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하백 Jun 02. 2021

전지적 연출 시점

연극이 끝난 후

0.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 극회 토굴 65회 정기공연 ‘다른 손 : 너와 나의 이야기’ 공연을 마치고.

백진하. 단막극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냐>(이하 ‘<나쁜 뜻>’) 연출, 그리고 <세계의 끝과 그곳을 떠나는 자들>(이하 ‘<세계 끝>’) 조연출.


1.


‘그 말을 그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나쁜 뜻> 팀 연출을 맡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이렇게 덧붙였지. 연출의 이름 칸에 아무것도 없는 스프레드시트를 보다가 결국 ‘제가 연출할게요’라고 말하게 됐던 그때가 난 아직도 생각 나. 캐스트 한 명만 채워져 있었던 시트가 어떻게 한 명 한 명씩 이름이 채워져 한 팀이 됐는지도. 우리 팀원들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을 함으로써 우리 팀 연출이 된 이후로, 극을 준비하면서 한 학기 동안 나는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을 정말 많이 했지. 더 열심히 연습하자. 따로 줌으로 만나서 리딩 더 하자. 스태프들 회의 한 번 더 하자. 공연 전에 스태프 별로 개인 미팅 하자. 친구들한테는 오늘도 토굴 회의가 있다고 하면서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투덜댔지만 사실 한 번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어. 내가 연출을 했던 것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라는 걸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 한 학기 동안 연출을 맡아서 열심히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이걸 안 했다면 내 한 학기는 어땠을지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정말 고마웠고, 잊지 못할 거야.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니 스태프랑 캐스트들이 과도한 열정을 가진 나 때문에 힘들었을 것 같아. 혹시 내가 팀원들에게 너무 노력을 강요하고 부담을 주었다면 이 글을 빌려서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어.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나쁜 건 나쁜 거니까. 난 나랑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그 사람들이 나랑 일하는 게 즐거웠으면 좋겠는데…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여러 번,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해봤지만 참 어려운 일이야.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좋은 리더, 좋은 팀원이 될 수 있도록 어디서든 노력해볼게. 그리고 다시 토굴이든 어디든 함께 일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는 더 좋은 동료로 함께 하겠어.


다시 한번 우리 팀원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하나하나 자신들의 자리에서 우리 팀을 빛내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2.


그리고 또 다른 우리 팀, <세계끝> 팀에게.


나 사실 <세계끝> 조연출만 하려고 했던 거 알지…? 정말 <세계끝> 극 좋아하고 함께 잘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나쁜 뜻> 연출하게 되면서 신경을 많이 못 써준 것 같아서 팀원들 모두한테 미안해요. 너희는 괜찮다고,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난 아직도 너희에게 더 많이 의견을 주고 힘을 모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워. 그래도 끝에는 멋진 극을 함께 올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2주 전에 다 뒤집어엎었는데도 힘든 기색 없이 연출을 따라와 준 팀원들도 다들 수고했어. 부족하고 못난 조연출이었지만, 다음 기회에 만나면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알아갈 수 있겠지. 이번에 풀지 못한 아쉬움은 그때가 오면 풀어버리도록 할게. 다시 한번 정말 고맙고 미안해.


3.


마지막으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난 사람보다 사람이 만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영화도 좋아하고 뮤지컬과 연극도 좋아했다. 나는 내 눈에 이야기가 보일 때 느껴지는 감정이 마음속에 깊게 각인되는 사람이라서, 아직도 어릴 적에 본 영화를 봤을 때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끼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야기에 쉽게 매료되고, 빠져나오기가 참 어렵기도 하지.


초등학생 때 영화감독을 꿈꿨다가 <인셉션>을 보고 포기했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사실 그 꿈은 너무 막연한 꿈이었어서 그렇게 타격이 크진 않았어. 오히려 대학 와서 다시 한번 영화계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영화를 잘 아는 사람도 아닌 것 같다고 느끼면서 그 꿈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정말 착잡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지. 난 뭐든지 쉽게 질리는 사람이니까, 영화를 직업으로 삼았다가 영화가 질려서 싫어지면 큰일 날 거라고. 그니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직업이 아니라 영원히 취미로 남기는 게 더 좋은 선택일 거라고. 모두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으니까.


나도 사실 잘 알아. 책이랑 영화, 뮤지컬이나 연극, 심지어 전시까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내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그리고 영화랑 연극을 만들 때,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보다 더 재미있고 보람차다는 것도. 3년 전에 영화를 찍어야 해서 주말 과외를 뺐을 때, 두 시간 과외를 하면서 벌 수 있었던 돈을 포기하면서도 20시간 동안 영화를 찍는 현장에 있었을 때 더 행복했으니까. 이번에 연극을 준비하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많이 느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느끼기도 했어.


하루는 연습이 끝나고 기숙사 통금이 임박한 시간에 캠퍼스타운을 지나 학교로 걸어가는데 ‘사실 나도 이런 걸 만드는 일을 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영화 쪽 진로를 꿈꿔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분야 대학원을 간 언니나 그쪽 진로를 계속 꿈꾸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럽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난 재능도 없고 용기도 없으니까, 아마 예정된 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서 연구를 하지 않을까? 하루를 마치고 이불속에서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그런 대학원생이 되겠지.


그래도 영화를 만들 때, 이번처럼 연극을 만들 때 내가 빛났던 그런 기억들이 앞으로도 살면서 정말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비록 내가 두 번째, 세 번째로 빛을 내는 일을 하더라도 말이지. 그 시간과 기억들을 함께 해주고 지켜봐 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워.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기억과 추억이 되었기를 바라.



작가의 이전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