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안나] -결핍은 근면함을 낳기도 하지만 불안과 허영을 낳기도 하지
유튜브 알고리즘이 최근 쿠팡플레이의 6부작 드라마 [안나]와 관련한 영상들을 내게 추천해왔다.
안나라고? 안나 카레니나 같은 그런 느낌일까? 그러다가 얼굴에 물세수만 해도 예쁘다는 수지가 나온단다. 티저 영상들을 두어 개 보고 줄거리 요약을 해 놓은 영상들도 몇 개를 보면서 안 되겠다 싶어 정주행을 하기에 이르렀다. 총 여섯 개의 에피소드 중에 4화까지 나온 상태라 따라잡기에도 무리 없는 회차 수였다.
그렇게 몰아보기를 한 뒤 머릿속에서 안나, 혹은 유미 혹은 Anna 라는 이 여자가 잊히지 않는다.
도대체 이 여자는 내 안의 무엇을 건드렸던 것일까?
여자는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말을 그녀 몸에 걸친 값비싼 옷과 구두를 입듯이 덧입고 덧입고 또 덧입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동자는 자주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조마조마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녀의 불안이 나는 낯설지가 않다. 익숙하다기 보다도, 친근하다.
이 친근함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안에서 새끼를 쳐 나간다.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해도 이 여자를 마냥 욕 할 수 있을까?
욕 할 수 없다면 무엇 때문일까?
욕 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욕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두둔하지 않는 것과 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떻게 다를까?
여자의 정체가 세상에 명명백백 드러나면 사람들은 속 시원해할까?
아니, 나는..나는 어떨까?
여자의 거짓말이 가장 밑바닥까지는 들키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누구 한 명이라도 이 여자를 잇속을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해서 도와줄 수 있으면 안 될까?
여자는 나중에 끝끝내 어떻게 될까?
이 모든 질문들의 출발점이자 불안함이 풍기는 친근감의 이유는 안나가 내 안의 결핍과 불안을 헤집어다가 기어이 끄집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유미였던 시절부터 이렇게 말한다.
항상 그랬어요.
난 마음먹은 건 다 해요.
마음먹은 건 기어이 해 내고야 말고 그렇게 해야만이 직성에 풀리는 성미.
그게 순탄하게 잘 풀려나갔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삶이었겠지만 운명의 여신이 농간을 부리기라도 하는지, 이런 성미를 가지게 된 많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들 그 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지 모르겠다. 여기, ‘이안나’라고 개명까지 해서 있는 집 엄친딸이자 망나니 개딸의 신분을 도용하여 자기가 마음먹은 욕망들을 성취해 나가는 여자가 한 명 있고, 그냥 날 때부터 자기가 마음먹은 건 다 할 수 있는 삶이 주어진 진짜 ‘안나 리’가 있다. 이 둘의 극명한 차이는 여기에서 갈린다.
한쪽은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스스로 성취해 낼 수 있고 그렇게 하길 원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걸 실현시켜 줄 결정적인 한 방을 행사해 줄 조력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지금 자신의 현재에는 없는 결핍된 것들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하고 있는, 말하자면 아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다른 한쪽은 내가 마음먹은 건 다 한다고 애초부터 자각도 못하고 응당 원래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듯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들이기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배려도 없지만 악의도 없고 없는 것에 대한 이유도 딱히 없어봤을, 말하자면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이다. 결핍의 유무가 비슷한 연배로 같은 나라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심지어 나중에는 같은 아파트에 입주해 있는 두 사람의 입장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한쪽은 결핍이 있기에 결핍이 삶의 동력이다. 가슴속에 칼을 차고 칼을 갈면서 더러는 입에도 그 칼을 물고 살아가고 한쪽은 결핍이 없기에 삶은 자주 권태롭고 불행한데 또 풍족하니 꿀꿀한 날이면 ‘파리 경우 핀란드 인-앤-아웃 스파 여행’도 다녀올 수 있다. 결핍을 매워보려고 아등바등 화려한 겉치레에 집착을 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그냥 원체 많고 많아서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옷과 가방을 그냥 걸치는 여자가 있다. 결핍된 여자의 아버지는 평생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기 기술을 가지고 정직하게 자기 손으로 일하며 눈물 어린 돈을 차곡차곡 모아 자기는 희생하고 딸자식 교육비 뒷바라지에 소모하다가 병들어 스러져간다. 결핍이 없는 여자의 아버지는 결핍 많은 사람들을 채용하여 그들의 절박함을 담보로 틀어쥐고 그 약점을 적절히 건드려주는 방식으로 체제를 유지한다.
결핍은 대물림되는 것일까?
결핍이 없는 것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결핍 있는 자들 중에서도 또 갈림길이 생긴다. 결핍이 많은 자가 FM대로 살면 마음먹은 것을 혼자 힘으로 손에 쥐기는 점점 요원해진다. 결핍이 없는 자는 마음먹은 것은 너무나도 손쉽게 갖는다. 사기가 자명한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 자리에서 청약통장 장사하며 집안을 일으켜 세워낸 아들내미가 마냥 자랑스러운 예비 시아버지는 지킬 것 다 지키면서 어떻게 큰일을 하냐고 떳떳하다. 누구에게는 결핍을 해결한다는 목적 앞에서 수단쯤은 아무래도 결과가 확실하면 뿌듯해질 수 있다. 그러나 결핍이 많아 채우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 가운데 죄책감이 엄습해 오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죄책감을 떨치자고 다시없었던 일로 하고 원래대로 돌아갈 용기도 없다. 그런 사람이 바로 [안나] 속의 ‘유미’ 혹은 ‘안나’이다. 이 여자의 남편은 자기 피셜로 가장 공들여 꾸민 라운지에 결정적으로 소파는 이미테이션인 것으로, 이미 이미테이션의 화신 격인 맞선녀에게 들키는 짝퉁 인생인데, 여기까지는 참 닮았는데, 이 남자에게는 자책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대비를 시키고 보니 하면 할수록 점입가경에 어쩜 이렇게 엿같은지 모르겠다.
이 드라마는 마치 사전에 작당모의라도 했는 듯이 아주 오라지게 내 속을 헤집어 놓았다.
마음먹은 건 다 하는 성미. 나는 줄곧 이런 나의 성미를 인식하고 있었는데 또한 줄곧 이 성미에 수치를 부여해왔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수의 독방 같던 손바닥만 한 고시원 방을 얻어 서울로 돌아왔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춥디 추운 겨울날 가장 빠르고 가장 저렴했던 상하이 10시간 경유 조건의 중국 동방항공편으로 이민을 떠나왔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두 번 다시 한국 회사 현지 채용은 안 할 거라고 뒤도 안 돌아보고 현지 회사로 이직을 했었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회사 내에서도 다른 동료들 이사 어찌 생각하든 내게 유리한 기회를 줄거라 생각한 부서로 이동 신청을 냈었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영주권을 손에 쥐기 전까지는 서울 가지 않을 거라고 교민사회에도 발 붙이지 않을 거라고 갖은 지랄을 떨며 버텨냈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받고 보니 너무 가볍고 얇고 초라한 분홍색 영주권 카드를 손에 쥐었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외국에서 퇴사를 했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몇과도 손절했다 — 그때 당시에는 그들 탓을 했지만 지나면 지날수록 자존심에 수틀려서였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내가 배워보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마음먹은 대로 나는 기어이 싫은 건 안 하고 안 보고 싶은 사람은 안 본다.
안나처럼 이따금 이래도 되나 죄책감은 든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래도 나는 거의 대부분의 선택들을 거의 대부분 유사한 방식으로 결정하고 실행했을 것이다. 이래서 나는 꼴통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삶의 많은 영역에서 불안불안 위태롭다. 언제 어느 영역에서 어떤 부품이 떨어져 나갈지 모를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자꾸만 뒤따른다.
이 약도 없는 꼴통, 자의식 과잉, 나르시시스트, 정신병리적 이기주의자. 꼴에 뭣도 없는 주제에 꼴값도 가지가지로 떤다, 재수 없는 꼴통, 그러니까 사람들이 널 질려하지, 개나 줘도 안 물어갈 성질머리. 그렇게 아무리 해도 끈덕지게 나는 마음먹은 건 다 해내며 살았다. 그러느라 결과물을 제법 쥐기도 했지만 대게 결핍에서 비롯되어 아등바등거리듯 살아낸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가운데 특출 나지는 못했으므로 어딘지 자질구레하고 빈약하기 일쑤였다. 거기에도 아랑곳 않고 그런 결과물 나부랭이라도 손에 쥐었다고 자위를 하며 살아왔는데, 그러느라 그런 알량한 것을 얻느라 인생의 다른 가치들, 이를테면 우호적인 인간관계 같은 것들은 늘 불안정했다.
나는 어머니를 동정하면서도 아버지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성장기가 썩 자랑스럽지도 않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억울하고 자주 슬프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래도 견물생심이라고 자꾸만 비교 열등과 비교우위 사이를 넘나들며 이대로 가다가 정신착란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위혐감도 든다. 결혼을 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다만 만일 한다면 결혼식은 생략하거나 그냥 아주아주 간소하게 아주아주 손에 꼽힐 인원만 모아놓고 하고 싶고 엄마랑 오빠는 초대해도 차라리 집안의 남성 어른 자격으로 연로하신 외삼촌을 초대할지언정 아빠는 부르고 싶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과도하게 봤지만 그 동기는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오직 내가 마음먹은 걸 다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될 거냐 도움이 될 거냐를 따지다 보니 생겨난 습성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어떤 말로도 미화시킬 수 없고 거짓말도 못하게 되어버린 나의 현주소이다. 비록 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학벌을 꾸며대고 태생을 꾸며대는 스케일까지 가지 않았다 뿐, 내면에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다른 건 얼추 다 갖추었는데 사회경제적 지위와 거기서 나오는 결정적 한방급의 서포트가 늘 부족했던 내게 그것만 주어지면 나는 아주 우뚝 설 텐데’라는 마음이 마그마처럼 들끓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욕심에 지나지 않으니 현실을 직시하고 욕심을 내려놓아 하심을 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미련과 억화심정만이 쌓여갔다.
그런 내 앞에 저 말갛게 바스러지기 직전의 말린 장미꽃처럼, 이제는 검붉을 단계마저 지나고 잿빛이 서리기 시작한 한 여자가 나타나서는 내 욕망을, 아니 그 욕망의 뿌리 되는 결핍을 온몸으로 재현한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우와-‘ 하는 아이비리그 학위도 여자는 그냥 도용해낸다. 결혼식에는 돈으로 매수한 사람으로 자기가 원하는 부모 이미지를 만들어낸 사람들을 인형처럼 세워 사진을 찍는다. 어디 꼴같잖은 것들이 갑질을 떠는데 그 집에서 돈푼이라도 들고 야반도주를 하는 소심한 한방이라도 먹이고야 만다. 하는 짓들마다 아주 버러지 같은 짓들 뿐인데도 그래도 기어이 해내고 만다. 그걸 보는 날더러 어쩌라고. 아주 미쳐버리겠다.
여자는 언제라도 바삭바삭거리다가 바사사삭 하고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이 여자에게 포섭당한 것 같다. 이제 이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할 수만 있다면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서 또 사기로 점철된 인생의 하루를 살아내러 현관을 나서는 여자의 발목이라도 붙들고 싶다. 오늘 하루만 나가지 말아 보라고. 나랑 앉아서 이야기라도 좀 하자고.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자고. 가서 어떻게든 다 잊고 새롭게 살아 볼 방편을 강구해보자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애원하고 싶다.
이 여자는 그냥 단순한 드라마 속의 가상인물이 아닐 것이다. 암만해도 이 여자는 아바타 같다.
이 여자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는가?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우선은 반갑다. 우리 같이 이 여자가 다른 엄한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켜서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어디 조라도 짜서 뭐라도 해보자고 하고 싶다. 우선 출근길에 바짓가랑이도 잡아보고, 내친김에 도시락이라도 싸들고 따라 붙이면서 가는 길을 돌려세워보기라도 하고 싶다. 아니 23층에서 엘리베이터에 짠 하고 열릴 때 스토커처럼 타고 있다가 망태기 같은 것으로 보쌈하듯 싸서 둘러업고 어디 아무도 안 보이는대로 데려다 놓고 싶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이 여자를 말리기는커녕 여자의 완전범죄를 위한 무슨 일이라도 할 듯하다. 이래서는 아니 될 일이다.
결핍은 삶을 근면하게 살아갈 동기부여를 적장자처럼 낳아주기도 하지만 꼭 옛날 봉건 시절 눈엣가시 같은 시앗이 낳아와서는 내 집 대문 앞에 몰래 두고 갔을 것 같은 불안과 허영을 낳아놓기도 한다. 이 배다른 형제 같은 것들이 한 사람의 일생에 번갈아가며 어떤 식이든 작용을 할 터이다. 드라마 속 이 여자가, 그리고 이 여자를 닮아있을 누구라도 바로 그 증인이다.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이런 의문마저 든다.
내가 그녀를 닮았다기보다
어쩌면 그녀가 나를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