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나에게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쿠엔틴 타란티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방식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10편을 만들고 은퇴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고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그의 아홉 번째 작품이다. 만약 이번 작품이 걸작으로 평가된다면 이것으로 그만두고 싶다. 내가 영화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왜 60년대의 할리우드를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쿠엔틴 타란티노는 1963년생이다. 쿠엔틴이란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버트 레이놀즈의 TV시리즈 작중 이름인 퀸트에서 따왔다. 그가 두 살일 때부터 그의 어머니는 쿠엔틴을 영화관에 데려갔으며 그의 새아버지 또한 TV시리즈와 할리우드 영화의 광팬이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에게 감히 예상해 보건대, 그에게는 60년대의 할리우드가 그의 아름다운 유년기였을 것이다. 대개 어릴 적에 어떤 것을 보는지가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어릴 적에 감상한 작품들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새겨진다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그도 그랬던 것일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히피들이 릭 달튼을 죽이자고 할 때 하는 말들을 보면 ‘할리우드는 우리에게 살인을 가르쳤다. 모든 작품들이 살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저들을 죽이고 정의를 구현하자’라는 식인데, 이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여태껏 영화를 만들며 항상 따라왔던 꼬리표이기도 하다. 그가 만드는 영화는 항상 폭력적이고 모방 범죄를 우려하는 민심이 따라다녔다. 타란티노는 항상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답변으로 일관했고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게임이나 만화, 영화를 보고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어떤 곳에서 무엇으로 인해 동기가 부여되든 간에 해를 가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샤론 테이트의 사건처럼. 그러니 히피들이 하는 행동은 타란티노의 영화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고 릭과 클리프는 그들을 응징하는 타란티노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릭이 60년대 할리우드 쇼비즈니스계를 관통하면서 남기는 당시의 잔상들은 영화의 '장르' 그 자체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서부극으로 갔다가, TV시리즈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 첩보물로 분하는 스타를 보면서 60년대의 할리우드를 체험해보지 못한 세대들에게도 간접 체험시켜주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69년인가? 69년은 히피 문화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찰스 맨슨의 살인사건과 롤링 스톤즈의 알타몬트 공연이 일어난 해였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히피 문화는 몰락해 나갔다. 영화계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바로 뉴 할리우드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작중 스타 액팅에 가까운 스타일의 릭 달튼을 보면서 그가 새롭게 출연하는 시리즈의 감독은 릭 달튼이 아니라 배역 그 자체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 대탈주(1963)의 한 장면을 릭이 본인의 스타일로 해석한 카메라 테스트 영상이 등장하는데 실제 대탈주의 주연을 맡은 스티브 맥퀸에 비해 연극적이고 과장된 연기를 선보인다. 실제로 60,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스티브 맥퀸의 연기 스타일은 과거의 율 브리너와 같은 연극식의 스타일과 비교했을 때 한층 톤을 낮추고 현실적인 화법인 것이 특징이다. 히피 문화의 전환과 뉴 할리우드의 시작 이 두 가지 거대한 흐름 가운데에 릭 달튼이 있다. 그는 히피를 증오하고 새롭게 참여하는 작품들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이탈리아로 가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구실을 끊임없이 찾곤 하지만 그가 과거의 명성으로 돌아갈지는 미지수이다. 근근이 커리어를 이어가다가도 돈이 없어 오랜 절친과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까지 이른다. 예상컨대 쿠엔틴 타란티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사라져 가는 클래식 할리우드의 잔상들을 릭 달튼에게 투영해 50, 60년대의 할리우드를 예찬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타란티노에겐 60년대가 그에게 할리우드의 황금기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샤론 테이트의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샤론 테이트의 죽음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치가 떨렸다. 아직도 그녀를 비참한 배우, 그리고 성적인 소비물로 보는 대중에게 분노를 느꼈다. 타란티노는 이제 막 성공가도를 달리는 샤론 테이트가 가여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징 스타로 부상하던 그녀의 죽음이 어린 시절의 타란티노에겐 적잖은 충격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샤론 테이트는 밝고 명량하고 순수하게 그려진다. 릭과 클리프는 대사를 까먹고, 사고 치고, 나자빠지는 반면에 샤론 테이트는 그 자체로 맑게 그려진다. 샤론 테이트가 타란티노에게 있어서 영화의 순결무구한 이미지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신의 세상에서 만큼은 샤론을 살려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처연하지 않다. 오히려 구원에 가까웠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래서 이번 타란티노 영화가 유독 덜 폭력적이고 서정적인 영화였나 하는 생각에 가닿게 되었다. 이제는 은퇴를 생각하는 거장이 유년 시절과 낭만, 추억이 담긴 과거의 할리우드를 가져와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유독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다. 과연 타란티노는 영화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기 위해 클래식 할리우드를 가져온 것일 테다. 최근 데이빗 핀처의 맹크를 보았다. 허먼 맹키위츠가 시민 케인의 각본을 쓸 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영화 자체는 원스 어폰 어 타임 보다 훨씬 고발적이고 어떻게 보면 원스 어폰 어 타임과 대척점에 있는 영화다. 맹크는 고전 할리우드 시스템의 치부를 드러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맹크는 작중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정신 차려야 돼. 우리를 믿고 어두컴컴한 방안에 앉아있을 사람들을 위해서." 허먼 맹키위츠라는 인물만을 떼놓고 본다면 그는 예술을 정치 선전용, 돈벌이로 사용하는 제작자들과 할리우드에 염세를 느꼈다. 영화 맹크 역시 분명히 작중에서 정점을 찍는 장면이 있다. 마치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엔딩처럼 그 장면은 나에게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다. 왜냐면 영화, 영화라는 예술을 대하는 맹키위츠와 데이빗 핀처, 그리고 영화인들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가 돈에 의해, 돈을 위해 움직이는 사업이라지만, 결국 영화는 관객들을 위한 것이라는 선량한 의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생각이라기보단 소망한다. 그런 믿음이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감독을 보면 그 불씨가 꺼지지 않는다. 그가 영화를 사랑하는 태도, 관객들을 대하는 태도는 나에게 어떤 믿음을 준다.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영화가 끝나고 타이틀이 내려가도 꺼지지 않는 카메라처럼 다시 상처투성이의 삶으로 돌아갈 관객들의 빈자리를 응시하며 영화는 애정 어린 응원을 보낸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의 커리어 끝자락에서 만든 이 영화는 그의 유년 시절, 꿈, 영화에 대한 사랑이 모두 집결된 작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그의 로즈버드는 영화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도 없다. 부디 그가 좀 더 할리우드에 남아있길 바란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새로운 변화에 잊혀져 갈 누군가의 꿈과 이상을 조금 더 붙잡고 있는 영화다. 결국엔 잊혀질 테지만 한때는 누군가의 황금기였고 꿈이었을 순간들을 향해 안녕의 인사를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