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으로 기대했었냐고 묻는다면,
최근에 읽은 소설에서는 상대방과 자신 사이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착각하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 착각을 씨앗으로 원대한 계획을 펼치던 그는 결국 보기 좋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으며 소설이 끝났다. 뒤통수를 맞은 그 인물을 보며 통쾌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런 느낌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많이 느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는 이 사람과 나 사이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흐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 생각은 항상 착각이었고, 그 착각에 좌절하는 것이 내가 한심한 주인공으로 나오는 몇십 개의 스토리의 결말이었다.
그래서인가 어느 순간부터는 남들과 나 사이의 특별한 무언가는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것은 모두 우연일 뿐이다. 사소하고 작은 우연들이 모여 내 구글 캘린더와 카카오톡과 메일함을 채우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이 믿음은, 내가 과거에 자주 했던 착각보다는 꽤나 시니컬하고 멋진 것 같다. 하하.
사람들에게서 기대를 버린다는 것이 남들에게는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라고 생각하면 뒤이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인터넷에서 만난 한 언니였는데, 그 언니는 지금의 나보다도 그때 더 나이가 많았다. 나와 8살이 차이 나는 언니였으니까. 그 언니는 가끔가다 저런 말을 했었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나쁜 짓을 하든 별 감흥이 없다. 왜냐하면 난 원래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까.' 기대가 없다는 말은 어린 나의 입장에서 훨씬 더 나이와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때도 그 언니와 나 사이에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언니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나에게도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거야? 왜?' 그리고 난 그 언니와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지만 그 언니는 그런 기대조차 없다는 사실이 날 속상하게 했다. 서로가 가진 기대의 차이가 컸던 것 때문인지 우리의 친구 관계는 결국 좋지 않게 끝났다.
그런 사람을 만났던 경험 때문인지, 나는 내가 가진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는 걸 느낄 때면 슬퍼진다. 나도 결국 '난 사람한테 전혀 기대하는 바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내가 몸소 증명하는 것 같아서 더 그렇다. 사람을 믿는 것보다 의심하는 것이 더 당연한, 받는 것보다 뺏기지 않는 것에 더 감사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겪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이 확실시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그 언니보다도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난 아직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다고 말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의 특별하고 남다른 기류를 더 이상 바라지 않지만, 결국 우리가 만난 것에는 운명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그냥 모두 다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구를 만나게 될지 전혀 기대하지 않다가도 그 우연이 시작될 때쯤에는 다시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연히 만난 상대에게 나의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털어놓고, 함께 밥을 먹자고 하고, 술을 마시게 된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썼는지 돌이켜보면 아직 난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기대는 언제쯤 무너질까. 나도 결국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고 '난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일까. 일단은 우연이 만든 내 주위의 멋진 이야기들을 계속 회상하면서 나에게 찾아올 다른 우연들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싶다. 내가 사람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게 해 준,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기대가 모두 소진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사실은 작은 기대를 남겨놓고 있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