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타 Aug 23. 2021

혼자라는 즐거움

결혼 전 마지막 여행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큰일이다. 한 번 나갔다 왔더니 엉덩이가 계속 들썩거렸다. TV에 나오는 축구선수들이 나를 향해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아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 직접 느꼈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현장감이 계속 피부에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직접 가본 경기장들이 TV에 나올 때마다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졌다. 아, 저곳은 내가 가본 곳이지. 에헴. 

그렇게 자취방에 홀로 앉아 이상과 현실을 착각하며 거의 TV 속으로 빨려 들어가 즐거웠던 그 때를 회상하던 찰나, Y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분명 지금 나처럼 새벽잠을 설치며 유럽 축구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 방금 그 골 봤냐?”

“네, 저런 장면은 직접 가서 봐야 하는데 말이죠.” 

“또 다녀오면 되지. 너 결혼하면 절대 혼자 축구 보러 유럽 못 간다. 내가 결혼만 안 했어도 시간 날 때마다 여행 다녔어, 진짜. 나중에 결혼하고 후회하지 마라.”

“결혼하고 나서도 가면 되잖아요.”

“장난쳐? 일단 결혼하면 혼자는 절대 못 간다고 보면 돼. 그리고 같이 가더라도 일정 잡는 것이 쉬운 일이냐? 그리고 너가 혼자 여행 갈 때처럼 호스텔 같은 곳에서 잘 것 같니? 적어도 호텔은 잡아야 할 것 아니야. 먹는 것부터 비용도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는 들거야. 결혼하면 모든 것이 복잡해져. 그리고 양쪽 부모님 눈치도 봐야 할 걸?”


아마도 Y형님은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수화기 너머로 열변을 토하는 Y형님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기운이 느껴졌고 목에는 굵은 핏줄이 터질 듯 튀어나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결혼 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나도 결혼하면 곧 저렇게 되겠구나.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혼자 있을 때 즐겨.”


정말 주옥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번 다녀왔으니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래, 이럴 시간이 없다. 바로 달력을 펴고 유로대회가 열릴 프랑스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아직은 혼자가 좋다.


이런···.  자리를 잘못 잡았다. 평소 폐소공포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경미한 ‘폐소답답증’이 있는 나는 버스나 지하철, 심지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도 복도가 연결되어 있는 제일 끝자리를 선호한다. 양옆에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는 상황이 몹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비행기 좌석 또한 복도에 혼자 앉는 자리를 예매했는데 불행하게도 나의 옆에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추측되는 커플이 앉게 되었다.


“오빠, 우리 진짜 결혼한 거 맞지? 나 실감이 안 나.”

“응, 우린 이제 부부야. 이제 여보라고 부르자.”

“아잉, 몰라. 어색해.”

“사랑해, 여봉.”

“나둥.”


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글거림이 엄지 발가락부터 서서히 올라와 손가락 마디를 지나는 순간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정녕 파리까지 이것들과 12시간을 함께 해야 한단 말인가? 다음부터는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차라리 가운데 자리를 예매하리라. 가운데 끼여 앉는 것이 조금은 답답할지 몰라도 정신건강에는 더 좋을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이어폰으로 귀를 꽉 틀어막고 담요를 가슴에 덮은 채 깊은 잠에 빠지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계속 꼼지락거리는 모션이 감지되었다. 옆을 돌아보니 둘이서 담요 하나를 머리 끝까지 덮은 채 무슨 생산적인 활동이라도 하는 것인지 계속 꼼지락거리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담요 속에서 쭈쭈바라도 빨아먹는 것인지 쪽쪽거리는 소리와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이어폰으로 틀어막은 나의 귓속을 파고 들어왔다.


하···.  도착할 때까지 쪽쪽거리지 못하게 인중을 약 80대 정도 후려치고 싶었다. 침착하자. 축구만 생각하자. 난 결혼해도 절대 안 저래야지.



혼자라서 외롭다. 


“혼자 오셨어요? 저희 사진 좀 찍어 주시겠어요?” 


파리에 왔으니 에펠탑은 가 보아야겠다는 의무감에 찾은 샹드마르스 공원은 거의 커플 화보 촬영지였다. 혼자서 우두커니 서있는 나의 모습이 분명 만만해 보였으리라. 사진 좀 찍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왜 이리도 많단 말인가.

에펠탑 앞에서 서로 하트를 만들어서 사진 찍는 무리들, 입을 크게 벌려 에펠탑을 잡아먹는 설정 샷을 찍는 무리들, 뽀뽀를 하며 애정 샷을 찍는 무리들까지 정말 다양했다. 혹시, 이곳에 비행기에서 만난 신혼 부부도 있지 않을까? 사진 좀 찍어 달라는 커플들을 일일이 상대해 준 나는 셀카봉으로 인증샷만 몇 장 남긴 채 웨일즈와 북아일랜드와의 유로 16강전을 보기 위해 파르크 데 프랭스 축구장으로 향했다. 


“이것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What? 이건 그냥 사진 찍을 때 쓰는 셀카봉인데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위험해요.”

“이것이 왜 위험하죠?”


파르크 데 프랭스에 도착해 가방검사를 하는 도중 셀카봉을 압수당했다. 도대체 셀카봉이 왜 위험하다는 거지? 내가 이 셀카봉으로 누굴 때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애인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커플처럼 공항에서부터 셀카봉을 손에서 놓지 않고 꼭 쥐고 왔는데···.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덩치가 산만한 보안요원으로부터 나의 셀카봉을 지켜 낼 자신이 없었다. 셀카봉으로 보안요원의 정수리를 한 대 후려치면서 이게 그렇게 아픈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경기도 보지 못한 채 쫓겨날 수 있기에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나는 곁에 있는 친구처럼 나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던 셀카봉과 하루만에 이별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달리 팔이 짧아 혼자 사진 찍기도 힘든 나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경기장에 입장하자 나의 자리에 웬 금발의 꼬마가 한 명 앉아 있었다. 내가 자리를 잘못 찾은 것인가? 분명히 지정석인데 이 아이는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말을 해도 알아들어 먹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확인해도 내 자리가 맞다. 셀카봉을 떠나보낸 슬픔과 분노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작은 금발의 꼬마가 나의 신경을 또 한 번 자극시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왜 보안요원에게는 찍소리도 못했으면서 이 꼬마 앞에서는 왜 이렇게 에너지가 넘쳐나는 것일까?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나의 찌질함이 부끄러워질 때쯤 겨우 이성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꼬마에게 물었다. 


“Hello, 여기 네 자리 맞니?”

“Sorry, He is my son.”


옆자리에 있던 키 큰 중년의 남자가 황급히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마치 데이비드 베컴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무척이나 멋있고 강하면서 잰틀해 보였던 남자는 아이와 함께 축구를 보러 왔는데 붙어 있는 좌석 예매가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여기 앉아 있었다며 아주 공손하게 사과를 했다. 휴···.  순간 아이에게 화라도 냈으면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남자는 아이를 목에 태워 경기를 보면 된다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Where are you from?”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오! 그렇군요. 저는 웨일즈에서 왔어요. 아들이랑 저랑 모두 축구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부럽다. 파리까지 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커플들은 전혀 부럽지 않았지만 아들과 함께 축구를 보기 위해 여행을 왔다는 이 남자는 정말이지 너무 부러웠다. 

남자는 경기를 보는 내내 아이와 대화를 했다. 


“아빠, 지금 누가 이기고 있어?”

“아빠, 저 선수 이름이 뭐야?”

“아빠, 저건 왜 반칙이야?”


‘그냥 조용히 봐, 귀찮게 그만 좀 물어. 짜증나니까.’라고 대답할 법도 한데 남자는 아이의 질문에 매번 눈을 마주치며 정성 들여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아···.  저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아름다웠다. 키 크고 얼굴 작은 금발의 훈남 아빠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이의 대화라서 그런지 그 또한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평소 감수성이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나에게 이런 감동을 주다니. 

남자와 아이는 좋아하는 선수가 공을 잡으면 같이 소리 치고, 찬스가 아깝게 무산되면 함께 아쉬워했다. 그리고 웨일즈의 골이 들어 가는 순간 아이는 두 팔을 벌려 환호했고 남자는 아이를 목에 태운 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두 사람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비행기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어느 순간 밀려왔다. 


결혼하면 축구 여행은 꿈도 꾸지 마라던 Y형님의 이야기는 그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옆에서 아이와 함께 폴짝폴짝 뛰고 있는 이 남자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더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경기는 웨일즈의 승리로 끝이 났고 관중석에서 승리의 댄스를 추는 그때, 웨일즈의 에이스 가레스 베일이 딸을 그라운드에 데리고 나와 함께 뛰며 팬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평소 ‘딸바보’라고 알려져 있던 베일의 딸을 여기까지 와서 보게 되다니···.  악, 너무 귀엽군.


아···.  갑자기 결혼이 하고 싶네. 쩝···.

작가의 이전글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