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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ve Jan 20. 2021

있는 그대로의 ‘예슬이’

웹툰 <화장 지워주는 남자>를 읽고

* 인용글은 모두 웹툰 <화장 지워주는 남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웹툰 <화장 지워주는 남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을 뽑으라고 하면 주인공인 ‘김예슬’일 것이다.


 예슬은 웹툰 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학생이다. 학생 때는 막연히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해서 정말로 공부만 열심히 해서 일류대에 들어왔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오니 이번에는 꾸미고 다니라고 주변에서 난리였다. 학생 때 공부만 했는데 지금 와서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아느냐고 했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다 꾸미고 다니고 있었다. 처음부터 예쁘게 태어났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예슬은 메이크업 숍에 가서 곤욕을 치른다. 그 과정에서 천재 메이크업 아티스트 ‘천유성’을 만나 함께 메이크업 쇼에 나가게 된다.


...누가 곤경에 처할 것 같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거...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하잖아...?


 예슬의 가장 좋은 점을 뽑자면 ‘평범한 사람의 선량함’이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예슬은 어떤 남자가 ‘약’을 탄 음료를 여성인 ‘희원’에게 주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다. 그것은 대단한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위험할 때, 도와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을 두렵다고 생각하지만, 예슬은 희원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용기를 낸다. 희원은 그런 예슬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다 보면 사실 그렇게 용기 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실감한다.

 나는 어릴 때, 예비용 우산을 항상 들고 다녔다. 그래서 가끔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갑자기 비가 내려 곤란해 보이면, 말을 붙여 같이 우산을 쓰고 가자고 하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바빠서, 내가 곤란해질까 봐 타인의 곤경을 쉽게 모르는 척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곤경보다 내 손해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삭막한 현실 속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건 어쩐지 기분 좋은 사실을 확인한 것만 같았다. 비록 그것이 웹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예슬은 울지 않았다. 더 이상 이깟 걸로 울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무력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저 이번 일도 유성 씨가 '운 좋게' 날 발견해서 도와준 것뿐이다. 이런 무력한 상황이 발생하면 난 누군가에게 구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걸까? 예슬은 생각했다. 어째서 사과도, 존댓말도,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남의 힘을 빌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인지.


 예슬에게 가장 공감한 장면은 예슬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벌어진 일을 다룬 것이었다. 예슬은 메이크업 쇼의 주제 때문에 공주가 된 기분을 느끼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온종일 돌아다니게 된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고, 그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가 말을 붙여왔다. 그때 택시기사는 이런 말을 한다. “옛날이었으면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확 보쌈이라도 하는 건데~”라고. 예슬이 그것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농담도 못 하겠다면서 택시기사는 대답한다. 이후 택시가 예슬의 집 방향으로 이동하지 않자 그녀는 극도로 불안감을 느끼고, 마침 유성에게 전화가 와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유성의 도움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일단락된다.


 아마 여성이라면 한 번쯤 택시에서의 불편한, 혹은 불쾌한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기억이 있다.

 몇 년 전, 바닷가 근처로 친구들과 놀러 가게 되어 택시를 타게 되었는데, 내가 그중 가장 덩치가 커서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당시 짧은 바지를 입고 있던 나에게 택시기사는 “허벅지가 튼실해서 남자들이 좋아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연히 기분이 꺼림칙했다. 그렇지만 괜히 놀러 가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택시기사가 기분 나쁘다고 승차를 거부할까 봐 그냥 적당히 웃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칭찬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지도 않은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해서 왜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결국, 나는 이 일을 하나의 기분 나쁜 해프닝으로 넘겼지만, 예슬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부당함을 억울하게 느끼고, 화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더 나은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스스로 고민한다. 나는 그런 발전하는 예슬의 모습이 좋았고, 인상 깊었다. 내가 공감을 했던 이야기였던 만큼 더욱 예슬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저는..."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저는 화보 작가가 되고 싶어요. 사진을 찍고 싶거든요."


 예슬은 메이크업 쇼를 진행하면서 유성이 사실 메이크업 쇼를 망치기 위해 참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일에 유성뿐만 아니라 대기업 ‘GC’의 전무이사인 유성의 누나, ‘천민성’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기업 ‘GC’ 내부에서 후계자 싸움이 있는데, 민성이 여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아버지가 또 다른 남동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려 했다. 그 과정에서 민성은 본래는 자신의 사업이었던 메이크업 사업을 그에게 강제로 넘겨주게 된다.

 민성은 메이크업 사업의 화려한 출발을 위한 메이크업 쇼가 망하면 자신이 후계자 자리를 견고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예슬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민성은 메이크업 쇼가 망한 이후, 자신이 새로 론칭할 의류 사업의 모델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러나 예슬은 거절하고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이 장면에서 나는 예슬이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높은 사람을 만나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도 대기업의 지원을 받은 일이 더 성공을 향한 길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슬은 메이크업 쇼를 진행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올곧게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예슬을 보면서 나는 더욱 응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 가면 다 예뻐져."
"지금은 공부만 해."
"야! 그런 건 대학 가서도 다 할 수 있어. 허튼짓 말고, 알았지?"
...그 말을 들은 지 수십 번. 나는 여전히 예쁘지 않다. 뭐 어때? 지금이 좋다! 그걸로 됐다!


 메이크업 쇼의 투표 조작이 밝혀지며 그것이 흐지부지 끝나고, 예슬은 재능을 인정받아 수습 사진작가로 인턴을 시작하게 된다. 그 인턴 일을 하며 민성이 새로 론칭할 의류 사업 모델을 찍는데, 그때 예슬이 찍은 화보 사진이 선택된다. 이후 그 의류 사업의 모델을 뽑기 위한 패션 서바이벌 쇼의 첫 방송을 보러 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마지막 장면의 인상 깊은 점은 역시 예슬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슬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은 하지 않고, 안경을 쓰고, 편안한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행복하다는 듯 웃고, 힘차게 앞을 향해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화장하고, 예쁜 옷을 입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행복하다면 그런 삶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장을 하지 않고, 편안한 옷을 입는 것 역시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활짝 웃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노라고 말하고 있다. 평범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아름다워지지 않아도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고, 그런 힘을 이 웹툰을 읽는 독자들도 가지고 있다고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예슬처럼 화장하지 않고, 편안한 옷을 입고 다닌다. 그런 나도 행복하고, 행복할 수 있다. 작은 가게에서 일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삶도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산다고 누군가에게 남루하다며 손가락질받고, 수군거림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좋으니까. 내가 이것을 행복이라고 느끼니까.

 그러니 부디 이런 삶을 산다고 자신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기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한 번쯤은, 특히 여성이라면 이 웹툰을 꼭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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