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여행
2023년 둘째 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다. 딸에게 물었다.
"졸업 선물로 뭐 해줄까?"
"엄마 나 여행 가고 싶어, 스키장 가자!"
"그래, 그래..."
대답은 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쉽지 않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1년 동안 설과 추석, 명절 당일 딱 이틀을 쉬셨다. 부모님이 가계 일로 바쁘시다 보니 가족 여행은 고사하고 외식조차 어려웠다. 특별한 날이 되어야 자장면, 불고기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경향신문사 앞 어느 식당에서 먹던 볼록한 구리색 불판에서 오그라드는 달달하고 촉촉한 서울식 불고기 맛이 입가에 선하다.
어릴 적 영향인지 성인이 되어도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렵다. 동네 밖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낯설다.
2019년부터인가? 12월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짧은 가족 여행을 시작했다. 첫 여행이라 숙소부터 신경 썼다. 언덕 위에 크루즈 모양의 호텔, 탁 트인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숙소로 잡았다. 그 해부터 매년 넓고 깊은 물에 일 년 동안 꽉 찼던 마음을 털어 버리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바다로 향했다. 일상의 환기와 작은 일탈을 아이들은 열렬히 환영하지 않았다. 여행은 뭔가 다르고 신나고 기대돼야 하는데 언제나 추운 바다라니... 아이들에겐 여행의 익숙함이 어느새 지루함이 되었다.
어린 코끼리의 한쪽 발목에 쇠사슬을 묶어 튼튼한 뱅갈보리수나무에 묶어 놓는다. 코끼리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소용이 없다. 움직이다가 쇠사슬이 팽팽해지면 더 이상 힘을 쓰지 않는다. 결국 자신은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다고 깨닫고 탈출을 포기한다. 어린 코끼리는 굵고 단단한 쇠사슬에 묶어놓지만 어미 코끼리가 되면 밧줄을 말뚝에만 묶어 놓아도 더 이상 힘쓰지 않는다. 자랄수록 쇠사슬을 끊을 힘이 충분히 생기지만 어느덧 사슬에 길들여져 있다. 이처럼 벗어나려고 노력하다가도 반복적인 실패를 통해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구속 상태를 코끼리 사슬 증후군이라고 한다. 나중엔 충분한 힘(가능성)이 있음에도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하는 것이다.
내겐 일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관성이 코끼리 사슬 증후군이 아닐까? 일상과 틀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의미로 자유로움을 원하면서도 익숙함을 선택하는 것은 현재 나의 위치가 보다 안전지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지금 안전지대에 있는가?
결론은 아니다!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불안함과 위태로움마저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의 생애 첫 여행
과거에는 무모하게 일탈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2학년 선배들이 산악훈련을 마치고 모이는 종착지로 가서 친한 선배 몇 명과 전국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전국 투어까지 계획했다. 훈련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선배들과 마주하고 야심 찬 여행을 시작했다. 강렬한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며 속초, 양양, 남원, 거제, 제주도로 이동했다. 이동 수단은 히치하이킹과 도보였다. 바다와 산과 들을 누비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자유의지의 생애 첫 여행이었다.
지금 가자!
하루는 중간고사 시험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생리학실험실의 선배들도 열공 중이었다. 랩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되어 점심식사 자리에 따라갔다. 식사 중에 고향과 여행을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싶더니 "우리 지금 갈까?, 오늘은 원주 누구네 집에서 자고 내일은 어디 들렸다가 모레 오자!"가 되었다. 강원도가 고향인 선배들이 옆 동네 가듯 다녀오자는 거였다. 공부하다가 지갑만 들고 무작정 떠났다. 둘째 날 치악산을 오르는데 신발이 불편해 발에 물집이 잡혀 돌산을 기어올랐던 기억이 난다. 여행 도중 시장에서 신발도 사고 옷도 샀다. 즉흥곡 같은 여행이었다. 2박 3일의 번개여행을 마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왔다. 앉았던 자리에 책과 노트 필기의 흔적이 3일 전 그대로다. 마치 점심을 먹고 1시간 만에 돌아온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4-5명이 만장일치로 훌쩍 여행을 다녀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공부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막 꿈에서 깬 듯했다.
자유라는 날개를 달고 다니던 20대를 그리워하며 세월만 까먹고 있기엔 아직 젊고 살아갈 날이 새털같이 많다. 남은 인생 나답게 살아보자고 애쓴 지도 벌써 7년째다. 과거의 나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졸업 선물로 스키장 한 번 가는 것도 망설이는 내가 찌질하다는 감정과 더불어 아이들과의 보석 같은 날들을 어영부영 흘려보내는 것 같아 마음에 안 들었다. 7년을 돌아보며 나와 마주하니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기보다 스스로 나의 능력을 제한하고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움직이고 있었다. 딱 발목에 묶인 밧줄의 길이만큼만...
굵은 쇠사슬과 튼튼한 뱅갈보리수나무에 묶여있던 발목은 얇은 밧줄에 작은 말뚝으로 옮겨진 지 한참 되었고 그 밧줄정도는 끊을 만큼 힘도 세졌는데 도대체 뭐 하고 있나? 반문했다.
큰맘 먹고 허벅지에 힘을 주어 잡아당기려고 하자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린다.
하나, 둘, 셋 하고 당기면 끊어질까?
끊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정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까?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진다. 이제부터는 나와의 싸움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우물쭈물하는 동안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너무도 많은 경험을 하지 않았나? 익숙함 속에서 유연함을 포기하는 동안 스스로를 구속하고 한계를 만드는 나쁜 습관만 남았다. 지금 나에게는 멀리 떠날 체력과 조금 더 무거운 책임감을 감당할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다음 밧줄을 끊고 말뚝은 뽑아버리면 된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가장 큰 용기는 나를 붙잡고 있는 사슬을 끊어내기로 하는 나의 결단이다.
발목이 자유로워졌다고 나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어디론가 무작정 떠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대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삶을 변화시킬까?
탐험가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공동체의 운명을 바꾸려는 이타적 관점으로 나와 이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혁신가들이다. 모험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먼저 나와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 발견하고 이해한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나서고 때론 위험도 감수한다. 삶의 변화는 탐험가처럼 현실을 인식하고 모험가처럼 나아갈 때 시작된다. 발목의 상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과거는 잊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결책을 찾는 탐험을 시작하자!
간단하다. 내면과 소통하고 나의 상태를 파악하고 문제를 발견했다면 해결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런 과정에서 생소한 경험을 할 것이고 나는 다른 형태의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때마다 변화를 흡수하는 약간의 용기를 낸다면 성장엔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처음엔 죽어라 힘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상호작용으로 인해 다른 힘이 존재한다. 삶의 변화는 경험치가 쌓인 임계점이나 변곡점을 지날 때 일어난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이불속에만 있으면 점점 나약해질 뿐이다. 나의 한계는 곤고해지고 가능성의 사라진다. 평생 발목을 묶인 코끼리처럼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더 이상 쫄보로 살 수 없다. 콜럼버스 신대륙은 아니라도 나의 미래를 향한 항해는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당장 숙소를 예약하고 기차표를 끊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탐험을 계획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