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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J Sep 08. 2022

글을 써야만 했던 이유

죽고 싶지만, 살고 싶었다.

죽음의 순간은 과연 어떨까?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에 대하여 나는 항상 고민한다. 의식이 있는 한 숨이 끊어지는 순간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잠시만 숨을 참아도 그 기분을 얼핏 느껴볼 수 있다. 입을 열어도 더 이상 공기가 들어오지도, 나오지도 않을 때. 폐가 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안절부절못하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온몸을 지배하며 가슴을 짓누르는 기압에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아무리 우울해도 반가울 수가 있냐는 말이다.


이제 브런치의 작가로 정신병 일지를 써갈 나는 겉으로는 철저히 평범한 약대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간혹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의 일지를 읽으며 가족들이 걱정해주는 장면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낯설고는 한다. 가장 가까운 남자 친구 외에 나의 정신병 사실을 오픈한 적 없는 나는 홀로 조용히 죽고 사라져도 누구도 내가 왜 죽었는지 이해 못 하겠지 상상한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당장 나의 죽는 순간이 예정된다고 해도, 두렵기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생을 마감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살아 숨 쉬지 않는 세계, 무(無)로 돌아가는 일이 나는 두렵지 않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존하는 고통이다. 내 신경계가 온전하여 고층 건물에서 떨어지든 칼에 베이든 신체 손상의 소식을 전달하는 뉴런의 활동과 그것을 인지하는 의식이 있는 한 그 고통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 고통이 싫은 게 죽음이 싫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생명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온 뇌로 생생하게 느끼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내가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일까?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를 계속 반추하게 되는 것은 어느 날 자해를 하며 (이 단어는 너무나 노골적이며,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불쾌하게 하는 단어임을 안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명상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겠다)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코올 0%의 맨 정신에서 작은 커터칼이 피부를 긋고 긴 자취를 남길 때 그 금속의 소름 끼치는 감각이 너무도 섬뜩했다. 순식간에 긋고 지나간 자리가 무척이나 따가웠고,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 눈물방울도 가득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나, 죽고 싶지 않구나.'

불안과 서러움, 두려움과 우울 그리고 명확한 단어들로 정의되지 않는, 애매모호히 사람을 갈아먹는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담아 핏줄을 긋는 그 행위는 사실 정말,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을 깨우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것에 기반한 행위였던 것이다. 살고 싶어서, 숨 쉬고 싶어서, 정말 벗어나고 싶어서. '이런 나'가 죽고 다시 새롭게 살아가길 바라서.


도대체 사람은 왜 우울에 빠지는가. 그것은 정신적인 늪과 같아서, 관찰하려고 가까이 가면 어느새 깊숙이 나를 잠식하고 있어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애쓰며 힘을 줄수록 더 빠르게 헛디뎌 끌려간다. 찐득한 우울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숨이 가빠지고 가슴은 짓눌려 매 순간이 갑갑하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얼굴까지 빠져버릴까 봐 고개를 한껏 쳐들고 위태롭게 부들거린다. 잠시 의식을 돌려 빠져나온 것 같아도 작은 타격에도 다시 깊숙이 처박힌다. 더러운 벌레들이 자꾸만 모든 생각을 기어오르며 침범하고 이미 더러워진 내 속을 좀 먹는다. 우습게도 그 상황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살고 싶다,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인 것이다. 숨막힘과 위태로움, 목을 조여 오는 불안과 공포- 무엇이든 그것들에 대해 받아들이고 포기한다면 편할 텐데. 그러지 못해서 늪에 빠진 스스로를 혐오하고, 망가뜨리고 싶어 하며, 나갈 수 없음에 절망하고, 그 밑바닥이 더 있을까 두려워하며, 은밀하게 도움을 바란다. 누군가 지나가며 나를 찾아주기를, 나를 이해하고 바라봐주기를, 당겨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기에 더욱 불행해진다.


다시 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나는 죽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죽지 않기를 바라는가? 단순히 칼날이 몸에 닿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무서워서 인생을 일으켜보려는 의지를 갖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결국 나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찾고 싶을 때마다 명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늪을 탈출하기에는 역부족이라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고 만다. 사실 나는, 살아가려는 노력을 정말 많이 하고 있다. 정신과를 다니고, 약을 먹으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며,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노력이 헛되게 하는 한심한 짓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으며, 애써 만든 관계들은 술 먹고 많은 실수들로 망치고 있으며, 지금도 매 순간 열등과 자책은 나를 속부터 파먹어 껍데기뿐인 사람을 만들고 있다. 진정 나는 내가 망쳐놓은 이 모든 것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싶은가? 도피성이니 진심이 아니고, 비겁하다고 할지 몰라도 모든 걸 도망쳐 떠나버리고 끝내고 싶은 마음은 분명 실재한다. 그럼에도 왜 선택으로 이어지지 못하는가. 물리적인 아픔이 내재된 본능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은 본능대로만 살지 않으므로, 물론 그것을 이겨내고 죽음에 도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은, 나만을 다루는 글이므로. 어쨌건 죽는다면 그렇게 죽지는 못할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스러운 글이다. 그래서 결론이 뭔지, 나는 죽는 것인지 죽고 싶지 않은 것인지,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명확한 게 없는 글이다. 그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글을 쓰며 나의 추악한 생각과 감정을 덜어내고 그것이 덕지덕지 붙은 이 글을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이 마음 또한, 살고 싶어서 일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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