수가 5~6명이 고작이었는데 딸래미의 학년에는 13명이나 뛰고 있었다. 게임에 들어가는 11명을 넘긴 숫자이니 감독님이 굳이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달리기와 체력 테스트를 하면서 썩 잘하지도, 그렇다고 영 못하지도 않다는 평가를 내렸다. 지금이야 잘 알고 있지만 그 때는 감독님은 보통 지도자들과는 다른 면이 많은 사람인 것을 알지 못했다. 여느 감독님처럼 운동선수로만 보는 감독이었다면 딸래미는 선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축구를 ‘재밌는 놀이’로 할 수 있도록 키우는 분이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소리치고 야단치면서 억압된 분위기에서 실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축구를 통해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 주는 분이었다.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다. 집에서 왕복 거리가 있지만 일단 훈련하러 다녀보라고 허락은 했다. 다른 팀이었으면 쉽게 받아줄 수 있었지만 선수가 많은 관계로 얼마나 적응하는지를 지켜보겠다는 마음이었기에 선뜻 승낙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스승을 잘 만난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다. 우리도 살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듯이 좋아하는 축구를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받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 큰 역할을 한다. 훈련하러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딸래미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시간이 2~3시간이 소요됨에도 열심히 다녔다. 그렇게 한 달쯤 되니 ‘선수들이 합숙 훈련하면서 지내는 기숙사는 언제 들어갈 수 있느냐’고 조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표현을 직접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은 나이였기에 감독님께 엄마가 전화라도 한 번 해달라는 응석이었다. 딸래미는 지금도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에 뭔가 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면 엄마의 빽을 활용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감독님께 전화 드렸더니 선수로 받아주겠다는  승낙을 했다. 성실하게 훈련하러 오는 걸 보니 ‘뭘 맡겨도 자신의 몫은 해 낼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겨서  허락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어렵게 승낙을 받고 전학수속을 밟게 되었다. 왠 전학? 그 때는 학교 선수입단을 하려면 그 학교에 다녀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물론 주소도 옮겨야 하는 건 기본이었다. 감독님이 동사무소도 동행 해 주면서 자상하게 도와 준 덕분에 무사히 전학을 시키고 선수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일 년에 시즌이 예닐 곱개가 열리는 데 부모들이 응원하러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운동선수로 키울 생각이 별로 없었던 터라 그냥 공부하는 아이들처럼 뒤에서 조용히 케어 해주면 되는 줄 알았었다. 원래 나서서 하는 걸 싫어하는 나의 성향도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숙사비 잘 내고 가끔 간식당번일 때 잘 챙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일이 많았다. 특히 겨울에는 김장을 할 때 아이들 먹일 요량으로 김치 한통씩을 보내야 하는 것도 있었다. 기숙사 어머니께서 요즘 같이 바쁜 시절에 김치를 담그는 가정이 잘 없어서 공산품 김치를 많이 가져오는데 우리 집은 직접 담은 김치를 보내 주니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정도였다. ㅎㅎㅎㅎㅎ 중학교 때는 김치 한 통으로 했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아예 부모들이 모여서 김장을 함께 해서 땅 속에 묻어 저장하는 일까지 했다. 솔직히 처음 선수를 시키니 어떻게 뒷바라지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응원하러 다니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엉겁결에 3학년이 되고 첫 경기를 뛰고 ‘두통 울렁증’을 겪은 후에야 엄마가 옆에 있으면 아이에게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사정이 안 되어서 못 오는 경우도 많지만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던 나는 그 때부터 경기가 열리는 전국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모두가 내 아이로 키우는 일이었다. 운동의 특성상 승패에 매몰되어서 보기 쉽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는 많은 사랑이 흐른다. 11명의 주전 선수뿐만이 아니라 벤치를 지키고 있는 모든 선수가 내 아이로 볼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한다. 부모님이 응원을 오던 안 오던 함께 우리의 아이로 키우는 것이 어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랑법이다. 응원만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먹거리에서부터 차량 지원도 간간이 해 주면서 밀착 케어를 통해 아이들의 몸과 마음도 어루만질 수 있는 역할도 하는 것이었다.  함께 즐겁게 뛰는 운동장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자란 아이들이 더 많아질수록 스포츠계의 발전이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내 아이의 뒷바라지가 아닌 모두의 뒷바라지를 했던 시간이었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자립하고 있으니 뒤에서 도울 일이 별로 없다. 얼마 전에 한 때 같은 팀이었던 선배 언니네 팀과 결전의 시간이 왔을 때 이기고 지는 경기가 아닌 서로 응원하면서 각자의 포지션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결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2016년 리우올림픽 여자 육상 5천미터 경기에서 바닥에 쓰러진 선수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끝까지 달렸던 최고의 장면이 연출 되었던 것처럼 스포츠의 본질은 승리보다 함께 하는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대견해 보였다.  이번 2020년 도쿄올림픽은 코로나로 해서 일 년이 미뤄진 지금에 열렸지만 그 감동은 남다른 시간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여자배구를 보면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딸래미를 운동선수로 키우는 과정이 그대로 녹아든 느낌이어서 함께 힘을 내본다. 멋진 스포츠 선수들의 탄생에는 뒤에서 바라지 해주는 많은 분들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각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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