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안나] - 약하지만 조용히 강한 삶이 있다면
넌덜머리 날 정도로 지긋지긋했던 내 과거를 오버랩시켜주는 누군가를 만난 적 있는가?
이 드라마 속 특히 여성 인물들 가운데 유미와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며 그 대비 효과로 주인공의 처지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역할이 나온다. 안나가 되어버린 유미가 안나를 택하느라 버린 바로 그 ‘유미’라는 이름을 가진 비서 ‘조유미’다. 이름도 유미인 조비서의 등장은 유미를 버리고 안나를 취한 주인공을 흔들리게 한다. 처음으로 자신을 모멸 주던 마레의 이작가처럼, 자기 아버지 벌 되는 운전기사를 해고하던 남편처럼 어느새 가사도우미 앞에서 똑같은 갑질을 부리는 자신의 모습에 제동을 걸게 해 주는 이는 다름 아닌 조비서였다. 자신이 버린 이름을 하고 있는, 한때 자신이 하던 일을 하고 있는 조비서. 그 조비서 앞에서 자기가 당하던 일을 행하는 가해자로 둔갑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주인공은 어땠을까? 조비서는 그런 주인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남편이 힘들게 하지 않느냐는 안나의 질문에 조비서는 담담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이 일이 출퇴근이 없는 일이고,
저에게는 소중한 기회라서요.
능력껏 일해서 인정받고 싶어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멍 했다.
무엇이 너무나도 싫어서 죽기 살기로 도망쳐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재현하는 사람이 보인다.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이제 겨우 잊고 살만해졌는데 다시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으려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일지도 모를 저 사람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저 사람에게서 나의 가장 연약하고 안쓰럽던 시절이 되살아나며 측은한 마음이 들 것 같다. 실제로 높은 사람의 비서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기를 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기어이 벗어난 다른 일자리들에서도 나를 슬프게 만드려고 작당모의라도 한 것 마냥 조금씩 비서스러운 일들이 스며있는 일들을 거푸 하게 되었다. 내심은, 안나같이 떠받들어짐 받고싶고 우러러봐지고 싶은 욕망이 강한 내게 애초부터 누구의 밑에서 시중들거나 다른 직원들을 서포트하는 일을 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 그런 일들을 맡는 다는 설정 자체가 괴로움이었다. 결론은 그냥 심플하게 바로 이거였다: 그 일 말고 다른 일을 할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이 제일 미웠고 그래서 제일 분했다.
가까스로 그런 일들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고 있던 어느 날, 그 회사에 재직 중이던 동료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내 후임으로 들어온 사람이 너무 힘들어하기에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좀 해주면 어떻겠느냐며 내 번호를 주었다고 했다. 그 내용을 보자마자 내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뛰쳐나온 곳인데 거기서 내가 하던 일을 똑같이 하며 거기서 내가 겪던 어려움을 똑같이 겪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조우해야 한다니 — 그 사람이 올무를 걸어서 나를 다시 그리로 데려다 놓을 것만 같은 그런 식의 공포감을 느꼈다. 과연 몇 시간 뒤, 내 후임자라는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가증스럽게도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입에 발린 말로 그 사람을 위로해주었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하는 척을 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엉겨 붙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하게 되면서 친절도 박절도 아닌 애매한 이상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고 눈치를 깐 건지 심경의 변화인 건지 그 사람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그 일자리를 그만두었다는 짧은 문자를 보낸 뒤로 더는 연락이 없었다. 그 사람이 그만둘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진짜 다행은 더 이상 연락이 올 일이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 일은 그 뒤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이제야 이렇게 글로 조금이나마 언급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이 드라마의 역할이 컸다. 그때 처음으로 휴대폰 번호를 바꿔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렇게 회피하려들지 말자며 그 유혹을 떨쳐내었다.
그저 너무 끔찍하게 주어진 현실을 싫어하기만 하느라 나는 그때 엄청난 피해의식과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힘들게 얻은 직장에서 미우나 고우나 지금 처지에서 구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나를 믿고 맡겨준 일이었는데 나는 그 일을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어 밤마다 구슬피 목놓아 울었다. 그런 스스로가 찌질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더 더 더 많이 서럽게 울었다. 거기서 벗어난 뒤로는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고 그 당시에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의 뇌 속에 어떤 식으로든 남아있을 나에 대한 기억도 함께 선별적으로 지워버리고 싶었고 그냥 다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내 처지가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모시는 상사에게 경사가 나던 날에는 새벽 늦게까지 퇴근도 못했는데도 조비서라는 인물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라고 말하며 담담하게 현실을 수용했다. 이 일은 원래 이런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사회초년생인 자신에게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나의 사회초년생 시절과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가 되어 겨우 다 잊고 잘 살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다 잊고 지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크게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심판의 카운트다운이 끝나도 나는 링 위에 널브러져서는 일어서질 못하겠다. 나의 완패다.
그동안 나 정도면 꽤 용기 있는 선택들을 많이 내려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없는 형편에 그래도 딱히 엇나가지 않았고, 불만사항도 많고 분노도 많았으나 직분에 충실한 자세로 누구보다 성실하게 치열하게 살았노라는 자뻑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식의 자뻑은 사실을 근거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 부재하는 사실을 원하는 마음에서 품은 소망이었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의 자기애적 위안은 나의 대표적인 방어기제였다. 불안하고 미흡한 현실을 그대로 마주할 자신도 없고 그러기도 싫었기에 내가 뭐라도 되는냥, ‘나 정도면 되었지’라는 식으로 거울 앞에 선 자그마한 집고양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늠름한 사자 같다고 착각하는 것은 실은 사자였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염원이었다. 다시 마주하는 매일의 일상이라는 현실 속에서 나는 사자이기는커녕, 오히려 진짜 사자 같은 사람들 발아래 놓인 봉제 고양이 인형쯤이라도 되었으려나 싶다. 그 시절, 내가 그토록 싫어했고 도망치고 싶었고 서러웠던 대상은 일도, 상사도 아닌 실상 별 쥐뿔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든든한 뒷배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핫바리 신세인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나 미웠던 것이다. 그래서 자주 부끄러움, 열등감, 분노, 죄책감 같은 감정들이 난리를 피웠다.
모시는 분들 기분이 제일 어려워요.
그런 건 제가 노력해서 알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조비서는 참 프로페셔널했다. 나는 프로페셔널 한 척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찌질하고 유아틱 했지만 그녀는 훨씬 더 성숙했다. 원래 이 일이 이런 일이라 다른 건 다 괜찮지만 기분 맞추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고백했다. 그것도 거기에 어떤 가타부타 가치판단을 크게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 당시의 나는 똥개 훈련시키듯 식당 예약을 하랬다가 취소하고 다른 데로 하랬다가 다시 취소하고 원래 하던 곳으로 다시 예약하랬다가 또 취소하랬다가 하다가 양쪽 식당에서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짓이냐며 버럭 거리는 것을 받아내는 총알받이 노릇을 할 때 물색없이 미주알고주알 내 처지를 타인들에게 내 피해만 가장 극대화시켜서 고자질하고 안주거리 오징어 땅콩처럼 소비했었다. 남들 앞에서 뻑하면 울면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달라고 날 빨리 위로해 내라며 공갈을 쳤던 것 같다. 그밖에도 다양한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을 때마다 내가 여기서 이런 거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억화심정에 육두문자를 꾹꾹 삼키며 수동 공격적인 야비한 적개심을 감추며 일했다.
의젓하게 상사의 부인을 늦은 시간 집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 홀로 탄 엘리베이터에서 벽에 기대다 풀썩 주저앉아 두 무릎 위에 이마를 묻고 있던 장면은 이 드라마의 압권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 문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그 옛날 유미가 신고 다니던 굽 낮고 개성 없는 사무원의 정장구두를 신고 그날 하루 동안 조비서는 얼마나 많은 곳을 동분서주 뛰어다녔을까? 그 고단한 하루의 끝에 조비서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가서 조비서를 안아주고 싶었다. 저런 날들을 보내고도 조비서는 불평하지 않았고 다음 날 이른 아침 다시 상사의 집으로 단정한 입성으로 출근해서 또 하루치의 고단한 나날을 살아내었다. 나는 조비서야말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장 조용하게, 가장 강한 사람.
이쯤 되고 보면 작가가 조비서를 유미의 얼터 에고 (alter ego)로 쓰려고 작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대목이 나온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다음날이면 세상에 핵폭탄급 진실이 뿌려질 준비를 끝낸 안나는 이제 조비서의 역할은 끝났다며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고단하고 더럽고 부조리한 일들도 마다하지 않고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던 성실한 조비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제 큰일이 생길 테니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하루라도 일찍 잘라주고 싶어 하던 안나에게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래도 조비서는 안나 편에 서 주고자 한다.
제가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교수님이 누구든 제게는 그냥 고용주세요.
미약하지만 신의를 지키고 싶습니다.
신의를 져버리지 않겠다던 말에 안나는 이렇게 자조적으로 말한다.
신의?
나는 한 번도
그런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 이 두 유미들의 인격이 가장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 유미는 신의보다도 자신의 욕망이 더 중한 나머지 되돌아갈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버렸고, 다른 유미는 자신이 힘이 없지만 자신을 믿고 고용해주며 기회를 준 고용주에게 마지막 신의를 다하면서 끝까지 책임감 있는 사회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작 그 고용주는 그렇게 많이 가지게 되는 동안 신의 따위는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었고 되려 신의를 져버리며 거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말이다. 모든 인연에는 역할이 있다고 한다. 조비서는 인간으로 지녀야 할 여러 가지 긍정적인 가치들 중에서 주인공이 가장 간과했던 바로 그 가치에 대한 일깨움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려고 그녀의 인생에 등장한 인물이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패기와 용기, 어려운 일에도 굴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을 용기. 이런 용기들이 각광받는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조비서를 만나고 난 뒤 나는 직분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도 그에 못지않게 주목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누구는 일이 힘들고 후지고 부조리해도 무조건 탈출구만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가운데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고 그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동안만큼은 누구보다도 그 일에 충실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매일을 담대한 자세로 용기 있게 임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주로 어떻게 해서든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여 떠날 방안을 찾아내는 스타일이다. 물론 그 방안을 찾는 것도 굉장히 힘들고 괴롭다. 떠나는 것 그 자체가 문제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앞으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갖추자면, 그 일을 하는 동안에 과도하게 그것을 비하하고 자책하고 자괴감에 빠지는 식으로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의 테크트리로 빠져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습성을 줄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동안은 머리로만 그러지 말아야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볼 부분을 생각해야지 했지만 마음으로는 거부감이 굉장히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의 종자는 조비서처럼은 되지 못할 것 같아서 어떻든 아니다 싶으면 차갑게 내적 손절부터 먼저 하고 차곡차곡해서 떠날 준비를 하겠지만 말이다. 이제부터는 유사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과정에서 조금은 더 성숙하게 주어진 현실과 맡겨진 직분에 임하는 자세를 기르도록 해야겠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은 내 뼈를 다 발라 먹기 좋게 순살로 만들어서 뜯어먹으려고 사전에 합의를 다 마친 것 같다.
진즉에 양 팔뚝에 다다다닥 돋아오른 굵은 소름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좀처럼 없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