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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의 여행, 그리움이 동행한 길

맑은 하늘 아래, 그 사람의 미소가 머물렀다

by 시니어더크


오랜만에 마음속 깊은 이야기 하나를 꺼낸다.

칠순을 맞아 아이들이 준비해 준 2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머물던 '기념 여행'이었고, 떠나기 전부터 설렘보다는 묘한 떨림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사람이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 내내 그녀의 사진이 내 곁을 지켰고, 그 미소는 낯선 도시의 골목마다 나를 이끌어주었다.



출발은 추석날 새벽 1시 20분, 인천공항이었다. 묘하게도 여섯 해 전 그녀와 함께 스페인으로 떠났던 날도 추석이었다. 우리 부부에게 명절은 언제나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었나 보다. 출국 직전, 공항 노동자 파업 소식이 들려 혹시 비행기가 뜨지 못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오래전부터 함께하던 행운이 이번에도 이어진 듯했다.


비행기는 카타르의 도하공항을 경유해 로마로 향했다.

도하의 밤은 화려했다. 인천공항이 크고 잘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도하는 그보다 더 웅장했다. 반짝이는 조명, 광활한 공간, 정제된 구조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석유 부국의 자부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짧은 대기시간 동안 낯선 시간대를 실감했다. 우리나라보다 여섯 시간 늦은 그 시각, 세계의 또 다른 면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콜로세움
이탈리아 남부휴양지 포지타노


로마에 도착한 뒤의 첫날 아침, 햇살은 이탈리아의 옛 영화처럼 부드럽게 비쳤다.

콜로세움의 거대한 아치 사이로 쏟아지는 빛, 판테온의 천정으로 떨어지는 한 줄기 광선, 그리고 화산재에 묻혀 잠든 폼페이의 도시.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에서 인간의 역사와 허무가 교차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카메라를 들고 감탄하며 메모를 적었을 것이다. 나는 그 상상을 하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베네치아 부라노섬


로마의 여운을 뒤로하고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향했다.

물의 도시라 불리는 베네치아는 그 이름만큼이나 낭만적이었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300년이 넘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부라노섬의 알록달록한 집들은 마치 꿈속의 풍경 같았다. 거리마다 물결이 반짝이고,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인 도시에서 문득 생각했다. '삶이란 결국 끊임없이 건너가는 일'이라는 걸.


융푸라우


이탈리아를 뒤로한 여정은 스위스로 이어졌다.

취리히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그린델발트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펼쳐진 알프스의 능선은 그림처럼 맑았다. 숙소는 전통 샬레였다. 창문을 열면 녹음 짙은 초원 위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융프라우 정상에 올라 눈부신 설산을 밟으며 바라본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햇살이 눈 위에 반사될 때, 나는 알 수 없는 울컥함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가 내 곁에 있는 듯했다.


인터라켄 호숫가에서


일주일간의 일정은 순조로웠다.

피르스트 산책길을 걸으며 가족들과 웃었고, 인터라켄 호숫가에서 피크닉을 즐겼다. 마지막 날에는 루체른의 리기산에 올랐다. 구름바다 위로 펼쳐진 설산의 능선이 수평선처럼 이어지고, 그 아래 고요한 호수가 반짝였다. 세상의 어느 풍경도 그만큼 장엄하지 않았다. 루체른의 내셔널호텔 스위트룸은 호화로웠지만, 그 안에서의 시간은 오히려 고요했다. 그곳에서의 조식은 생애 가장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이 모든 일정이 끝나고, 다시 도하를 경유해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번 여행이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한 생의 정리를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의 끝마다,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피르스트산 (호수와 설산전경)


떠나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여행 내내 하늘은 맑았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그 맑음은 마치 그녀의 마음이 날씨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듯했다. 장례식 때도, 무덤 앞에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맑은 날엔 그녀가 웃고, 비 오는 날엔 그녀가 운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움은 시간을 건너 하늘이 되고, 하늘은 다시 나의 하루를 밝힌다.


그렇게 나의 칠순 여행은 끝났다.

그러나 마음속 여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녀와 함께했던 날들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지도이기 때문이다.


인터라켄 공원
루쳬른 호수의 카펠교


이번 여정에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조용히 되뇌었던 모든 풍경들을 이제 브런치북 글로 옮기려 한다.

시간에 흩어지기 전에, 마음속에 남은 빛을 단어로 붙잡고 싶다.

그녀와 함께 걸어온 세월을 정리하듯, 나의 칠순 또한 그렇게 정리하고 싶다.


비록 발걸음은 멈추었지만, 마음의 길은 여전히 이어진다.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그녀가 서 있고, 나는 오늘도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그래서 이 글은 끝이 아니다.

삶의 또 다른 페이지가 조용히 열리는 순간이며,

그리움이 이끄는 한 인간의 두 번째 여행이 이제 막 다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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