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배반
영화를 보려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답답했던 내 삶에서 다시 한번, 사치를 부리는 것 마냥 도망치고 싶었다. 나이가 들며 느끼는 것은 어릴적에는 도망치는것이 주어진 권리였고 당연히 존재하는 옵션이었으나 이젠 도망치는것도 힘이 든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시스템, 돈. 모든 것들이 나를 애워 싸 못가게 막으려한다. 그럼에도 나는 나에게 남은 모든것들을 끌어모아 가방에 담고 도망을 쳤다. 비록 도망친 땅에 꽃이 피지 않으리란 것은 잘 알지만, 적어도 내가 돌아온 한국 땅에서 나를 반겨줄 고요한 눈발을 기대하며 나는 북아메리카로 왔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영화 <펄>을 만났다. 나는 감독 “Ti West[타이 웨스트]”의 전작을 보지 않았고 이것이 어떤식으로 전작 <X>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채로 관람했으며, 또, 호러 영화의 매니아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느낀 바로는, 이 작품은 화려한 클럽에서 유행하는 유명한 클래식 재즈 및 월드뮤직의 인트로, 훅, 엔딩 시퀀스의 샘플링을 범벅으로 발라놓은 치즈마라 트러플 불닭면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힙합씬을 좋아하는 나는, 종종 오리지널리티를 잊을 채로 좋은 샘플링에 혈안이 된 아티스트들에 대한 기사를 발견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늘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힙합에서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아티스트의 생각을 담은 가사가 가장 첫번째 일 것이다. 다른 음악 장르와 달리 랩이란 라임스킴과 워드플레이만 있다면 드럼비트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명곡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MF DOOM의 많은 곡들이 샘플링보단 이런식으로 만들어졌고 그를 널리 알린 곡들은 그 위에 훌륭한 샘플링과 프로듀싱이 덧대어져 탄생했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마쥬를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사용하는 현업 감독중 하나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링컨 레터”라는 핵융합 원자로 급의 동력으로 <헤이트풀 8>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와 힙합이 다른 것 중 하나는 래퍼는 자신의 인생과 생각을 가감없이 곡에 담을 수 있어야 하나, 영화 감독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이야기로 꾸미고 가장하고 그것을 두 시간 ~ 두 시간 반 가까이 끌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작품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단편영화에서는 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감독이 많은 반면 장편영화에선 그런 감독들이 외면받는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작품 <펄>에는 이런 동력이 없다. 제 아무리 장르의 특성으로 합리화 한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작품이 가진 특성만을 바라보는 외눈박이로서 작품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며 이 작품을 호평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 역시 자신의 갈증을 다른 작품으로 해소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슬래셔 무비란 보는 내내 관객을 살육의 판타지 세계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는 장르라고 알고 있다. 만약 장르의 법칙만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며, 매니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그렇다면 더욱 제법 실망스럽지 않은가? 이 작품은 스스로 내세운 기치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작품은 너무도 뻔히 예상되는 <오즈의 마법사>에의 오마쥬로 시작된다. 헛간의 문을 열고 바라본 언덕 위 목장 한 가운데 있는 세트장, 혹은 집, 은 앞으로 다가올 비극을 천편일률적이고 피상적인 고급 포장지로 덧 대어 보여준다. 이후부터 영화는 캐릭터보단 “Mia Goth[미아 고스]”에 촛점을 맞추고 진행된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망상과 살인, 행동, 세트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 모든것들이 예상가능한 비정상의 범주에 있으며 이는 마치 어른이 치기어린 일탈을 벗삼으며 엇나가지만 뚜렷하게 다 보이는 “나에게 좀 더 관심을 보여 주세요”의 속마음을 간직한 어린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펄>은 성인 관람 등급으로 성인들이 완전하게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디즈니”의 판타지도 아니며 그들의 인생에 깊게 서리고 패여 있는 불쾌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어린 청소년 “Emo kids(고스족)”들의 어설픈 일탈을 훌륭한 배우 “미아 고스”의 개인전처럼 담아낸 영화인 셈이다. 이것은 분명 감독의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헛 된 결과이며, 부족한 성찰이 야기한 미완성의 결론이다.
<펄>은 앞서 말한 대로 50년대 고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튜에 미아 고스 진액을 넣고 온 갖 트렌디하고 가벼운 소스들을 한 데 섞은 술집용 안주에 지나지 않은 영화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호러도, 스릴러도 그렇다고 어떤 보석같은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을정도로 버무려진 그런 것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슬래셔 무비를 꼽는다면 “Rob Zombie[롭 좀비]” 감독의 “The devil’s rejects[살인마 가족]”을 말할 수 있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 영화는 자신의 장르에 가장 충실한 슬래셔 무비 중 하나이기 때문이며, 나는 이렇듯 특정 장르에 대한 배타성을 가지고 <펄>을 관람한 것은 아니라는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타성은 아닐지라도 무지에서 이 감상이 시작되었을 수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두고 있고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아는 것들을 통해 크로스체크하며 여전히 타당성을 검증하려고 시도한다.
롭 좀비 감독의 작품들은 대체로 대중과 평단 모두의 혹평을 받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의 작은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관객을 가둔다. 나는 그 안에서 마치 좁은 공간에 눌려 쾌감을 느끼는 바퀴벌레처럼 이미지와 음악을 만끽한다. 비록 이야기는 엉터리에 바보같지만, 그래서 탁월히 훌륭한 영화라고 말할 순 없지만, 특히 그의 작품 중 압권인 “Devil’s rejects”는 그 좁은 세계를 흥건히 음미할 만큼의 체취가 진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비슷한 기치를 내세우는 <펄> 역시 그러한 예상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롭 좀비의 영화를 보며 얼마 전 운명한 (故)시그 헤이드의 연기보단 미치광이 살인마 광대 캡틴 스팔딩과 찰스 맨슨을 떠올리게 하는 광기서린 오티스를 보기위함이다. 물론 당연히 매혹적이면서도 섬뜩한 베이비 플라이 역시 그의 영화에선 늘 기대가 된다.
이러한 영화들이 동화라고 한다면, 그 세계에선 우리가 그림 형제의 문체를 느끼기 보단 인물과 사건 그리고 그 모든것을 이끄는 동력, 알레고리에 감화되어지길 원하는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펄>에서 미아 고스가 아닌 “펄”의 이야기를 원했다. 그녀의 엔딩 크레딧에서 관객들을 압도하는 열광적인 독주가 펄의 독주이길 바랬다. 비극이 예견된 평화로운 목장에서 벌어지는 모든일들이 미아 고스가 아닌 펄의 입장에서 벌어지길 바랬다. 그러나,
“기대는 늘 배신하고, 뜻하지 않은 곳엔 행운이 놓여져있다. 다만 그것을 보지못해 밟고 지나갈 뿐이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내게 작품 <펄>은 기대에 대해 말하는것 같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전 늘 기대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돕기위해, 어떤 의도에서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기대를 증폭시키고자 노력을 한다. 그것이 트레일러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영화의 퀄리티를 논하기전에, 내가 돌아갈 한국에 대한 기대와 타이 웨스트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어긋났던 것을 먼저 논해야 될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글이 너무도 짧고 가벼워 그것들을 다 담을 수 있을지 우려가 됐다.
그럼에도 한가지만은 이야기하고 이 글을 끝마치고 싶다. 관객에게 너무도 현란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기대하게 만드는 그 모든것들은 늘 배신하며, 그것은 결코 심리적 요인에서 야기하는 현상은 아닐것이다. 우리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것만 듣는다며 모든것을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인생엔 보기싫고 듣기싫음에도 보고 들어야 하는것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정답없는 뜬구름 잡는 논의보단 나는 좀 더 의미있는 논의를 하고 싶었다.
작품 <펄>은 현란한 영상기술과 연기로 스스로를 과장되게 어필했음이 분명하다. 나는 그 기대에 속았고 국내에서 개봉하게되는 날에 많은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내 예상이며, 바램은 아니다. 내 바램은 내가 틀렸고, 그냥 내 상황이 이 작품과 맞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배신없는 기대를 바라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그러므로 돌아온 고국에서 나를 기다릴 눈발이 조금은 따뜻하고 시원하길 기대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