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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ve Jan 20. 2021

권선징악이란 무엇인가?

웹툰 <가담항설>을 읽고

* 인용글은 모두 웹툰 <가담항설>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걸 미련이라고 부르면 미련이 되겠지만, 난 이걸 희망이라고 불러. 별들은 작고 멀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 자리에 존재해.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지."


 한창 사춘기 시절의 나는 ‘권선징악’이 대단히 지루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했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 보기를 좋아했고, 당시에 내가 보았던 만화들은 악이 승리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별로 주인공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선’한 역할이라는 이유로 ‘악’을 무조건 이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사춘기 시절쯤에는 사연 있는 악당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늘어 더욱 그런 생각을 굳게 한 것 같았다. 선한 역할을 하는 이들은 너무 쉽게 사는 것 같았다. 쉽게 커다란 힘을 얻은 것 같았고, 쉽게 뜻을 같이할 동료를 얻은 것 같았고, 쉽게 승리를 거머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 나는 악당에 몰두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그때와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을 살아보니 선량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왜 선한 이들이 쉬워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초등학교 도덕책에나 나올 법한 말도 지키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침묵할 때가 많아졌다. 옳지 못한 일을 보아도 내게 피해가 올까 봐 두려워하고, 큰일이 아니라면 모르는 척할 때도 있었다. 너무 큰 실수가 아니라면 적당히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었다. 의도가 어떻든 남과 싸우고 부딪히는 건 매우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다. 학생 때야 같은 교실 안에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으니 지지고 볶았다지만, 성인이 되면서 모두와 친해질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나와 맞지 않은 이들과 부딪히지 않고 멀어졌다. 그게 어른이 되는 것이고,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도 분명 있었다. 자신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잘사는 세상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무릅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고, 내가 어릴 적 쉽게 사는 것 같다고 말한 ‘선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제 선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안다.


 웹툰 <가담항설>은 그런 ‘선한 사람’들이 ‘악’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웹툰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소원을 들어주는 종이인 ‘천동지’를 둘러싸고 악한 세력이자 세상의 신(神)인 ‘신룡’의 무리와 선한 세력인 ‘복아’의 무리가 대립하는 것이 주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웹툰을 좋아하게 된 건 내게 마치 이 작품이 한국 고전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장르가 판타지인 만큼 역사적 고증이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고전 시가를 인용하는 등 우리나라의 문화가 크게 녹아 있는 느낌이라 굉장히 두근거리며 매주 기다렸었다.


 웹툰에서는 절절하게 선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지키고,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노래한다. 피를 쏟아내면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선을 노래하며 선의 승리를 굳게 믿고, 결국 승리까지 끌어낸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서 어떻게 선에 대해서 절절하게 노래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폐하. 어찌 단순히 육체를 보호하는 것만이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폐하의 양심입니다. 저는 폐하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양심은 인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양심은 어둠에선 길을 밝히는 등불이고, 인생의 긴 여정 속에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이정표입니다."
"하지만 양심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건 그때 가서 다시 길을 찾으면 된다."
"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일만이 있는 줄 아십니까. 반드시 처절하게 후회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신룡’은 사랑하는 ‘백매(갑희)’의 행차를 위해 호위로 ‘하난’과 ‘동죽’을 붙여주었다. 신룡은 그들에게 백매에게 조금의 위협이라도 주는 이가 있으면 일가를 몰살하라는 명을 내린다. 백매가 자신의 오라버니인 ‘갑연’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연에게 악감정이 있는 이들의 습격을 받아 하난과 동죽이 모두 죽인다. 그러다가 습격에 참여하지 않은 모자(母子)를 발견하고, 이들을 궁으로 데려간다. 하난은 그들의 자초지종을 들어야 한다고 신룡에게 말했지만, 신룡은 명령을 어긴 하난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래서 동죽에게 화살이 담긴 통을 잔뜩 주며 그 어미에게 화살을 쏘되 같은 곳을 맞추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죽은 그 명령을 따랐고, 하난은 화살을 다 쏠 때까지 그 어미가 살아 있기만 하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지지만, 신룡은 화살이 담긴 통을 더 가져오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그것에 대해 부조리함을 느끼고 하난은 신룡에게 눈물로 충언한다.


 현대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걸 멍청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양심을 지키지 않고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이들은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으니, 양심을 지키는 나는 손해를 보면서 사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사회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아갈 것을 교육한다.

 법의 바깥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끝까지 엄벌하려고 노력한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하면, 처벌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힘을 모은다.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쉽게 이득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다시는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이 없게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결국, 사회는 악을 배척하고, 처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것이 작품에서 말하는 ‘양심’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 부분은 작품 내에 가장 큰 복선이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런 순간에도 양심을 지키지 않는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처절하게 후회로 돌아오기 마련일 것이다. 마치 죽음과 같지 않을까. 사람은 모두 죽는데도 정작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큼은 죽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당연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업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난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아니, 그럴 리가.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잃을 게 없는 게 아닌, 애초부터 가질 수가 없는 삶. 넌 이제 다시는 소중한 것을 만들 수 없을 거야. 소중한 걸 만드는 게 두려워질 테니까."
각인을 새길 수 없어.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걸 어떻게 인정해? 내가 열등감과 질투로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걸 어떻게 인정하지? 내 가족들이 죽은 게 전부 나 떄문이라는 걸 어떻게 인정할 수 있어! 그리고 또다시- 이 전부를 인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나를... 어떻게...!! 진실을 정면으로 볼 수가 없어. 진실이 너무 두려워.
"자, 어서 나를 쏴. 활은 절대로- 스스로를 겨냥하는 법이 없으니."


 ‘복아’ 일행은 다들 크게 다쳐 ‘영호’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영호의 집에 머물면서 그가 예전에 궁에서 일했고, 동료를 배신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복아 일행 중 ‘홍화’가 어째서 처음 보는 자신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자, 영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수련’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 후, 복아 일행을 찾아온 암살자들이 영호의 집을 습격하게 된다. 그들을 막아내면서 영호가 ‘각인’이라는 힘을 사용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사용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함께 싸우던 복아 일행 중 ‘정기’는 언제 영호에게 각인을 사용할 수 있느냐며 크게 상처 입은 홍화를 보호한다. 그 순간에 영호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어릴 때 나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이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천성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굴어도 되는 줄 알고 살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날카로운 말을 너무 쉽게 내뱉었다. 내 말에 상처받았다는 말에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친구를 했느냐며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내가 못된 사람이었던 것에 비해서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 줄 모르고, 내가 잘나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주 친한 친구와 절교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게 울면서 더는 나의 행동과 말을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나는 정말 그 친구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 말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나쁜 것이었다고, 내가 이 관계를 망쳤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굽히지 못하고, 나는 좋은 친구를 그렇게 쉽게 잃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그렇게 힘들었으면 진작 말해서 고치게 해야 했던 것이 아니냐고 그 친구를 원망까지 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럴까. 나는 이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다. 거기다가 연출도 상당히 인상적인 편이었다. 바를 정(正)이라는 각인을 화살에 새기던 영호는 더는 각인을 새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영호가 다른 사람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데, 영호의 뒤에 바를 정이 새겨진 과녁이 있었다. 영호의 모든 상황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또한 잘 표현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예전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웹툰을 보면 작가가 선과 악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하고, 그것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생각 없이 지나가던 선과 악이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삶을 그저 흘러가게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작품 내에는 더 좋은 장면들도 많이 나온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선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혹은 대범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작품 내에 나오는 악은 사연 있는 악이지만, 그런데도 선을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아마 악당에 몰두하여 작품을 보던 시절에 이 작품을 보았다면 선에 대해 쉽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니까 말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선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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