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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Jul 09. 2022

앞으로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드라마 [안나] - 거짓말보다도 안타까운 건 근시안적 안목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게 문제지.




극 중 제일 정상적인 축에 속하는 등장인물인 ‘지원’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에 ‘유미’에게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은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느냐, 어떤 정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만큼 가변적이다. 처음부터 작중 인물들이 모든 상황과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이런 식의 대화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처지에 자주 불만족하고 만족이라는 상황은 매우 드물게 찾아온다. 어떨 때는 만족을 좀 했나 싶은데 한 숨 돌리고 돌아서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없는 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에 집중하면서 지금 주어진 것을 발판 삼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려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이 대사는 시선을 다시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시공간으로 돌려야 할 어느 상황에서라도 두루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천착하거나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에 두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불안하고 허황된 유미 곁에 현실적인 지원이 있어 준 것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 둘을 만나게 해 준 작가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비록 사람은 같은 말을 들어도 자기가 그 상황에서 듣고 싶고 해석하고 싶은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극 중의 유미 역시 아무리 작중 인물이라 해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었다.  이 말을 듣고 유미는 자신이 취할 수 있었을 꽤 여러 가지 옵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심리적 결론을 미리 짜 버렸다. 그 뒤, 유미는 그 결론을 미리 ‘답정너’ 식으로 상정 한 뒤 그에 맞게 선 행동, 후 조치를 취하며 땜빵 때우듯이 구멍을 매워가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한다. 물론 그때마다 매번 조금씩 더 깊어지고 대담해지는 거짓말과 함께 말이다.





얼굴에 검댕을 뭍혀가며 고깃집 석쇠를 나르던 유미는 하다못해 정부지원 국비교육이라도 받아서 좀 유용한 기술이라도 배우면 안되었던 걸까?






여기서 운명적 전환이 일어난다.


이것이 유미가 안나가 되는 것을 막게 해 줄 기회였는데 유미는 그걸 다르게 해석하느라 안나가 되는 길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어두컴컴한 고시원 방에 앉아서 이력서를 작성하던 고졸의 알바인생 유미에게 마침 야반도주할 때 갖고 나온 전 직장상사의 여권과 학위증이라는 엄청난 개인정보 자료를 아무렇게나 쑤셔 박듯 버려놓은 휴지통을 뒤져 건져 올린다. 그리고 그녀는 ‘이유미’에서 미국 시민권자 이자 미국에서 아시아 미술사를 전공한 부동산 재벌집 딸 ‘안나 리’로 그냥 슬쩍 그 뒷배경만 좀 얻어가 보려고 일이 이렇게 커질지도 모른 채로 자못 순진하기까지 한 물색없는 계산에서 이 모든 이야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을 것이다. 어쩌면 유미는 뭐든 쉽게 가지고 버리는 또래 여성인 진짜 안나 리, ‘현주’가 부럽다 못해 어떻게든 한방 먹여볼 심산으로 이렇게라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없는 자만이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을 소심한 복수라면 복수라 불릴지도 모를, 그런 것 말이다. 일말의 복수심이 몇 방울 섞여 들어가 그런가 몰라도 나는 묘하게 이 드라마 전반에 클로즈업되어 화면에 잡히던 유미의 말간 얼굴에서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 ‘금자’의 모습을 여러 번 느꼈다. 어쩌면 유미 혹은 안나는 금자의 오마쥬 버전일 수도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특히 이 얼굴을 보라.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하얀색 계통의 의상에 해사하게 말간 얼굴에 둥근 눈을 뜨고 카메라 너머의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저토록 친절한 얼굴로 말이다.





가슴에 화가 많은데 힘이 없는 사람이 적개심을 숨기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별다른 옵션이랄 것도 없다. 강력한 멘털로 무장해서 미친개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쌈닭이 되어 누구든 쪼아버릴 듯 달려들거나 혹은 고분고분 순종하며 세상 친절한 얼굴로 착하고 만만한 쪽을 택하거나. 유미는 그 후자였지 싶다.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는 성미의 특성상 목에 칼을 들이민다 해도 모든 것을 다 내려두고 까라면 깔 수 있는 그런 낯짝은 발달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차라리 유미가 심미 주의자가 아니라 지독한 현실주의자로 비위도 강하고 얼굴도 두꺼웠더라면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까 싶다. 그렇게 악바리로 살아서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는다면 높은 데로 올라갔을지 또 누가 알까? 늘 자기가 했던 말처럼 항상 마음먹은 건 언제나 하는 유미가 말이다.



욕망을 품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름과 배경뿐 아니라 유사시 영혼도 갈아치울 기세로 불나방같이 살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욕망은 욕망이라지만 가슴속에 응어리지지 않게 화도 적절히 표현하면서 맷집도 길러가면서 그렇게 조금만 더 자기를 내려놓고 살았더라면 많은 위험들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도 나는 안다. 이것은 유미답지 않다. 유미는 안나가 어울린다. 그닥 행실 바르게 살지 못했던 여자의 허울을 그대로 갈아 끼우면서 자기는 더 돌이키기 어려운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도 그렇게 찰나로 살더라도 유미는 그게 설사 가짜였다 해도 안나여야만 했다. 그것 아니고서는 아무리 옷걸이에 옷들이 즐비하게 걸려있었더라도 유미에게 어울리는 옷은 없었다고 믿는다.


그래도 말이다.

만약에 라는 것이 있다면, 극중 유미의 인생에서, 그리고 유미를 조금씩 조금씩 가슴속에 가지고 있을 많은 이들의 인생에서.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은 순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만약에 이랬다면, 저랬다면 좀 달랐을까? 수많은 가정법 의문문들을 던져볼 것이다. 마지막 회차에 다다라 유미는 다시 지원의 집에 찾아가 모든 것을 실토하는 자리에서 처지가 어렵다고 모두가 그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노력했는데 잘 안됐어요.



억화심정과 분노가 켜켜이 쌓여만 가던 유미의 변명이다.

금자는 교도소에 가서 일단 첫 죗값은 치르고 나와서 복수를 하려 해도 했다만, 유미는, 안나는 실형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지원의 우려에도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법률적 죗값은 유보하고 자기만의 방법대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여기에서 금자와 유미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아니, 오마주는 했을지언정 캐릭터의 강단 면에서 유미는 금자보다 무르고 여리다. 어설프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내려왔던 많은 선택들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서 그녀의 뒤통수를 쳤다. 항상 마음먹은 건 해 내고야 마는 똑똑하고 재능 있는 유미였는데, 다소 충동적이기도 하고 멀리 내다보며 큰 그림을 그려내지 못했던 순진성으로 인하여 유미는 딱 그만큼, 거기까지 그 이상으로 잘 안돼었던 것이다. 거짓말만 해 온 그녀라지만 그녀가 한 말들은 모두 다 눈물겨울 정도로 사실이었다. 정말로 노력했는데, 열심히 여기까지 간신히 왔는데 잘 안되었다. 유미가, 그리고 안나가 아쉽고 가엽게 느껴지는 것 같다.





거짓말을 안 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삶의 덕목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다.

바로 넓고 멀리 볼 줄 아는 시야를 확보하는 일이다. 매사에 먼 미래를 내다보며 사는 것도 현실성이 없지만 매번 너무 과거에 천착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느라 좁아진 시야로 무엇을 해내려 하면 되려 그 덫에 걸려들어 진짜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게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더라도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어째서 이렇게 되었나 싶더라도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앞으로를 기약하며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며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게 비록 내가 상상하고 동경했던 판타지와 너무 동떨어져서 내 억울함이 더욱 자극받는다 하더라도. 그 억울함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여기에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유미 혹은 안나라는 여자의 인생을 엿보며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있다만, 실은 이 모든 말들은 내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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