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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타 Sep 11. 2021

잘 키운 여자 축구, 열 남자 축구 안 부럽다.

WK리그 관전기

백문이 불여일견

 

“윤경, 오늘 퇴근하고 뭐해? 한잔 할래?”

“오늘 저녁에 축구 보러 가는데요.”

“그 놈의 축구···.”


맛집과 술이 있는 곳이라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K형님이 오늘도 한잔의 유혹을 날리지만 정중하게 거절을 하였다. 나 역시 술이라면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이라 우리는 자주 저녁을 함께 불태우곤 하지만 가끔 축구를 보러 간다고 거절할 때면 어떻게 축구가 술보다 좋을 수 있냐며 원망의 눈빛을 보낸다. 나라고 왜 그 맛있는 술을 거절하고 싶겠냐마는 술은 정해진 시간 없이 마실 수 있지만 축구는 정해진 시간에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지 말고 지난번처럼 축구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서 한잔하면 되잖아. 더운 날 왜 경기장까지 가서 사서 고생을 해? 시원한 맥주 한잔하면서 축구 보자. 축구는 자고로 치킨집에서 봐야지. 꼭 직접 가서 봐야해?”


그렇다. 나처럼 직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축구를 꼭 경기장에 가서 봐야 하냐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월드컵이나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다 같이 치킨집에 모여 맥주를 즐기는 그 맛도 이루어 말할 수 없음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치맥과 축구의 조합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부터는 마치 먹을 것이 없으면 축구를 못 보는 것처럼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맥주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치킨 관련 주식이 오를 정도니 말이다.


“안돼요. 오늘 TV 중계도 안 해준단 말이에요.”

“어디로 가는데?”

“효창 운동장이요.”

“장난해? 거기 K리그 하는 곳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거든?”

“K리그 말고요. WK리그 보러 가요. 여자 축구요.”

“뭐? 여자 축구를 보러 간다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K형님의 목소리는 태어나서 여자 축구를 보러 축구장에 간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는 듯 당황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런 K형님의 반응이 익숙했다. 퇴근 후 축구를 보러 다니다 보면 이런 반응이야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일 저녁 남자 축구를 보러 간다고 해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여자 축구의 매력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때로는 여자 축구가 남자 축구보다 몇 배는 재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직접 가서 보자고 하지 않는 한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을까? 


사실 대한민국의 여자 축구를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 경기 때나 TV로 시청했으면 모를까 평소에 직접 찾아다니지 않으면 쉽게 접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프로야구와 지구 반대편 해외 축구의 인기에 밀려 K리그도 중계방송으로 볼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마당에 WK리그를 어떻게 접할 수 있겠는가. 어쩌다 한번 스포츠 뉴스에 WK리그의 소식이 나오면 ‘아, 우리나라에도 여자 축구 리그가 있구나.’하는 정도로만 확인할 수 있는게 현실이다.


“형님, 그러면 오늘 저랑 한번 갑시다. 축구 보고 축구장 앞에서 한잔해요.”

“여자 축구 보러 거기까지 가자고?”

“형님이 안 가보셔서 그래요.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가봅시다. 진짜 재밌어요. 오늘 현대제철 이민아도 온단 말예요.”

“이민아가 누군데?”

“아···. 이민아를 모르다니···. 지소연은 알죠?”

“들어본 것 같은데···. 아무튼 축구장은 안 가.”


내가 술을 거절했 듯 K형님은 축구장을 거절했다. 직접 가서 보면 분명 재미있을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즐기는 문화를 만들고, 나아가 대한민국 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힘든 첫 번째 일이 바로 축구에 관심 없는 지인을 축구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평소 TV로도 잘 챙겨 보지 않는 축구를 직접 가서 보기 위해선 큰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윤경! 오늘 같이 가자. 가보고 싶어!”

“진짜요?”


30분 전만 해도 전혀 축구장에는 관심이 없던 K형님이 갑자기 가고 싶어 졌다며 연락이 왔다. 왜지? 갑자기 관심이 생긴 이유가 있을 것인데, 추측하기로 분명 아까 내가 이야기한 이민아 선수를 인터넷에서 인물 검색을 해보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축구 실력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로 얼짱 축구스타로 불리는 이민아 선수가 K형님에게 큰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이다. 실로 이민아 선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인터넷으로 조금만 찾아봐도 잘 알 수 있다. 평소 여자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삼촌 팬들도 이민아 선수를 통해 대동단결된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오늘도 한 축구팬의 씨앗을 심을 기회를 잡게 되었다.


과거 축구장에 가기 싫다던 여자친구에게 이동국과 대박이가 오늘 축구장에 올 것이라는 말로 큰 동기를 부여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는 아직도 축구장에 손흥민이 온다고 하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말 없이 국가대표 경기를 보러 함께 한다. 축구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러 가는 것이면 어떠랴. 이 모든 것이 축구의 일부인 것을···.


“근데, 진짜 재미있는 것 맞지?”

“아, 진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니까요!”


효창 운동장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축구에 큰 관심이 없는 지인과 함께 축구장을 가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다. 일단 이런 사람들을 축구장으로 데리고 가는 것부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나 같은 투머치토커는 해주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너무 즐겁다. 

 

“우리 밥은 어디서 먹어? 효창동 맛집 아니? 그 동네는 기사식당들 유명하지 않냐?”

“형님, 걱정마세요. 제가 효창동 최고의 국밥집을 알고 있습니다.”

“오! 국밥에 소주 좋지.”


그렇게 저녁 메뉴를 정하고 효창공원앞역에 내려 효창 운동장으로 걸어 올라갔다. 난 언제나 이 거리를 걸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한다. 대한민국 애국지사들의 묘가 안장되어 있기로 유명한 이 곳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가 여러 번 쓰인 곳이다. 축구 경기를 직접 보는 것만큼 축구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에 대하여 가슴 깊이 느껴 보는 것도 축구의 또 다른 매력 아니겠는가.


“형님, 효창 운동장 와본 적 있으세요?”

“아니, 서울 월드컵 경기장도 못 가봤는데 효창 운동장을 올 일이 있겠니?”

“이 곳이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축구 전용 경기장이에요. 1960년 아시안컵을 개최하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그 당시 대한민국이 아시안컵을 2연패 하고 60년이 넘도록 아직 우승을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곳이 대한민국의 최초의 잔디 구장이기도 하고 지금은 트랙이 있는 종합운동장이지만 당시에는 축구만을 위해 건설되었던 최초의 경기장이라고 할 수 있죠. 놀랍지 않나요?”

“그래서 국밥은 어디서 먹는데?”


형님의 반대편 귀에서 나의 소중한 TMI가 물 흐르듯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관심사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이야기가 상대방의 반대편 귀로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역사적인 곳에 직접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공감하다 못해 사진도 찍고 이 순간을 담아 가고 싶어지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K형님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예쁜 카페에 가서 카페 외관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주문한 커피와 케익의 사진을 찍은 뒤, 카페 내부에서 편히 커피를 마시는 본인의 모습이 반 정도만 나오게 찍어 그 순간을 담아 가는 아내를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와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 생각을 하고 우리는 국밥집으로 향했다.


나는 효창 운동장에 가면 꼭 들리는 국밥집이 있는데, 이 곳에는 세계 어느 국밥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뷰가 있다. 이 국밥집은 효창 운동장 안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는 창문 밖으로 효창 운동장의 내부를 볼 수 있다. 마치 월드컵 경기장의 스카이 뷰에 공짜로 앉아 맥주나 와인 대신 국밥을 먹는 기분이라고 할까? 몇몇 사람들은 이곳의 국밥을 ‘스카이 국밥’ 이라고 부른다. 국밥을 먹으면서 경기를 직관할 수 있다는 만화 같은 일이 이곳에서 가능 한 것이다.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야? 최고의 국밥집이라며.”

“형님, 이렇게 선수들 몸 푸는 것을 직접 보면서 국밥을 먹을 수 있는 국밥집이 세상에 몇 군데나 있을까요?”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을 보니 정말 안타깝다. 물론 스카이 뷰 뿐 아니라 국밥의 맛도 훌륭하다. 평소에도 국밥을 즐겨먹는 나는 다른 경기장을 가더라도 꼭 주위의 국밥집을 찾아 든든하게 배를 먼저 채우기 때문에 창문 넘어 몸을 푸는 선수들을 직접 보면서 따끈한 국밥을 먹을 수 있는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최고의 국밥집이다.


“형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땅에서 처음으로 열린 한일전 축구가 바로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1960년에 열렸던 경기였는데 친선 경기가 아니라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었어요. 당시 일본에 대한 앙금이 그대로 살이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경기가 얼마나 치열하고 살벌했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대한민국의 경기장에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일본 국가 연주를 허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국민적인 분노가 일었겠어요.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일본을 2대1로 물리쳤다는 것 아닙니까. 정말 짜릿하지 않나요? ”

“어···. 어···. 그래···.”

“앗! 저기 이민아 선수 보이네요, 형님!”

“오! 어디? 어디?”


국밥집 창문 너머로 몸을 푸는 이민아 선수가 보이자 나의 TMI에 지쳐가던 K형님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국밥을 먹으면서 창문 밖으로 보는 이민아 선수의 모습은 TV로 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제서야 K형님은 이 효창 운동장 국밥집의 위대함을 공감하는 듯 보였다.

 

여자라고 얕보지 마라.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주 두병을 가볍게 마신 우리는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퇴근 후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은 정말 한편의 그림과 같았다. 절대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 멋진 저녁 노을은 중년의 감수성을 자극시키기 충분하였다. 그렇게 감수성에 젖어 나홀로 인생을 돌아보는 사이에 K형님이 사라져 버렸다. 어디 갔지? 화장실은 분명 들어올 때 나랑 같이 다녀왔는데.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경기는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홈 스탠드에서 K형님이 싱글벙글 하면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 공 잡았다!”


싱글벙글 뛰어오는 K형님의 손에는 경기 킥오프 전 홈팀 서울시청 선수들이 나눠준 사인 볼이 들려 있었다. 얼핏 보아도 관중석에 있는 사람 머릿수가 손가락으로 세어도 될 정도였으니 11명의 선수들이 던져 주는 사인 볼을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홈팀 스탠드까지 뛰어 가서 잡아온 것이다.


“형님, 어느 선수가 던져 주던데요?”

“몰라? 그게 중요한가?”


그건 맞는 말이다. 나도 집에 있는 많은 사인 볼 중 누가 던져 줬는지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사인 볼을 하나씩 보고 있으면 그때 누구랑 어떤 경기를 보러 갔었는지 기억이 되살아난다. 수없이 다녀왔던 경기 중 한 경기일 뿐일지 몰라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난 이 사인 볼을 나눠주는 것을 무척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도 K형님은 이 사인 볼을 보며 오늘을 기억하겠지.


그런데 이렇게 기뻐하는 K형님을 보고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바로 오늘 게임이 재미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TV에서는 멋있고 극적인 골장면이나 하이라이트를 반복해서 보여주지만 현실적으로 축구가 매번 그렇게 재미있을 순 없다. 별다른 공격도 못해보고 무승부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 너무 일방적인 경기가 되는 경우도 많기에 축구장을 즐겨 오지 않는 지인을 겨우 설득시켜 데리고 온 경기가 마침 재미가 없으면 앞으로 다시는 축구장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K형님은 이민아 선수를 보러 왔으니까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민아 선수가 안보인다. 분명히 몸 풀 때 까지는 있었는데···. 그라운드가 아닌 벤치에 앉아 있는 이민아 선수를 우리는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렇게 나의 많은 걱정을 안고 시작된 경기는 웬 걸, 초반의 불길했던 나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흥미진진한 경기가 펼쳐졌다. 전반 14분, 원정팀 현대제철의 주장 이세은 선수가 한 골을 기록하자 1분 후 홈팀 서울시청의 수비수 노소미 선수가 바로 동점골을 넣으며 경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전반 30분, 다시 원정팀 현대제철의 공격수 장슬기 선수가 한 골을 넣었고 또 불과 1분 후에 홈팀 서울시청의 공격수 최유정 선수가 동점골을 기록하였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경기였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경기에 빠져 들었다.


“와···. 이거 경기 엄청 쫄깃한데!”


이미 K형님은 경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대2 동점 상황인 전반 35분 즈음에 이민아 선수가 교체 투입되었고, 뜨겁게 경기를 지켜보던 K형님과 나는 한번 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45초 같던 전반 45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거 남자 축구보다 훨씬 재밌는데?!”

“그렇지요? 오기 잘했지요?”


완전한 성공이었다. 엎치락뒤치락 순서대로 한 골씩 전반에만 네 골이나 터졌으며 여자선수들이 소리치는 고음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곳곳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이 현장감은 평소 쉽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였다. 조상님들은 정말 맞는 말만 골라 하셨구나. 


이어진 후반전에서 원정팀 현대제철은 전반전에 골을 기록했던 공격수 장슬기 선수의 골과 용병 비아 선수의 골에 힘입어 4대2로 승리하였다. 무려 여섯 골이나 터지다니···. 90분에 여섯 골이면 15분에 한 골씩 터진 셈인가? 축구장을 많이 다녀도 한 경기에 여섯 골을 보는 것은 쉬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경기를 보고 오면 일주일은 머릿속에 골 장면이 맴돌고 기분이 좋다. 여자 축구가 남자 축구만큼이나 재미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해 준 경기였다.


“형님 다음 주에 또 오실거죠?”

“그래, 또 시간 내 보자.”


그 후로 아직 K형님과 축구장에 다시 가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K형님은 사인 볼과 함께 효창 운동장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든 후부터 퇴근 후 축구장에 가는 나를 더이상 놀리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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