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보내며
이 영화가 김재규 미화가 아니라는 다섯가지 생각.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어쩌면 박통, 전두혁을 확실한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그린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말해 이 둘은 꽉꽉이 곽상천과 더불어 영화내에서 분명한 앤타고니스트들이다. 감독은 자신의 확고한 정치이념하에 이 셋을 그렸다. 그것이 사실에 기반했든 기반하지 않았든지간에. 하지만 김규평은 어떤가? 김규평은 이 영화의 히어로인가, 빌런인가? 프로타고니스트이긴 한가? 이 질문들에대한 우선적으로 내 생각을 먼저 밝히자면 김규평 역시 극의 악당 중 하나이며 영화는 피카레스크식 이야기를 차용했음이 명백했다. 나는 이에대한 내 생각의 근거들을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며 감독이 어떤식으로 사건들을 바라보는지 영화가 준 인상을 통해 내 생각을 서술하고자 한다.
근데 너 혁명은 왜 했던거냐?
영화속에서 이 질문은, 내 기억이 맞다면, 총 세번 나온다. 박용각이 김규평에게 원고를 건네주며 한번. 김규평이 친구를 그리며 홀로 되새길때 두번. 그리고 마지막 김규평이 박통에게 정면으로 질의하면서 세번. 영화의 메시지는 자유로운 형식의 질문을 통해 형성되어 그 답을 통해 방점을 찍는다. 따라서 감독의 생각이나 의도는 답을 통해 나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럼 이 질문들의 답은 총 몇번 나왔는가? 재밌는건 한번도 그 누구도 이에 대답한적이 없다. 박용각은 답을 타인에게 미뤘고, 김규평은 혼자서 폼이나 잡다가 슬쩍 외면했으며 박통은 그 질문에 잠시 동요하다가 증오가 서린 눈으로 응시했다. 다시말해 박용각은 아둔했고, 김규평은 겁에질려 외면했으며 오직 박통만이 그 질문에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것 처럼 잠시 동요하긴 했으나 오만함이 그 동요를 잠재우고 증오로 응수 한 것이다. 이를통해 분명히 영화는 그들 누구도 혁명에 대해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인물들임을 못박고 있다. 사건의 핵심에 대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메인이벤트 주인공이 존재할 수 있을까? 특히나 이 이야기를 영웅의 서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엔 그럴 수 있다. 초반에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며 고난을 겪고 이후 사건이 진행되면서 깨달음을 얻고 마지막에 답을 내놓는것이 영웅 서사의 정형일 것이다. 혹은 어느 그리스 비극처럼 끝내 답을 하지 못했다 손 치더라도, 그의 답을 위한 여정과 모험은 우리에게 감흥을 줄 만큼 아름답고 숭고하며, 담대해야하는 성질을 지녀야 마땅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와같은 모험을 ”희생” 이라고 부른다. 이쯤에서 나는 세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첫째, 홧김에 “희생”하는 영웅을 본적 있는가?
둘째, 비무장의 사람들을 기습하고 그들이 흘린피에 넘어져 머리가 헝클어진 영웅을 본 적 있는가?
셋째,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영웅을 본적 있는가?
태초에 박용각이 있었다
친구가 보낸 암살자의 총에 최후를 맞이할때 과연 박용각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 씨발…” 같은 단말마보다 더 깊은 생각은 하지 못했을것이다. 극 중 박용각이라는 인물이 그런 인물로 묘사되어왔으니까. 친구가, 남들이 하자고 해서 “혁명”에 가담했으며 각하가 하라고 해서 사람을 고문했고 그분이 화를 내니 개처럼 기던 인물, 그게 박용각의 진짜 모습이다. 미 하원의회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것은 박용각의 포장지일 뿐이다. 내가 이런 인물에게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김규평의 암살의 시작이 그의 허무맹랑하고 허술했던 야망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허접한 이 계기가 시사하는 바는- 나는 이렇게 바라본다 -모든 영웅 서사는 영웅의 탄생 혹은 각성의 시작에 상당히 무게를 두는 법이다. ‘데우스 액스 마키나’로써 이야기가 시작될 수는 있어도 메인 이벤트의 계기만큼은 반드시 큰 의미를 두고 필연적으로 벌어진다. 만약 어느 극속 주인공이 알고보니 보잘 것 없는 계기를 혼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 사건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과연 영웅이야기라고 누가 부를 수 있을까? 부조리극 냄새나는 그런 서사에 영웅이라니. 비웃음이나 안사면 다행이다- 아니, 비웃으라고 만든 부조리극에 비웃음이 빠지면 실패한거 아닌가?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재밌게도, 상당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가 될 수 있는데 가령 <쿵푸허슬>처럼 보잘것 없던 계기인줄 알았던 것이 영웅의 각성과 함께 거대한 의미를 지녔던 것임이 실체화되어서 나타나는 경우들이다. 그 영화는 분명히 영웅서사이다. 그리고 그와 반대에 서있는 <남산의 부장들>은 자연스레 반대의 답을 가진다. 이 추론과정이 내놓는 답은 하나다. 이 극 속에 영웅은 없다.
김규평은 희생하지 않았다
‘혁명의 배신자’ 박용각 회고록의 제목이자 김규평이 박통을 암살할때 선언한 그의 죄목이기도 하다. “혁명의 배신자로 당신을 처단합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배신했다고 말하려면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봐야 하는것 아닐까. 영화를 거슬러 가보자. 앞서 말했다시피 영화속에서 그 누구도 혁명의 이유에 대해 답을 하지 못했으므로 관객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혁명”이 무엇인지 파악해야만 한다. 박용각의 저서 속 혁명이란 의전사열에서 지도자에게 샴페인을 받고, 그의 이름을 빌려 무고한자를 고문하는것. 이를 칭찬하는 지도자에게 자랑스럽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것- 칭찬뒤에 어떤말이 이어질지도 모르면서… 이래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 주인에게 버림받는 순간에도 낑낑대며 애교를 부리던 것. 이것들이 그가 보여준 혁명의 실체이다. 김규평의 혁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총탄이 날아오는 한강다리를 “사나이 가는길 그 어찌 태풍이 막지 않을쏘냐”라며 당당하게 걷는것, 국격이란 이름으로 곽중령같은 저열한 자를 용납하지 않는것, 지도자를 위해 친구를 죽이고 이름모를 프랑스 농장의 퇴비로 쓰는것, 이런것을 인격이란 이름으로 고뇌하며 폼잡는것.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 모든걸 꿰뚫어보고 가장 아픈곳을 후벼파는 사람을 흥분에 찬 상태로 죽여버리는것. 이것이 김규평이 보여준 혁명의 모습이다. (나는 김규평이 정의을 위해 야당 총재를 석방하고 대화로 풀자는 유화책을 제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액트 오브 킬링>을 선언하는 경호실장과는 결이 달랐을 뿐이고, 그의 방식대로 지도자에게 충성했을뿐이다. 곽상천과 김규평은 춤사위만 달랐을 뿐 춤을 추는곳, 춤을 헌정한 대상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 흘려 죽어간 무덤 위, 그들을 죽인 독재자에게로 둘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정치가 원래 그런 춤판이라고 말한다면 더이상 할말은 없다) 그중에서도 나는 각각 마지막의 모습들에 주목을 한다. 그 모습들은 각각 박용각과 김규평의 가장 약하면서 꾸밈없는 맨살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이 둘은 스스로를 혁명이라 여겼던 것이며 그 혁명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공격당하자 그들이 자기기만하며 쌓아왔던 모든 명분들, 포장들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그 폐허속에서 자신들이 왜 혁명을 시작했는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쉽게말해 김규평이 말한 혁명의 배신자란 자기자신에대한 배신이다. 이런 김규평이 자신이 곧 국가라 믿었던 오만한 박통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김규평 또한 오만하기 짝이없었으나 박통보다 약했으며 박용각과 같이 자기자신을 혁명 그자체라고 믿었고, 그 믿음에 배신당했지만 그와는달리 타겟이 유효사거리안에 있었을 뿐이다. 유효사거리에 있으면 쏘고, 아님 말고 하는 희생이 세상에 어디있는가.악인을 무찌르고 그들이 흘린 더러운 피에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영웅을 본 적 있는가. 숭고한 희생을 다 치루고도 자기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 헤메던 영웅? 더이상 말하기도 입아프다. 목적(지)을 모르면 동기란 없는것이며, 강한 동기의식없이 그어떤 희생도 없다.
전두혁의 크고 냄새나는 더플백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다. ‘박통은 왜 돈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박용각에게 끊임없이 착복한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것에서부터 금고속 금괴들과 스위스 은행 거래증서들까지. 도대체 그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하는것들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단순히 박통이란 캐릭터를 배금주의자로 묘사하기위해 꼬집은 설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므로 벌어진 모든 사건을 정해진 시간동안 반드시 다 다뤄야한다는 제한을 두고있다. 그리고 이와같은 제한속에서 캐릭터들의 성격을 강하게 묘사하는것은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어느 인물은 병풍으로 전락하고 중심인물이 일으키는 메인이벤트의 회오리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그저 “으악”만 외치는 재연캐릭터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속에서 ‘돈’이란 표현하기 어려운 무형의 성질 ‘권력’을 대유하는 상징과도 같았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엔딩에서 전두혁이 한마리의 쥐새끼가 되어 금고를 털던 것과 일맥상통하다. 나는 그 장면이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허구적인 영화속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 평화로운 가정에서조차 가장이 돈을 많이벌면 권위- 대충 권력의 밝은모습이라고 이해하자 -가 서지만 그렇지 못하면 쭈그러든다. 죄짓지않고 살아가는 시민들의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이 법칙이 권력의 링 위에서 어찌 해당되지 않을까. 돈을 탐하는 박통과 전두혁의 모습은 권력에 미처버린 정치인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전두혁이란 캐릭터가 창조되는데 영감을 준 현실 속 ‘전두환’이 더플맥을 매고 금고를 털었는지 알 지 못한다. 영원히 알지 못할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영화속에서 가장 허구의, 판타지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판타지적 묘사 이후 다시 등장하는것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합수단 조사 발표인데, 나는 이것이 역순의 논리구조를 가지고 감독의 판타지를 강조한 시퀀스라고 생각한다. 즉, 보통은 근거 이후 결론을 말하는것이 보편적이며 약간의 허구를 가미해 사실의 주장을 보강하는것이 일반적인반면 감독은 결론을 말하고 근거를 내세운 것이다. 따라서 더플백의 전두혁이 감독의 논지이며 합수단의 전두환이 그 논거가 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감독이 전두혁 만큼은 아주 확고한 시각으로 그려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 영화에 특정한 견해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특정한 견해를 가진다는것은 종종 편향되었다는 말과 동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편향됨을 지적하려거든 무엇으로부터 편향되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내 시각일 뿐이다.
그놈들의 목소리
일부 사람들은 김재규의 최후변론이 맨 마지막에 나왔으니 이게 영화가 진짜 하고싶었던 말 아니냐고 묻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되묻는다. 대체 영화를 본게 맞느냐고. 이 영화를 다 보고난 이후 내가 들은 그의 변론에서는 판사와 주변 참관인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떠는 김재규가 느껴진다. 말꼬리를 끌고 쓸데없는 연결사들을 이어가며 ‘아무쪼록’ ‘어쨌든’ 등등 신념에 가득차있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결코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방점은 최대한 예쁘게 찍어야겠고,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어서 벗어는 나고싶은 자의 덜덜 떨리는 다리와 쥐어뜯는 손톱이 보인다. 반대로 합수단의 조사를 발표하는 전두환의 목소리에서는 강력한 자신감과 의지가 엿보이며 ‘이 발표가 곧 진실’이라는듯 우렁차다- 어찌 그 발표의 전부가 진실이었겠는가. 혹은 감춰진것과 왜곡된 사실들이 왜 없겠나- 만약 이 둘이 전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니까 제3의 진실이 있고 그것이 영화속에 나온 복잡한 인물들의 감정이 만든 드라마였음을 진실로 상정해보자. 그렇다면 그와같은 목소리가 주는 인상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내 생각엔 아마 한쪽은 포위되어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있었고 다른 한쪽은 ‘절대 들킬일 없다’는 자신감속에서 말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둘 목소리가 자아내는 인상차의 원인은 아닐까. 반대로 둘다 진실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가정은 이미 위에서 논증된바 있는 전두혁에대한 감독의 메시지와 정반대로 상충되므로 성립조차 할 수 없다. 한사람은 거짓, 한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전형적인 진실게임 아니냐고? 나는 진실이 그렇게 무자르듯 흑백으로 나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전두혁과 김규평은 둘다 영웅이거나 둘다 악인이어야한다. 동시에 나는 전자가 아님을 밝혀냈다고 확신하므로 내가 생각하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속 김규평은 악인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악인도 가끔 눈물을 흘린다는걸 세삼 느낀다. 김재규가 삶의 중간 중간 자신을 낭만화하며, 무책임하게 과오를 잊고 정의에대한 충동에 흔들렸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가 행한 행동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행동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니까. 영원할 것 같던 한 시대는 끝이 났고, 남은 사람들은 그 시대가 머문 자리를 치워야 한다. 그런데,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것은 잘 된일 아니냐고? 그러니까 그게 정의 아니냐고? 나는 이 질문에대해 야수의 심정으로 대답을 유보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