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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박 Mar 23. 2024

무엇을 쓸 것인가

『아니 에르노의 말』 아니 에르노, 로즈마리 라그라브

그들의 글쓰기가 궁금하다  

   

세계적인 두 여성이 만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대담집이 나왔다. 심지어 페미니스트 운동가라니. 당장 책을 사서 읽었다.     


아니 에르노는 그녀만의 독특한 글쓰기로 2022년 프랑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프랑스의 엘리트 사회과학연구소인 ‘고등사회과학연구학교’ 교수이다. 두 여성의 대화는 독일 연구소가 개최한 <페미니스트 계급 탈주자들의 경험과 글쓰기> 좌담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아니 에르노의 말』은 페미니스트, 계급탈주자, 글쓰기가 키워드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책은 처음부터 난해했다. 프랑스의 문화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일일이 인터넷에서 용어를 찾아가며 읽어야 했다. 가장 어렵게 다가온 단어는 ‘계급 탈주자’였다. 프랑스는 아직도 계급사회인가? 멍청한 생각도 했다. 알고 보니 하층 노동자에서 부르주아 층으로의 이동을 계급 탈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왜 ‘탈주’인가? ‘성공’이 아니고? 헷갈렸다. 그들은 계급의 상층 이동을 ‘배반’이라는 의미를 담은 ‘탈주’라고 쓰고 있었다.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행위는 지배층을 강화하는 역할이 되고 이것은 곧 지배받는 층의 권리 약화로 이루어진다는 자각을 기반으로 한다.     


계급 탈주자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그의 공동저서 『상속자』에서 쓰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부르디외는 책에서 ‘아비투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인간행위의 무의식적 속성을 뜻한다고 한다. 계급 이동자는 아비투스가 분열되는데, 내재된 정서와 이동한 층의 그것이 달라 혼돈이 오기 때문이다. 계층 이동을 겪지 않은 부르주아들, 즉 하층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없는 자들은 그런 분열된 아비투스를 비난하며 병리학적 문제로 몰아붙였다.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 ‘계급 탈주자’이고 ‘분열된 아비투스’를 가졌다고 인정했다. 아비투스의 분열로 인해 겪은 고통은, 그녀가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확립하는데(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큼) 강력한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은 곧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자각함으로 시작한다. 주관적으로 체험된 것이 사회적 권력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권력관계 내에서 자신의 위치성을 사유하지 않고서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아니 에르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젠더’를 계급과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프랑스 사회과학을 이끌던 남성 학자들(부르디외 포함)은 계급 탈주자로서의 문제의식에는 첨예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남성으로서 누렸던 특권에 대해서는 몰이해했다. 책에서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계급 탈주자와 페미니스트가 결합된 글쓰기가 아니 에르노의 독특한 글쓰기이자 로즈마리 라그라브의 글 쓰는 방식이다. 특히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는 개인적 경험과 사회과학의 교차점에서 사유한 글쓰기로, 자신의 얘기를 하되 감정적이 되거나 스스로를 영웅화하거나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글쓰기 방식이다.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개천과 용의 대비가 주는 빈곤한 상상력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계층을 배신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지배자의 언어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언어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했다. 나는 서서히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회에 ‘계급 탈주자’ 같은 용어가 있다는 것이. 상층으로의 계층 이동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개천에서 용 난다’가 아닐까? 개천에서 용이 났으면 온 동네가 플래카드를 붙이고 잘했다고 박수 쳐야 마땅하지 않나. 개천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며 살았는데 왜 배신했다고 힘들어하며 배반한 빚을 갚기 위해 사회운동을 하는 걸까.   

  

개천으로 함의되는 것을 무엇일까. 용이 날아오른다는 것은 분명 상층 이동을 뜻하는 것이고 개천은 하층일 것이다. 여기서 개천은 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상상되지 않는다. 하잘 것 없는 곳, 너무 변변치 않아서 벗어나야 마땅한 것들이 있는 곳이다. 그곳을 버리고 나오면 최고의 영물 ‘용’으로 대접받는다. 그리고 우러름에 익숙해진 ‘용’은 자기가 잘나서 용이 된 줄 안다.  

   

아니 에르노는 개천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의 ‘개천 탈주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계층 이동을 도왔던 수많은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많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천 탈주자는 그들에 빚진 자이다.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개천 탈주자들은 빚진 자로서, 개천을 혐오의 공간이 되지 않도록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얘기이다.  

   

용과 개천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용을 절대적으로 우월 시 하는 곳에서 어떤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을까? 하찮은, 병든, 늙은, 힘없는 것이 쉽게 쓸모없는 것으로 치환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닐까.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말한다. 용과 개천도 인간이 만든 것이니 그 빈곤한 상상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글쓰기로, 혹자는 직업활동으로, 그리고 사회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연대활동으로 빚을 갚고자 할 때 계급사회(용과 개천으로 이분화된)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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