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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랑아리랑 Nov 26. 2023

글쓰기로 닮아가는 모녀의 서사

75세 늦깎이 회장님의 반란

75세 늦깎이 회장님은 성인문해학교 학생


번듯한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보다 침대에 올린 작은 교자상 위로 공책을 펴고 앉는다. 흑심이 불러질세라 연필을 만두 빚듯 고이 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써 내려간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가 보드라운 하얀 공책 위에서 유난히 주름이 깊어진다. 침침한 눈을 비벼대며 매일 일기를 쓰시는 어머니는 밤마다 감수성 여린 소녀가 되신다. 문구점에서 산 국어 10칸 공책과 받아쓰기 공책 그리고 일기장. 침대 모서리에 차곡차곡 쌓아놓다 온 가족이 모이는 날 되면 누가 볼세라 제일 먼저 장롱 속으로 넣으신다.




평생 동안 시간을 당겨 쓰신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종잣돈 만들어 땅을 일구시는 동안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귀했다 말씀하셨다. 외할머니께서 어머니를 낳자마자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른 채 커야 했고 하루 세끼 식사도 어렵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 글을 배우지 못한 한스러움과 불편함 뿐이었겠는가. 지난 모진세월을 감히 헤아릴 순 없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매분 매초 헛되이 보내지 않으셨다. 여명이 맺힌 이슬을 밟고 부엌으로 나가 삼 남매 먹일 하얀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흙내음 따라 고이고이 농작물을 살피신다. 흐린 날 빛나는 여우별처럼 반짝 힘을 주고 부지런히 고단한 아침을 깨운다.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일상의 굴레에서 글을 배우지 못한 과거를 되돌아볼 여력도 없이 오로지 집안을 일으켜 자식들 뒷바라지할 생각만 하셨다.





어릴 적 저녁밥상을 치우고 나면 이따금씩 장부와 계산기를 나에게 쓱 들이미셨다. 농작물을 수확하고 판매한 수익금, 인부들 이름과 연락처 인건비 목록들 그 외 여럿 회계장부와 통장까지 정리를 부탁하셨다. 사업 수단이 탁월하신 어머니셨지만 글과 숫자를 기록하는 일은 늘 어려워하셨다. 하나 신기하게도 이미 어머니 머릿속에는 계산이 얼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바쁜 농사철에도 잘 나가시던 계모임을 그만둔다 하시길래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근 20여 년 계모임 총무를 회원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다 하고 두서너 번 한 사람도 있는데 본인만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등 떠밀려할 상황에 암 말 못 하고 돌아왔다고 하신다. 허리 한번 펼 시간 없이 일만 하시다 곱게 화장하시고 외출복 입고 나가시는 어머니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는데 다른 이유도 아닌 총무 장부가 문제였다. 어머니께 내가 도와드릴 테니 어렵게 생각 마시고 해 보시라고 권유드렸다. 가난한 아버지와 어린 나이에 결혼하셔서 삼 남매 공부할 만큼 시키고 땅 사서 집 짓고 동네 대소사를 맡으시며 누구 부럽지 않다 말씀하시는 어머니께서 글자는 읽으셔도 낫 놓고 기억자를 쓰기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려온다.



칠순, 성인문해학교에서 한글 공부 시작

필력 없이 어머니의 서사를 감히 써 내려갈 수 있을까 자신 없었다. 하나 2023년 11월 하고 싶은 건 때가 없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서사 위엔 어머니의 서사가 기록되어야 한다. 어느 날, 어머니는 칠순을 맞아 본인 의지로 성인문해학교를 찾으셨다. 일주일 세 번 있는 수업시간을 위해 시간을 당겨할 일을 서두르신다. 할 일을 미뤄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는 없었다. 어머니의 시계는 일 하실 땐 빠르게 흐르고 공부할 때는 느리게 흐르는 신비한 묘술을 지녔다. 호미 잡은 경력 50여 년도 지났건만 연필 잡은 모습은 영락없는 초등학교 1학년 입학생처럼 긴장감과 설렘이 가득하다.


써 내려가는 글자마다 싹을 틔우는 여린 잎처럼 발아된 씨앗이 얼마나 무성히 자태를 돋보이게 될지 기대된다. 마른논에 물 들어가듯 삐뚤빼뚤 글자가 국어 10칸 공책 한 권 채워진다. 눈물자국이 선명한 일기장엔 세 살에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씻은 재회, 얼음장처럼 차가운 새엄마에 대한 한풀이, 모진세월 이겨낸 삶의 역경과 지혜, 글로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한 자식들에게 쓰는 사랑까지 뜨겁게 묵직해지는 가슴은 존경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글쓰기로 닮아가는 모녀의 서사

11월 초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이 온다.

“여름에 학교에서 시를 한편 써서 냈는데 선생님께서 다음 주 큰 상을 받으러 도청에 가야 한다고 하시네. 네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작년 시에서 주최하는 글을 통해 모두 하나가 되는 대회, 세대 통합 및 성인문해교육 인식 개선 도모를 위한 백일장에 참가한 적이 있다. 초등학생 큰 아들은 외할머니에 대한 글을 써서 우수상을 받고 어머니는 배움의 시기를 놓쳐 칠순이 넘은 나이에 문해학교를 다니게 된 내용으로 금상을 수상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큰 상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머니는 정말 알면 알수록 놀랍다. 그동안 치유와 기록을 위한 글쓰기를 열망하다 11월 초 브런치작가가 되었던 나인지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머니를 향한 감정에 소름 돋았다.

“어머니 덕분에 제가 출세하네요.”


가족 단톡방에는 문해한마당 어머니 시화전 관련기사 사이트 서너 개가 공유되었다.



늘 그렇듯 침대 위 손때 묻은 작은 교자상을 올려놓고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려 연필을 깎으신다.


글을 쓰시며 쏟아냈던 슬픔과 그리움의 프롤로그는 이제 지났다. 침침한 눈을 비벼대며 보드라운 하얀 공책 위엔 제2막 75세 오늘의 선물을 기록하신다.


어머니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주무시기 전 일기를 쓰신다.


photo by i-ranga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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