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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타 Sep 11. 2021

내 심장이 리버풀을 원한다.

안필드 방문기

무식하면 용감하다

 

맨체스터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짜릿한 하루를 보내고 쉴 새 없이 다음날 아침 일찍 리버풀로 넘어가야 했다. 리버풀과 사우샘스턴 경기를 예매해 두었기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싸고, 미리 준비해 온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호스텔을 나섰다.

너무 서둘렀던 탓에 리버풀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 시간이 남아 맨체스터 시내를 조금 걷기로 했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일까? 거리에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이 도시 전체가 조용했다. 나름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해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길을 걷다가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팬 샵으로 보이는 가게의 사장님이 막 문을 열고 계신 것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 보았다.  


“Hello~”


반갑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데 사장님이 왠지 이상한 원숭이를 쳐다보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시아 사람을 처음 보는 건가? 아니면 첫 손님이 너무 일찍 와서 놀란 것인가? 잠시 사장님의 이상한 표정의 이유를 생각하다 대수롭지 않게 눈웃음을 날려주고 가게를 구경하였다. 

와···. 매장 안에 박지성의 유니폼이 아직 걸려 있다. 또 다시 뜨끈뜨끈한 애국심이 가슴을 지나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그러면서 내가 박지성과 같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아임 프롬 코리아. 아이엠 박지성 팬.”

“리얼리? 너 맨유의 팬이니?”

“물론! 나는 박지성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너 왜 리버풀 옷을 입고 있어?”

“아, 그건 오늘 오후에 리버풀 경기를 보러 갈 거라서요.”

“하하하하하···.”


사장님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크게 웃으셨다. 왜지? 한국에서 온 박지성의 팬이라는 것이 반가우셨나? 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라기보다 어딘가 무척 불편한 웃음이 분명했다. 박지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건가? 아니면 맨유를 떠난 박지성이 그리우신 걸까? 알 수 없는 사장님의 웃음을 뒤로 하고 맨유의 마그네틱을 몇 개 구매한 뒤 팬 샵을 떠나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세월이 지나고서야 나는 리버풀 옷을 입고 맨체스터 시내를 활보하고 맨유의 팬 샵에 들른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맨유 팬 샵의 사장님은 리버풀 옷을 입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온 동양인이 무척이나 신기했으리라. 천만 다행인 것은 이른 시간이라 시내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는 것과 사장님이 무척이나 젠틀하고 이해심이 많으신 분이셨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정말 딱 맞는 말이다.


안필드의 심장


리버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는 맨체스터로 향할 때와는 달리 ‘티켓이 잘 도착했을까?’ 하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잘 되겠지, 뭐.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일이 잘못되면 바로잡으면 되고 문제가 생기면 풀면 된다. 하루 사이에 나는 ‘걱정 요정’에서 ‘긍정의 왕’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때부터 모든 근심걱정에서 자유롭고 홀가분해졌기에 세상 편한 마음으로 리버풀에 도착할 때까지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경기 티켓을 수령하기로 했는데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KIM입니다.”

“KIM··· KIM··· KIM···. 아! 여기 있습니다.”

“오, 땡큐 쏘 머치.”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도착해 있는 나의 티켓을 받아 들고 기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역시 긍정의 힘은 대단하다. 리버풀에서는 조금 여유 있게 축구를 즐길 수 있겠구나. 

내가 영국에 와서 안필드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안필드의 심장 스티븐 제라드를 보기 위해서다. 8살에 리버풀의 유소년팀으로 축구를 시작해 1998년 데뷔 이후 17년 동안 계속 리버풀에서만 뛰었고 23살의 나이부터 줄 곳 리버풀의 주장을 맞았던 스티븐 제라드는 리버풀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제라드가 곧 리버풀이고 리버풀이 곧 제라드다. 이런 레전드도 이제 은퇴를 거론할 시점이 왔고 지금이 아니면 리버풀 유니폼을 입은 제라드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안필드를 찾은 두 번째 이유는 리버풀에 죽고 못 사는 Y형님 때문이다. 결혼을 너무 일찍 한 Y형님은 육아의 삶에 갇혀 혼자 하는 유럽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기에 내가 영국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부럽다는 소리는 입에 달고 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필드에는 꼭 다녀오라며 신신당부를 했고 안필드의 메가스토어에서 기념품과 머플러를 사와달라고 했다. 


“형님, 그런 건 인터넷에도 팔지 않나요?”

“인터넷은 짝퉁이잖아.”

“리버풀 공식 홈페이지 가도 팔걸요?”

“야, 그래도 느낌이 다르잖아.”


굳이 이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지 정말 망설였다. 인터넷에 파는 물건이랑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안필드에서 직접 사람의 손으로 결제 한 물건의 가치를 느끼고 싶다며 기념품과 머플러를 사오라는 Y형님의 부탁은 정말 귀찮고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영국 여행을 위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고, 내가 축구를 즐기는 데 큰 역할을 해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이기에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Y형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안필드에 도착하자마자 메가스토어로 향했다. 그런데 메가스토어 앞은 이미 쇼핑을 하기 위한 팬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쇼핑을 하기 위해 이렇게 긴 줄을 서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대형마트에서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는 정도인데 그것도 나에겐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나는 지금 이 긴 줄을 서면서 낭비할 시간과 의지가 없다. 경기장도 둘러봐야 하고 선수단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추어 제라드를 보러 가야 한다. 현명한 판단을 위해 잠시 고민을 해보았고 결국 빠르고 민첩한 포기를 통해 메가스토어는 그냥 지나쳤다. 경기가 끝나면 다시 와보지, 뭐.


카메라를 들고 선수단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 합류하여 제라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영국 형님들의 어깨까지도 미치지 못하였고 선수단 버스가 도착하자 사방에서 들어오는 바디첵에 마른 오징어처럼 끼여 버렸다. 영국에서 축구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구나. 

버스에서 제라드가 내리는 순간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제라드의 인기는 리버풀 선수단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팬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에 웃으면서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줄만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어 들어갔다. 경기 전의 주장으로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와, 개멋있다. 진짜···.

헐, 그런데 제라드의 품격에 빠져 멍하니 바라보다가 사진 찍는 것을 그만 깜빡해 버렸다.


경기장으로 들어와 바라본 안필드는 올드 트래포드에 비해 확실히 작아 보였고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듯했다. 수용 인원이 올드 트래포드에 비해 현저히 적지만 작은 경기장에 가득 들어찬 관중들을 보니 웅장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좌석번호를 찾아가 자리에 앉고 보니 사우샘프턴 원정석의 바로 옆자리였고 원정석의 양끝에는 형광색 옷을 입은 보안요원 분들이 한 줄로 앉아 있었기에 마음대로 건너가진 못했다. 원정석의 모든 사우샘프턴 팬들은 자리에 서서 엄청난 목소리로 응원 중이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압도적으로 적은 숫자이지만 응원의 열정만큼은 리버풀 홈 팬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았다. 


경기 시작 전 열띤 응원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갑자기 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우샘프턴 원정석을 향해 뭐라고 소리 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이 남자는 분명 무엇인가 화가 난 모습이었다. 방금 원정석에서 소리친 이야기 중 하나가 남자의 신경을 건드린 듯했고 남자는 분노의 소리를 질렀다. 


“헤이, 맨! Fuck it off, 뻑! 뻑! 뻑!”


곧바로 사우샘프턴 원정석에서 엄청난 고성과 함께 우리 쪽을 보며 뭐라고 소리쳤다. 곳곳에서 치켜든 가운데 손가락을 세어보다 보니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앉은 자리는 일반석이었고 어린 아이들과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있었기에 아무도 이 남자를 도와줄 수 없었다. 옆자리의 남자는 홀로 사우샘프턴 원정석의 서포터즈들을 상대로 소리치며 흥분을 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도와 줘야하나?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우선 이 남자가 왜 화가 났는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는 도와줄 명분이 부족했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영문도 모르는 싸움에 휘말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나의 노선은 분명했다. 싸움이 나면 도망간다. 원래 어렸을 적부터 불의를 보면 잘 참는 성격이기 때문에 미련없이 도망가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옆자리의 남자도 계속 소리만 크게 지를 뿐, 행동으로 무엇인가 보여줄 것 같은 모션을 취하지는 않았고 사우샘프턴 원정팬들의 압도적인 도발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결국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줄곧 나의 눈에는 스티븐 제라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라드가 공을 잡을 때마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제라드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관중들은 뜨겁게 반응하였다. 안필드에 모인 모든 축구팬들이 제라드를 보기 위해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안필드에서 제라드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의 심장은 리버풀을 원했다. 리버풀은 나의 클럽이며 영원히 리버풀과 함께 하겠다.”


일부로 멋있는 척을 하려고 해도 이렇게 멋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2005년 첼시가 엄청난 자금력으로 리빌딩을 할 당시 제라드는 위와 같은 말을 남기고 리버풀에 잔류했다. 이러니 리버풀의 팬들이 제라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월드 클래스의 실력을 갖춘 선수가 조건과 상관없이 한 클럽에 충성을 한다는 것은 리버풀 팬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게다가 생긴 것도 정말 잘 생겼다. 남자로서 정말 한 번쯤 닮고 싶은 캐릭터다. 

시간이 지나고나서 나는 스티븐 제라드가 은퇴하기 전 안필드를 찾아 그의 플레이를 보았다는 것이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히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의 경기는 2대1 리버풀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기에 어제 맨체스터에서 살벌했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홈 팬들의 승리의 환호성과 함께 경기장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나는 승리의 기쁨에 환호하는 팬들의 무리에 섞여 숙소까지 알지도 못하는 응원가를 따라 부르며 한 시간가량을 걸어서 도착했다. 


영국에 도착하고 계속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탓에 온 몸이 지쳐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벌러덩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자 갑자기 천장에서 Y형님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뿔싸! 기념품과 머플러를 사오라는 이야기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나는 다시 숙소 밖으로 나갈 에너지와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씻을 힘도 없어서 침대에 누워 씻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마당에 다시 안필드로 가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것도 걸어서 한 시간 거리를···. 어쩌면 좋을지 아주 잠시 고민을 하다가 5분도 지나지 않아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숙소 앞에 있는 가판대에서 머플러와 티셔츠를 하나 구매하고 리버풀을 떠났다. 그리고 Y형님에게는 어디서 구매한 것인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받고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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