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레이츠와 스탬포드 브리지
토트넘 경기를 현장에서 즐기고 무사히 숙소로 들어온 친구와 나는 다음 날(1월 14일)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축구에 관심 없는 친구는 전 유럽에서 6번째로 높은 건물인 ‘더 샤드’에 가 보고 싶어 했다. 곧 스페인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나는 런던의 다른 구장을 둘러보고 싶었다. 4일 차 일정은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현재 런던에는 수많은 구단의 홈구장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가장 유명한 아스날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과 첼시의 스탬포드 브리지를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먼저 에미레이츠로 향했다. 영국의 전형적인 우중충한 날씨의 이른 아침 공기는 촉촉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도 역시 걷기에는 많이 부담스러운 거리인지라 언더그라운드를 이용했다. 경기장 쪽에 가장 가까운 출구로 나가는 길엔 역 이름 대신 ‘Arsenal’이 쓰여 있었다.
다세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와중, 커다란 경기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택가 한가운데 경기장이 위치했기 때문인지 마치 커다란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었다. 경기장에 가까워지자 슬슬 팬들이 함께 모여 경기를 보는 펍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주점들 사이로 여러 기념품 매장도 보였는데 그 중 나의 눈길을 끌었던 스토어는 베르캄프와 앙리의 그림을 큼직하게 그려놓은 곳이었다. 비록 이른 아침이라 영업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언젠가 꼭 방문하고 싶었다.
경기장의 외벽은 온통 구단의 전설적인 선수들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스날 팬이 아님에도 너무 멋있어 보여 바쁘게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했다. 주로 무패 우승 시즌 멤버들이었는데 팀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는지, 또 얼마만큼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지가 너무도 잘 드러나 있었다. 구장 외곽 이곳저곳에 전설적인 선수들의 동상도 배치되어 있었다.
경기장에 도착해 제일 먼저 둘러본 곳은 ‘아머리(Armory)’라고 불리는 아스날의 팬 숍이었는데 직원들도 아주 친절했고 옆에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설명해주고 싶어 했다. 가령 “너 이번 시즌에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 오바메양이 넣은 골 장면 기억해? 그거 2002년에 앙리가 넣은 골이랑 정말 비슷해!”처럼 내가 아스날에 얼마나 관심 있는지에 대해 묻는 말이었다. 아머리의 직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구경하던 중 다시 한번 팀의 과거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잘 나타내는 상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르센 벵거 감독과 함께 프리미어리그 패권을 다투던 시절의 클래식 유니폼들이었다. 물론 구단에서 자체 제작한 기념 티셔츠들로 유니폼보다는 티셔츠에 가까웠지만, 예산이 충분했다면 꼭 구매하고 싶은 제품들이었다.
'Pride of London' 자신들을 런던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첼시의 홈 경기장은 생각만치 크지 않았다. 런던의 풀럼 지역에 위치한 이 경기장은 하이드 파크와 해롯 백화점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고, 버킹엄 궁전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아주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곳에 위치하다 보니 무지막지하게 크게 짓기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다른 빅 클럽의 홈 경기장과 비교해 크진 않았지만, 충분히 거대했다. 팀 창단 이후 현재까지 변경 없이 그대로 이용해 온 역사 깊은 구장이다.
경기장으로 진입하는 도로에서는 소지품 검사를 진행했는데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가져온 구장 투어 티켓을 지적받았다. “너 누구 편이야? 런던에 축구팀은 하나뿐이야!”라며 가벼운 농담을 던진 것이다. 별다른 문제 없이 경기장에 들어와 제일 먼저 외관부터 둘러보았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과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선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스날보다는 비교적 최근에 전성기를 누렸던 팀이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까지 활약했던 디디에 드록바, 프랭크 램파드, 존 테리 같은 선수들이 주를 이뤘다. 바쁘게 바쁘게 사진을 찍고, 구장 투어 티켓을 구매하러 박물관으로 향했다.
24£를 주고 구매한 티켓은 작은 종이에 프린트되어 지갑이나 휴대폰 투명 케이스에 넣고 다니기 알맞았다. 손목에 차는 일회용 팔찌와 앰블럼이 새겨진 투어 목걸이도 제공되었다. 아스날 구장 투어와 달리 투어 가이드 시작 시각이 정해져 있었고, 해당 시간에 티켓을 예매한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며 설명을 들었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과 비슷하게 감독 사무실, 라커룸, 피치가 내려다보이는 메인 스탠드, 기자 회견장, 인터뷰 박스 등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가이드가 하나하나 설명해주며 혼자 온 투어객을 위해 사진도 찍어주었다. 특히 좋았던 설명은 라커룸 내 선수들 자리 배치에 관한 내용이었다. 등 번호 순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닌, 감독의 의도가 들어간 배치였다. 영어보다 불어가 능숙한 선수끼리 붙여놓는다든지, 주장 선수와 부주장 선수는 맞은편에 위치 시켜 원활한 소통을 돕는다든지 여러 의도가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원정팀이 사용하는 라커룸도 흥미로웠는데, 호나우지뉴, 조지 베스트, 파울로 말디니처럼 스탬포드 브리지를 방문했던 전설적인 상대 선수들의 유니폼을 전시해 두었다. 기대 이상으로 즐길 거리가 많은 투어였다.
투어가 마무리되고 나는 첼시의 메가 스토어로 향했다. 아스날의 아머리와 비교해 조금 더 다양한 제품들이 준비돼 있었다. 역시나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지소연 선수의 사진 걸려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역시나 볼 게 넘쳤다. 오전 9시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서서 에미레이츠와 스탬포드 브리지를 둘러보니 벌써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더 샤드에서 멋진 시간을 보냈을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은 뒤 다음 날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이동 준비를 하기 위해 숙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