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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Jan 11. 2024

어쩌다 스웨덴 06

스웨덴 예테보리 여행



일요일이라 영업을 하지 않았던 예타 광장 앞 카메라 전문점. 쉬어가는 날인데도 가게 내부에 불이 밝혀놓은 게 눈에 띄었다. 벽면의 시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오후 3시 20분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는데 이곳은 어둑해져갔다. 아직은 적응되지 않았던 고위도의 짧은 낮.




오랜 시간 돌아다니다 보니 당이 떨어졌다. 머지않아 식사를 할 예정이었던 까닭에 카페는 지나쳤고, 대신 세븐일레븐에 갔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던 진열대 안의 여러 음료들 중 선택된 아이. 초코우유로 보이는 몇 종류의 제품들이 있었는데, MILD라는 단어와 병 밑에 가라앉은 초콜릿의 조화가 가져다 준 확신으로 골랐다. 쓰려고 하니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연하면서도 진했던 푸코(Pucko) -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초코우유를 홀짝이면서는 전날 둘러보지 못했던 예테보리 대학교의 교정으로 들어섰다. 작은 공원 같았던 캠퍼스. 슬렁슬렁 한 바퀴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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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기보다 계획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MBTI에 P가 자리한다고 하면 증명이 되려나. 그러니 식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구글 지도에서 눈에 띄는 곳의 평을 슥슥 훑은 다음 목적지로 설정한다면 상당히 정성을 들인 선택인 거였다.


그런 내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던 한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런데 갔더니 풀 부킹이었다. 현지인들도 예약해서나 오는 곳이니, 방랑자가 떠돌다가 문 한 번 두들긴다고 열리는 곳은 아니었던 듯했다. 그래도 친절한 직원분께서는 못지않게 맛있다며 다른 레스토랑을 소개해주셨다. 명함까지 챙겨주시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시 목적지로 설정해서는 지도를 따라갔다. 아뿔싸. 저녁 오픈까지 한 시간인가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치만 배고픈 여행자는 인내도 시간도 없었다. 발길을 돌렸다.






그러던 중 P의 눈에 들어온 식당이 바로 이곳이었다.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니 먹을 만한 것들이 있었다. 지체없이 들어갔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대였어서 그랬는지 손님이 나뿐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거하게 먹으려 했었다. THE GRILL MIX를 시켰다. 비프, 치킨, 램, 소시지와 버터감자가 나왔다. 남길 수밖에 없던 양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칼질을 했다.


먹고 있던 중 다른 한 손님이 들어왔다. 혼자 있음으로써 느꼈던 부담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모임을 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연락을 하며 다른 이들을 기다리다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뭐 먹고 있는 거냐고, 맛있어 보인다고 물어왔다. 낯선 이와의 몇 마디가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메뉴판에서 메뉴를 직접 가리키며 정말 맛있다고, 추천해드린다고 했더니, 싱글벙글 웃음지으며 고맙다고, 그거 꼭 시켜 먹겠다고 답을 해왔다. 혼자하는 식사가 외롭지 않았던 날이다.


글을 쓰며 다시 찾아보니 JOHN SCOTT'S은 스웨덴에 열댓 개의 지점을 가진 비스트로인 듯하다. 여긴 CALEO점이고. 어쩐지 술이 한 벽면을 채운다 했더니, 구글 지도에서의 카테고리는 양조장 주점이다.



선물 가게 안을 들여다보는 둘을 보며,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는 게 따뜻한 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길을 가던 중 본 <기생충> 포스터. 길가에 영화 포스터들이 늘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을 한 이후도 아니었는데, 여행 내내 <기생충>의 홍보물들은 이따금씩 보였고, 그때마다 나는 지나치게 반가워했다. 이날은 반가움의 서막으로, 오히려 놀라움이 더 컸던 날이었다.




예테보리 시립 도서관(Stadsbiblioteket Göteborg). 끝내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밖에서만 봐도 도서관이 아름답다는 게 무슨 말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통유리에 가까운 건물의 빛이, 그것도 책을 품고 있는 건물의 빛이 도시를 밝힌다는 것. 동시에, 공적인 곳으로서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 정말이지 멋지고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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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예타 광장을 음미하고는 다시 한 번 이동을 했다. 비효율적 동선의 끝판왕이지만, 그치만 이곳에선 괜찮다니까?






여기는 리세베리(Liseberg). 바로 옆에 있는 국립과학관과 마찬가지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놀이공원이라고 한다. 내게는 이번 여행의 골격을 잡게 해줬던 곳이기도 하니, 스웨덴의 여러 크리스마스 마켓들 중에서 상당히 크게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리세베리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연말까지만 해당했고 나는 27일에야 스웨덴에 도착하는 거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5일 안에 리세베리를 가야했다. 스웨덴에 오자마자 예테보리로 향했던 가장 큰 이유, 바로 이곳이었다.








길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는 리세베리 타워를 올라가게 해준다.





타워 안에서는 리세베리 디자이너 마켓이 열리고 있었고, 여기에는 사고 싶지만 사기 어려운 것들 (ex) 비싼 공예품, ...)이 잔뜩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눈으로 담아왔지만, 이제 와 다시 보니 조그마한 아쉬움이 남긴 한다.



멀리서부터 존재감을 잔뜩 내보이던 리세베리 관람차. 대단히 재미있는 놀이기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경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흔들거리는 작은 동체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만 하는데도, 그런데도 여행 중에 관람차가 보이면 꼭 타게 된다. 아마도 나에게 관람차가 놀이공원, 그 안에 들어있는 공상, 그 안에 들어있는 비현실적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남아있어서 그런 것 같다.





스웨덴에서는 체크카드 및 신용카드를 이용할 때마다 6자리의 핀 번호를 눌러야 한다. (카드 비밀번호와는 다른 종류인 거 같다.) 그치만 한국에서 써 온 내 카드에는 그런 게 없으니까. 대면 결제를 할 때면 카드와 여권과 서명을 전부 대조하곤 했다. 다소 번거로웠으나 큰 문제가 되진 않았었다. 애를 먹었던 건 키오스크를 통한 무인 결제였다. 존재하지 않는 핀 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급한 대로 카드 비밀번호를 누를 때면 언제는 승인이 됐고 언제는 안 됐다.


관람차 티켓을 끊을 때도 그랬다. 몇 차례의 시도 동안 결제가 되지 않다가 가까스로 한 장 끊어서는 줄을 섰는데, 탑승 직전에 티켓을 내미니 혼자 타는 거냐 물었고, 그렇다고 하니 그럼 두 장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아마도 한 차의 최소 탑승 인원만큼을 지불해야 혼자 탈 수 있었던 듯싶다. 줄을 꽤 오래 기다렸는데 다시 끊고 다시 서야하나 막막해지려 하는 찰나, 직원분은 걱정 말고 두 장 더 구매해서 오면 여기서 바로 탑승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다시 한 번 키오스크를 가서는 요상한 시스템을 통해 두 장을 더 결제한 후 그에게 갔다. 줄을 서지 않고 곧장 게이트로 온 나를 향한 몇몇의 시선들은 없을 수가 없었다. 직원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스웨덴어로 (아마도 양해를 구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멋쩍어하던 나는 덕분에 관람차에 잘 올라탔다. 당혹스러워질 수 있던 상황들을 무사히 해결해준 다정한 마음을 함께 안은 채로 말이다.





맞은 편에 앉아있는 이 여행의 동반자.





밤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관람차가 위치한 높은 구역에도 다양한 어트랙션들이 있는 듯했다. 롤러코스터 레일이 언뜻언뜻 보이긴 했었는데, 찾아보니 상상 그 이상의 짜릿한 놀이기구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다, 리세베리는.



다시 내려가는 길.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 속에서 빛과 음악이 퍼지니 현실 감각은 사라지고 어쩐지 성스러워졌다.







휠체어를 탄 채로 놀이공원에 와서 즐기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당연한 곳.
















걸어도 걸어도 계속해서 펼쳐지는 리세베리의 크리스마스. 평범한 기념품 가게부터 중세시대 때의 칼, 모자 등이 파는 막사까지, 다채로운 콘셉트의 마켓들이 곳곳에 있었다. 배가 지나치게 불렀던 탓에 글뢰그 한 잔도 못 사 마신 게 역시나 아쉬움으로 남지만,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시공을 홀로 거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던 스케이트장 앞 난로에 서서 몸을 녹였다. 근데 이 난로, 보는 내내 어쩐지 포일에 싼 고구마를 넣어야 할 것만 같았다.






동일한 두 공간을 완벽히 다른 세계로 분리해내는 문.




폐장한 국립과학관도 돌아가는 길에 한 번 더 바라봐주었다.












역시나 숙소에 들어가기 전, 찬바람 속에 서서는 일렁이는 물결을 계속 바라보았다. 검은데 빛이 났고, 빛이 나는데 검었다. 몇 개의 노랫말들이 입안에 맴돌았는데, 그 중 넬의 <Slow Motion>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검고 빛나는 밤이었다.


"이름조차도 모르겠을 이 감정들아

그만 떠나자, 네가 이겼어."





덧말) 리세베리에서 정말정말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Wheels of fortune.


들어갈 때부터 몇몇 사람들이 자기만 한 초콜릿을 들고 다니길래 뭔가 했더니만, 특별한 초콜릿을 걸고 하는 돌려돌려 돌림판이 곳곳에 있었다. 일정 금액을 내면 참여할 수 있는 이 게임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2kg짜리 대왕 초콜릿들이 걸려 있었는데, 꼭 그걸 따내지 못하더라도 최소 시중에 파는 초콜릿 정도는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탐나던 초콜릿들이었으며, 캐리어가 여유롭기만 했다면 분명 한 판 했을 거다. 그치만 출국 당시 내 캐리어는 이미 최대 무게에 가까웠던 터라, 눈물을 머금고 사진만 몇 장 남겨왔다. 대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면세점에서 계획적 충동으로 빅 사이즈 토블론을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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