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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에 가정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그냥 행복한 가족이길 바랬을 뿐인데

어린 시절 한 5살쯤 되었을 땐가 우리 동네 시장 정육점을 크게 하고 있던 집에 내 또래인지 유치원을 다니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동네에서 4 살인가부터 한글뿐 아니라 한자까지 알아 조간신문을 읽어서 천재라는 얘기를 듣던 내가 00교회 유치원 교복은 저렇구나.


반바지에 하얀 타이즈와 하얀 폴라티에 조끼를 입고 노란 모자를 쓴  그 집으로 아이가 그 큰 대문을 드나들어 얼핏 보이는  마당 깊은 집이 저 아이 집이구나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 집에서 부부싸움 소리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남편이 오디오를 던지면 부인은 티브이를 던졌고 그릇 냄비로 시작했다 값나가는 큰 물건들이 마당에 경쟁적으로 쌓이고 있으니 실시간 구경하기엔 재밌었나 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런 거래요? 그러니까 여자가 맞았다고 저런단다. 저 여자 기가 너무 쎄다. 저러니 맞고 산다. 뭔가 이유가 있으니 그런 거지. 맞고 사는 여자는 3일 안에 맞을 짓만 하니까 맞는 거라거나 어설프게 맞아서 저런단 얘기를 들었다.


난 몰려든 사람들에 비해 키도 많이 작았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하얀 진돗개를 안고 있었어서 사람들 다리 사이에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때린다는 말과 그것이 여자가 잘못해서 맞는다는 식의 말을 처음 들었기에 그 어린 나이에도 엄청 강렬했나 보다.


왜냐하면 나는 그 당시 엄청 큰 소리로 울고 있는 그 여자아이의 방치가 마음에 쓰였었고 강아지 자랑하러 예쁜 치마 입고 밖에 나왔다가 새로운 상황이 혼란스럽고 충격적이기도 했었나 보다.


그리고 나는 학교 졸업반이 되자마자 국책은행에 취업이 되었고 시아버지가 나서서 은행 근무 후 미국 유학을 갈 예정이란 얘긴 지금의 남편에게 듣고 같이 유학 가서 공부 열심히 하면 내가 다 지원해주겠다고 결혼을 서두르는 통에 얼레벌레 신부 입장을 하게 되었다.


왜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혼>이란 것을 그렇게 선택했냐고 나를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첫사랑 첫 남자와 헤어지는 관계를 몰랐고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내게 유학 가면 알아서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터에 시아버지가 찾아와서 진행을 하는 바람에 거절을 못하던 나는 그렇게 큰 불구덩이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시아버지는 지병이 있었고 맏아들인 내외가 곁에 있어주길 바랬고 IMF로 사회는 혼란기에 있었다. 시카고 대학원을 포기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시아버지를 챙기고 한평생 골골거린다고 약해서 시아버지를 챙길 수 없다는 이 가정이 내가 믿는 종교에 나를 예비하심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강남에 아파트와 상가가 많다더니 당장 옆 원룸에서 우리가 살기도 비좁은 공간에서 매일 서초동 삼풍아파트 최고 평수를 방문하는 동안 일하던 아줌마는 나가고 25세 나는 해보지도 않은 집안일을 퇴근 후에 하곤 다시 원룸에서 잠을 자야 했다.


결혼하면서 퇴사를 한 뒤 남편은 사업구상을 한다며 빈둥거렸지만 당시엔 유학을 못 가서 자리를 못 잡는 건가 싶었지만 난 사회 초년생으로 직장일도 해내야 하는데 그 큰 시댁 집을 치우고 식사며 병원 다니는 일정까지 챙기다 보면 기운이 다 빠졌다.  


밤마다 귀찮게 하니 죽고 싶은 마음에 또래 누구도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말할 상대도 없었다. 내가 버는 돈이 장보고 관리비 내는 등의 생활비로 나가고 80년대부터 카리브해 세계 부자들만 다니는 크루즈를 다니며 미국 일주 등 유럽을 내 집처럼 다니실 때는 시어머니는 아프단 말이 없었다.ㅡ


시아버지는 서울에 소문난 7 공자급으로 당대 최고 미인이라는 학교 막 졸업한 시어머니와 결혼했고 큰 집에서 세계 여행을 하는 식의 부를 과시했다.


강남의 어느 성당을 지을 때도 돈을 많이 기부해서 밖에서 볼 때는 배울만큼 배운 최고의 학력과 외모로 시어머니의 당시 가장 큰 각 그랜저를 몰고 시아버님도 늘 최고 자동차를 몰고 시계를 차는 식으로 이 가정엔 부족함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자신이 당뇨 등의 온갖 지병으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폭력적이었다. 신체적, 정서적, 언어적 폭력 이외의 경제적인 부분도 다 내게 짊어지게 했다.


시어머니는 사고 싶은 것을 사는 요즘 쇼핑중독식의 태도로 그 폭력 속에서 나도 아프다며 도망칠 때 그 화살은 내게 왔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라니.. 아무 이유도 아닌 것을 트집 잡고 말도 안 되는 것들로 화를 내며 다 내 잘못이라고 할 때 시어머니는 얼씨구나 자신도 피해자임에도 그 화살을 내게 쏟아대는 나는 피라미드 가장 밑단계에서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이런 상황을 외부에 드러내진 않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남편도 좀 잘하란 식으로 내가 잘못 인양 몰아세웠다.


지금도 가스 라이팅 당하고 있다. 폭력적인 사람은 약자에게 악랄한 사람이며 좀 더 나아가 본인의 폭력행사로 자신이 권위가 있는 줄 침묵을 통제인 양 착각하는데 나는 인격적으로 그를 위해 기도만 하고 있었다.


내 외모와 내 학력과 내 배경에서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당한 적이 없던 그 가정폭력이란 단어는 내가 매 순간 잘 지내보고 싶은 이 가족 안에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내 선한 마음을 끊임없이 갈아먹으며 힘을 키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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