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속에 그 기억 - 김남석, 김두용 전》
| 장애 예술인 창작 공간 온그루 릴레이 전시 《리듬 속에 그 기억 - 김남석, 김두용 전》
부산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장애 예술인 창작 공간 온그루에서 열린 릴레이 전시, ‘교환 일기, 리듬 속에 그 기억’ 전은 김남석, 김두용 작가의 상상과 기억의 기록인 일련의 회화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이다. 가 본 적 없는 곳, 꿈에 그리던 장소에 관한 상상이 사각의 캔버스 위에 시각화된 이들의 전시는 반복되는 일상이 실은 설레는 긴장을 선사하는 굴곡진 리듬감을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기획되었다. 두 작가에게 캔버스는 좋았던 여행지이자 꿈 속의 공간, 알 수 없는 곳, 언젠가 만났던 사람 혹은 낯선 이, 매일 나를 보고 있는 내 모습 등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점과 공간을 아우르는 하나의 소우주이다. 이들은 아련한 기억과 상상을 넘나들며 그 속에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라는 하나의 특별한 여정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간과한다. 그 속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리듬이 존재한다. ‘커피와 담배(Coffee and Cigarettes)’, ‘다운 바이 로(Down by Law)’ 등의 운치 있는 흑백 영화로 유명한 짐 자무쉬(Jim Jarmusch) 감독의 최근 영화, 패터슨(Paterson)’을 보면 일상의 도처에 얼마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버스 운전 기사이자 시인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 패터슨은 매일 비슷한 것만 같은 차창 밖 도시 풍경을 보거나 매일 다르지 않은 것만 같은 승객들의 대화 내용을 들으며 일하고 퇴근 후면 매일 같은 산책로를 자신의 개와 걸으며 항상 가던 맥주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시곤 한다. 우리의 지루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는 짐 자무쉬 감독은 그러나 그 속에 있는 리듬감을 놓치지 않고 보여 준다. 패터슨의 개가 늘 가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그를 몰고 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틈틈이 시를 적어 놓았던 노트를 마구 찢어 버리는 사고를 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일본인 시인과의 짧은 대화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암시하며 고요한 듯 자질구레한 우리의 일상 속에 실은 드러나지 않는 크고 작은 울림을 주는 사물, 사건들이 존재함을, 세상은 실로 얼마나 놀라움으로 가득한 곳인지를 알려 준다. 지나가는 사람들, 크고 작은 빌딩, 역사책 속 인물, 인터넷에서 소개하는 도시, 희미한 기억 속의 인물이나 풍경 등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시각화한 김남석, 김두용 두 작가에게도 세상은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로 가득한 곳인 듯하다.
이들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이들이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다. 두 작가 모두 짧은 시어 속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던 영화 속 일본인 시인과 비슷하다. 어둠 속에서 말을 걸어 오는 듯한 인물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인물을 이루는 간결한 색, 뭉툭한 질감에서 화가의 거울이 느껴진다. 말과 말 사이의 쉼, 우리는 그것 역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요소임을, 어쩌면 말보다 더 큰 울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김남석, 김두용 두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그림과 매치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듯도 하지만 결과물로서의 그림은 그림 자체의 생명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동안의 시가 적힌 노트를 개가 다 찢어 놓았다고 말하지 않아도, 패터슨이 시인임을 알 리 없는 일본인 시인이 그에게 건네는 빈 노트처럼 두 작가의 그림은 참 많은 단서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김남석 작가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캔버스든, 대형 마트에서 가져온 박스 위든, 마음이 동할 때면 언제고 그림을 그린다. 수채, 아크릴 물감, 펜, 마카, 숯 등 여러 매체를 사용하는 작가는 섬세한 명암 표현을 통해 재현적인 화면을 구축하다가도 역동적인 선, 터치, 과감한 색의 사용 등이 돋보이는 평면적인 표현, 글씨를 이용해 화면을 완성하는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등 다양한 작업 방식을 선보인다. 도예를 배우기도 했던 작가는 투박한 머그컵 위에 다양한 인물을 그려 놓았다. 간결한 선으로 인물을 그릴 때 보통은 작가마다 굳어진 양식화된 표현을 쓰기 쉬운데 그 많은 컵의 인물들은 하나하나 달랐다. 눈이 큰 사람, 웃는 사람, 모자를 쓴 사람 등 서로 너무도 다른 인물들을 가득 그려 놓은 작가는 그들 대부분이 상상의 인물들이라고 설명한다. 자주 보는 이의 얼굴을 그리기 쉬울 법도 한데 인물들 모두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타난 것이라 이야기하는 작가는 동물을 그릴 때도 직접 기르며 아끼는 반려 동물보다는 실제의 모습을 알기 어려운 메머드, 공룡 등을 비롯한 멸종 동물, 킹콩, 히말라야 설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크로마뇽 인, 네안데르탈 인 등의 원시인을 그리거나 만든다고 했다.
지점토와 찰흙을 이용해 민무늬, 빗살무늬, 미송리식 토기나 가야 시대 찻잔, 동복, 조선의 청화백자 등을 만든다는 작가는 역사에 대한 지식 또한 해박하다. 노란색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안중근이 사용한 총을 상상하며 노랗게 채색한 총을 직접 만든 종이 상자 안에 넣는 등 다양한 오브제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지나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역사가 들려주는 것들 등이 김남석 작가의 머릿속에서 걸러지며 회화, 소조, 도예, 타이포그래피 등 정겨운 작가의 얼굴이 겹쳐진 다양한 작품으로 남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예술이라 말하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필터링 과정, 그것이 아마도 그처럼 여운 가득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요인일 것이다.
김두용 작가 또한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 왔는데, 주로 인물이 포함되기도 하는 풍경을 그리며 자신의 상상의 세계를 구체화한다. 그는 부산항 대교, ‘다이아몬드 브릿지’라 불리는 광안대교, 영화의 전당, 부산 타워 등 자신의 일상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부산의 명소들에서 보게 되는 사람들, 갈매기, 동백꽃 등을 그림의 소재로 사용한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 찾은 이미지를 보며 스페인, 헝가리 등에서 출장 온 외국인의 삶에 대해 상상하여 캔버스 위에 펼쳐 놓기도 한다. 따뜻한 봄날 혹은 12월의 크리스마스 등 계절마다 달리 하는 부산의 풍경에 대해 그는 ‘부산의 베네치아’, ‘부산의 홍콩’, ‘부산의 오다이바 공원’ 등으로 표현, 이국의 정취를 연상케 하며 작품을 설명한다. 주로 밝은 색들을 좋아한다는 작가는 화면 속을 다소 채도가 높은 색으로 채색하여 경쾌함을 더한다. 영화의 거리를 나타내는 ‘Film Memorial Street’, 일상적 공간인 ‘Easy Together Coffee Shop’ 등의 활자가 함께 그려진 그의 풍경화는 영화를 찍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의 머릿속 풍경인 듯 이상화하여 아기자기하고도 밀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의 경치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면서도 그의 이상화된 풍경화는 기억 속 언제나 밝고 역동적인 하나의 공간으로 상정되어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작가는 코로나로 인해 여행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에게 그림이란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이면서도 타인과의 교감을 위한 통로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 김두용 작가의 작품은 따뜻한 선물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풍경화의 기원은 감정에서 출발한 것,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자연의 기록이다(A landscape painting is essentially emotional in origin. It exists as a record of an effect in nature whose splendor has moved a human heart.).” 라는 영국계 캐나다 화가 월터 필립스(Walter J. Phillips)의 말을 그대로 이해하게 해 준, 공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다.
김남석, 김두용 두 작가는 “회화란 또 다른 일기장을 의미한다(Painting is just another way of keeping a diary).” 라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말처럼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충실히 캔버스에 담아 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세심한 관찰력으로 일상을 살아 내며 자신과 주변, 상상과 현실의 여러 요소를 리듬감 넘치는 회화로 풀어낸 이들의 작품은 근래에 본 어느 작품보다도 ‘예술이 예술이 되는 방식’, ‘예술가의 삶’ 등에 대해 솔직한 공감을 하게 해 준 작품이었다.
글 | 김윤경 (문화예술공간 리알티 대표, 독립 큐레이터)
자료 | 부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