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난 뭐든 할 수 있어

패기 넘치는 스무 살의 해외살이 3년

by 륀륀

그렇게 자취도 해본 적 없던 스무 살의 야심찬 첫 해외살이가 시작됐다.


나는 글로벌 물류회사에서 프로젝트 물류 포워딩 오퍼레이션을 담당했다.

포워딩이 뭔지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내가 포워더란다. (포워더는 한국에서도 힘들기로 악명 높은 직무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Management trainee로 입사했다. 이 직무 자체가 영업, 운영, 비즈니스 등 모든 것을 전반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매니저로 성장하는 게 목표인지라 모든 직무를 순환해야 했다.


그 첫 업무는 포워딩 오퍼레이션이었다. 이 업무는 쉽게 말하면 고객사의 물건이 A국 현장에서 B국 현장으로 잘 이동할 수 있게 모든 물류 전반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주로 한국 건설사가 고객사여서 큰 건설물자를 담당했다. 선박/항공 스페이스 북킹, 선적서류 준비, 수출입허가, 운송 차량 어레인지 등 A-Z까지 모든 걸 다했다.


그런데 내가 오퍼레이션을 너무 잘했던 건지 아님 매니지먼트를 할 정도의 역량이 없다고 판단하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포워딩 오퍼레이터로 나의 직무가 확정이 되었다.

사실 나는 영업, 매니지먼트, 이런 거 너무 극혐 했던 터라 아주 기뻤다.

(지금도 그런 걸 보니 스무 살의 나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었다.)


근데 참... 힘들었다.


첫 회사생활, 첫 해외살이, 과중한 업무(칼퇴는 꿈도 못 꿨고 밤 10시 퇴근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나는 매 순간 긴장감에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원래 포워더 자체가 욕도 많이 먹고 일도 많다. 회사들의 귀찮은 일을 대신해 주는 거기 때문에 갑을병정의 정 중에서도 더 아래다.

나도 고객사한테 욕 참 많이 먹었다. (어떤 소장님은 나한테 한 건 아니었지만, 전화 도중에 쌍욕을 시전 하셨다...) 또 물류가 어디 제대로 돌아가냐. 매일 지연에 사고에 말 안 듣는 운송사 놈들까지... 그렇게 오징어가 말라비틀어지듯 하루하루 쫄리는 삶을 살았다.


업무는 그렇다 쳐도 내가 제일 힘들었던 점은 다름 아닌 비교, 경쟁이었다.

나랑 비슷하게 들어온 '명문' 싱가폴국립대 출신 인턴이 있었다. 명문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친구에 비해 나는 그저 어찌저찌 입사하게 된 고졸 사원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주눅 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입사 시기도 비슷한지라 상무님이 글로벌 물류 동향, 물류 효율화 방안 등 듣기만 해도 어지러운 주제로 매주 PPT 발표를 시켰다. 직무 역량 위주로 배우는 마이스터고 출신이 이런 리서치/발표를 해봤을 리가.. 게다가 난 영어도 잘하지 못하고 업무 따라가기도 충분히 벅찼다.

(아직도 억울한 게 난 엄연한 담당자였고 그 친구는 인턴이라 담당 업체는 없었는데 왜 이 부분은 1도 고려를 안 해주신 건가!)


매주 월요일, 상무님 방에서의 그 1시간은 고통 그 자체였다.

발표 내용은 둘째치고 발표자료 퀄리티부터 차이가 났다. 물론 중요한 건 내용이지만, 내용도 당연히 그 친구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당연히 상무님의 메인 타깃은 늘 나였다.

이때가 회사생활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시기였다.


그러다 입사 3개월 차, 결국 한국 가고 싶다고 상무님 앞에서 울어버렸다. 참 쪽팔리는 일이다. 그래도 상무님이 한 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다시 오라고 돌려보내셨다.

지금 생각하면 20살이 뭘 안다고.. 상무님도 그래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신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꺼이꺼이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했다. 한국 가고 싶다고.

엄마가 정 못 버티겠으면 돌아오라고 하셨다.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나를 다시 일으켰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응원, 상무님이 주신 소중한 기회. 이걸 내가 이렇게 냅다 차버리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선택한 길이다. 내가 후회하기 싫어서 선택한 길인데 지금 가면 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꾸역꾸역 버텼다. 그러다 보니 보람도 생기더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한 개 있다.

팀원들과 고객사 업무 분장을 다시 하는 과정에서 내가 맡고 있던 고객사가 다른 팀원에게 넘어갔다. 한 달쯤 지났나... 그 고객사가 원래 담당자로 다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원래 담당자가 일을 참 깔끔하게 잘한다고. 그래서 다시 내가 맡게 됐다.

고객사에게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그 순간. 그 벅차오르는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대부분 고객사가 말도 안 되는 일정을 많이 요청한다.

"이거 미국에서 오는 건데 무조건 8월 10일 3시까지 들어오게 해 주세요. 꼭 필요한 겁니다 꼭이요!"

이러고 전화를 끊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하도 이런 게 많아서 결국 무뎌진다.

고객사가 요청한 건 토 달지 말고 해야지 그럼 그럼.

그렇게 새벽이건 주말이건 끊임없이 현황 추적을 한다. 그리고 마구 쪼은다. 제발 더 빨리해 달라고.

(아마 선사, 운송사에겐 내가 기피대상 1위였을 것이다.)


결국 고객사가 요청한 시간 내에 물류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객사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인사를 하는 고객사는 참 좋은 분들이다.)

그때의 안도감, 시원함, 뿌듯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일의 보람인가 보다.


그리고 나름대로 2년 차가 되니 팀에서 선배이자, 에이스였다. (퇴사율이 높았던 곳이다)

워낙 까다로운 한국 고객사를 대부분 내가 다 맡았던지라 웬만한 케이스에는 단련이 되었다.

팀원들이 업무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나를 찾고, 나는 또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해 준다.

그러면서 얻는 보람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싱가폴에서의 삶도 좋았다.

싱가폴은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 나라이지만 여러 문화가 있다. 그래서 다채롭다.

또한 주변에 여행 국가들이 많아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그리고 잘 사는 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나라 자체가 깨끗하고 치안도 좋다.

나는 콘도에서 살았는데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어서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많이는 못 간 게 한이 되긴 한다)

아시아이기 때문에 인종차별도 없었고, 한국인 마인드와도 비슷해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살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나라였다.


그런데 왜 결국 퇴사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냐고?


나는 외국인이 해외에서 살아가는 데는 결국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점, 당연한 차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뭔가 모를 답답함이 컸다.

물론 시민권, 영주권 획득 등 싱가폴에 살려면 계속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노력해서 해외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한국인이 살고 있는 한국이 편하고 좋았다.


어린 나이에 해외살이를 하면서 확실하게 얻은 게 있다.

'세상은 넓고 난 뭐든 할 수 있어'


싱가폴에서의 3년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 줬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 알려줬다.

아무것도 안 하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기엔 세상은 너무 넓고 재밌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해외에서 일도 하고 야무지게 잘 살아냈던 나는, 어딜 가든 두려울 게 없는 자신감을 장착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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