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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ve Jan 20. 2021

다른 삶을 살아온 ‘네 명의 여성’

웹툰 <가담항설>을 읽고

* 인용글은 모두 웹툰 <가담항설>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웹툰 <가담항설>에는 크게 ‘네 명의 여성’이 나온다. 그들은 암울한 시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은 크게 보면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그것만 보기엔 참 애틋한 이들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떤 꽃이 향기로운지, 어떤 꽃이 아름다운지를 알게 된 것은 지식이겠죠. 그걸 알려고 했던 건 가장 아름다운 꽃을 찾으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정말 예쁘고 향기로운 꽃을 받아서 기뻤어요. 하지만 그건 이 꽃이 단지 숲에서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에요. 왜 저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다 주셨나요?"
"그리고 깨달았죠. 그동안 나는 타인의 마음에 맞는, 타인의 목적을 위한 삶을 살면서 한 번도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 벌을 받게 했다는 것을. 계기는 단순했지만 감정은 강렬했죠. 그리고 저는 결계를 풀었어요."
“같은 슬픔조차 사실은 전부 달라요.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 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의 결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예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서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 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


 ‘홍화’는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장사’이다. 그렇지만 여자 장사는 재수가 없다고 하여 그녀의 어머니가 직접 사당패에 팔아넘긴다. 자라면서 힘이 세지는 장사이기에 사당패에서는 ‘결계’를 치는 사람을 두어 가두어 키운다. 그렇지만 홍화는 공부하여 결계를 벗어날 힘을 얻게 된다.

 그런 그녀는 사당패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정인이 생겼다. 그의 부탁으로 그의 어머니를 돌보면서 과거에 합격한 정인이 자신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복아’ 일행과 만나게 된 것도 이 시점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정인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죽임을 당하여 목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모자라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그 어머니의 목까지 가져오라고 교지가 내려졌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를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마저 잃게 된다. 그녀는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복아 일행과 함께 한양으로 가게 된다.


 홍화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복아 일행 중 하나인 ‘정기’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자 홍화가 그 답을 주는 장면이다.

 어릴 때 공부하는 이유는 특별히 없었던 것 같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고, 남들도 하니까. 그리고 주변에서 하라고 하니까 했다. 나는 평범한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공부를 해서 대체 어디에 쓰냐는 생각도 많이 했다. 다만 요령은 나름대로 있었던 터라 성적이 나쁘지 않았고, 주변에서 칭찬하니까 그 기대를 위해서 공부를 이어갔던 정도였다.

 그런 내가 공부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당시 필수 전공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을 전부 교양 과목으로 채웠었다. 교양 과목으로 무엇을 배울지 고민하는 그 시간이 매우 좋았다. 내가 배우고 싶다고 스스로 인지했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는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 남들은 과제 하는 것이 너무 싫다고 투덜거릴 때, 나는 과제 하는 것이 매우 기뻤다. 정해진 답이 아니라 내 생각을 쓰라고 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울었던 적도 있었다.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것을 공부해야 했고, 그 연장된 공부도 아주 즐겁고 기뻤다. 밤새도록 내 생각을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시키는 데 필요한 자료를 찾아 읽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가끔 뜬금없이 쓰일 때도 있다. 그래서 그때부터 뭔가 배우고 익히면 언젠가 어딘가에든 쓰게 된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홍화도 그랬을 것이다. 갇힌 그 결계 안을 자신의 세상으로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그저 숨만 쉬고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복아 일행을 만나 자신의 힘을 그들에게 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에 정기와 함께 잘 지낸다는 소식을 복아에게 전하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그놈 목을 내놔!! 놈은 우리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던 내 언니를 죽인 원수다. 그러니 목은 내가 가져가겠어!”
"무남독녀 외동딸의 여동생은 무슨 정신 나간 여동생이야?"
“각인된 칼… 각인사들도 죄 죽어나가고, 장사도 없는 마당에 너 같은 계집애한테 이런 각인을 새겨줄 사람이 없을 텐데. 이 칼은 어디서 났지?”
“내가 새긴 거다! 언니가 죽고 난 후, 오로지 저 자식의 목을 잘라 언니의 무덤에 가져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놈의 목은 반드시 내가 가져가겠다!!”


 ‘초을’은 태어났을 때부터 얼굴에 흉터가 심하게 있어 집안에서 없는 자식으로 키워졌다. 작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언니와 사이가 각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언니는 시집을 갔다가 남편에게 맞아 죽고, 가족들은 모함당해 끌려가 죽었다. 집안에서 없는 사람처럼 자란 초을만 살아남아 언니의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다.

 언니의 복수를 위해 형부의 집으로 숨어들었지만, 초을보다 먼저 ‘암주’라는 자가 형부를 죽여 복수가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형부의 머리라도 가져가려고 하지만 암주는 녹록지 않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제압당하게 되는데, 암주는 그녀가 기이할 정도로 기척이 없는 것과 ‘각인’을 새길 수 있는 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따라오면 형부의 머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자신의 주인인 ‘갑연’에게 데려간다. 갑연은 그녀에게 언니를 죽이라고 시킨 사람을 아직 못 죽였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복수를 갑연이 도와주고, 그녀는 갑연의 수하가 되어 살아가게 된다.


 초을은 작중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초을을 거두어준 갑연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사람을 잘 다루는지에 대한 증명이자 주인공 일행의 위험 정도가 역할이겠다. 그렇지만 초을은 분명히 암흑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암흑 같은 세상 속에서 유일한 빛이었던 언니를 잃고, 언니의 복수를 끝내자 그것을 도와준 인물을 위해 살아간다. 나는 이 부분을 보면서 인간은 복수만을 위해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복수만을 목표로 사람이 살아간다고 해도, 사람의 삶은 복수 이후에도 이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갑연에게 감사한 것도 있겠지만,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새로운 이유를 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가족 중 자신에게 빛 같았던 언니를 잃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봐준 갑연에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악의 편에 섰던 만큼,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흉터가 자신을 특정하여 갑연에게까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갑연에게 돌아간 그녀의 머리에는 흉터보다 더 큰 화상이 자리 잡은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한다. 비록 악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갑연에 대한 신의를 가졌고, 그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도 악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복아야, 복아야!! 복아야!! 나… 과거 시험 봐야 해. 알잖아, 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도 알아.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러니까 제발… 너의 헌신이, 나의 노력이, 우리의 지난 모든 날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지 마...”
“복아야. 강해져야 하는 이유는 약하면 안 되기 때문이니?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약점은, 오로지 완벽한 불행일 뿐일까? 약한 건- 악한 거니? 인간은 누구나 약해. 어느 부분이, 어느 순간이, 반드시 약해.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란 건 없어. 하지만 나의 약점은, 나의 불행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게 만들지. 그리고 그건 날 강하게 만들어. 네가 소중하니까. 너를 위한 강한 내가 되는 거야.”
“알아요. 사실 전부 알고 있어요. 도련님은 누구보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끈기 있는 사람이란걸. 강한 건 도련님이고 약한 건 저라는 걸. 도련님을 혼자 보낼 수 없는 게 아니라, 떠날 수 없는 게 저라는 것을…!”
"복아야. 우린 오랜 시간 서로에게 둘 뿐이었지. 그동안 나의 세상이 훌륭했다면 그건 네가 훌륭했기 때문이야. 너는 나의 세상이고, 나는 너의 세상이니까. 우린 세상의 일원이자 그 자체야. 하지만 같은 고통도 사람에 따라 견뎌낼 수 있는 정도가 다르고 어떤 고통은 개인이 도저히 극복해낼 수 없어. 그때 우리가 서로의 약한 순간을 위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약할 수밖에 없는 데도, 평생 약해지는 걸 두려워하며 살아야만 해.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의 손을 잡으러 가려 해. 과거시험은 그 길의 과정일 뿐이야. 그래서 과거를 보러 가는 거야. 하지만 그건 너의 신념이 아니니까 너를 데려갈 순 없어. 나는 나의 신념을 내가 이루기 위해 궁으로 가는 거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의 신념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야. 그 길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내가 되는 것. 그게 나의 신념이야."


 ‘명영’은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더는 그녀를 키울 수 없다고 여겼던 탓에 그녀의 어머니는 초승달이 뜬 밤에 그녀를 버리고 간다. 그때, 그녀는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인 ‘호선’을 만나게 된다. 호선은 어린 명영과 이야기하고, 자신의 다음 대를 잇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호선은 고매한 선비에게 그녀를 맡고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을 지운다.

 그녀는 새로운 집에서 남장하고 자란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도련님’이라고 불릴 때쯤에 주인공인 어린 ‘복아’와 만나게 된다. 처음에 복아는 그녀가 남자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하지만 함께 자라면서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그런 그녀는 언제나 키가 아주 많이 자라면 과거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고, 복아는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천동지’에 자신의 소원을 적어 과거를 보러 가려고 한다. 그렇지만 복아가 그것을 저지하고, 명영 대신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자처한다. 대신 그는 그녀에게 공부는 체력이니 체력 훈련을 잊지 말라고 하고, 자신은 왼손만 쓰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세상이 되어 자란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과거를 보러 가게 되지만, 명영은 복아를 돌려보낸다. 그렇게 복아는 마을로 돌아가 마을 입구에 있는 돌에 ‘익히고 깨달은 것을 왕에게 알리고 싶다’는 소원을 빈다. 그 소원으로 돌이 ‘한설’이 되면서 가담항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명영은 주인공인 복아와 가장 밀접한 데다가 작가님께서 직접 ‘희망을 품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캐릭터’라고 언급한 만큼 비중이 상당히 큰 편이다.

 그녀는 흡사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다. 깨달음의 깊이가 깊고, 사람이 다정하고 해맑아 그 안에 어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처음 그녀가 누가 봐도 자그마한 여성으로 보이지만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갔다는 복아의 말을 봤을 때, 얼마나 해맑은 인물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도 과거를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깨닫고 좌절한 적이 있었다. 소원을 이뤄주는 종이인 천동지가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라 마음대로 쓰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대려 했을 정도이니 그 좌절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였다면 그 상황에서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법이 바뀌어 여성도 과거를 치를 수 있다고 하지 않는 이상 누가 봐도 답이 없는 문제니까 말이다. 아마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한 공부의 의미를 잃고 공부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절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어 식음을 전폐하거나 입신양명 이외의 다른 길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명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좌절했지만 다시 일어났다. 물론 그렇게 다시 일어나는 것에 도움을 준 복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명영 자체도 강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작중의 명영과 복아를 보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저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누군가의 세상이 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서로를 생각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관계의 건강함과 강함에 대해 깊게 감명받았다.

 앞서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이전에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남들이 보면 어린 애들이 싸웠거니 하겠지만, 나에게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상처이자 업보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가 실패했던 인간관계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실패한 인연에 미안함을 느끼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런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내가 명영처럼 누구나 본보기 삼을만한 사람이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새삼스러운 다짐을 하며, 나를 돌아보게 해주어 명영에게 더욱 정이 가게 된 것 같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명영과 복아가 함께 있는 장면을 보며, 두 사람이 행복해서 기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폐하께 저는 살아있는 사람입니까?"
"백매야, 나는 너를 그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다."
(중략)
"폐하... 진심도 변합니다. 상황이 진심을 압도합니다, 폐하."
“구슬이 든 상자에 쇳조각을 넣고 흔들면 구슬엔 상처가 잔뜩 나고 어떤 구슬은 깨져버리기도 하는데, 가끔씩은 이렇게, 제법 매끈한 구슬이 나올 때가 있죠. 저는 이것을 운이 좋았다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훌륭한 것이라고 부르더군요. 이 구슬 안이 깨져있는지 어떤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물론 이 구슬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깨진 구슬을 이것과 비교하며 조롱할 때 얼마나 유용합니까.”
“너와 난, 모든 것이 똑같아. 너는 곧, 나란다. 네가 나로 태어나, 나와 똑같은 삶을 살았다면, 너는 내가 되었을 거다. 너만은 달랐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너의 오만이지. 만약 네가 정말 나와 달랐다면, 너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을 거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는, 권세를 위해 올라온 곳이 아닌, 생존을 위해 밀려온 곳이니까. 단 한 명만이 서있을 수 있는 자리지. 세상은- 모든 불행을 침전시켜 아래로 흘려보내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가 그 모든 고통을 껴안고 죽는 구조다. 너희가 당혹스러워하는 이유는, 내가 그 구조 속에서 순순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지.”


 ‘백매(갑희)’는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랐다. 오라버니인 ‘갑연’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그에게 먹일 고기를 얻기 위해 부모는 백매를 기생집에 팔아버린다. 갑연은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어린 백매를 빼 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부모는 다시 그녀를 부잣집 첩으로 팔아버린다. 그런 그녀를 다시 빼내기 위해 온 갑연에게 그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오라버니를 위해 팔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더는 어떤 것도 기대하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갑연은 그 말을 듣고 부모를 모두 죽이고, 독약을 들고 와 그녀에게 스스로 죽으라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독약으로 본처를 죽여버린다.

 이후 갑희는 자라 몇 번 더 혼인했지만, 남편이 잇달아 죽어 기방으로 들어간다. 그 기방에서 그녀는 왕을 만났고,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사람을 많이 겪은 만큼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은 그녀에게 꼭 중전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진심 어린 약속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왕마저 신(神)인 ‘신룡’ 앞에서는 벌벌 떨며 어떤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런 그녀를 본 신룡은 자신이 아끼던 ‘춘매’와 그녀가 닮아, 그녀를 춘매와 비슷한 외형으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백매’라는 이름을 주어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백매는 주인공과 대적하는 ‘악’의 세력인 신룡과 가까운 데다 그 자신도 상당히 서사가 깊어 비중이 높은 인물이다. 특히 앞서 말했던 명영과 대적하는 인물이기에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니 그녀가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명영과 대립할 때인 것은 당연할 것이다.

 백매는 명영에게 자신과 그녀가 모든 것이 똑같다고 말한다. 자신의 신념을 믿고 올곧게 나아가는 명영에게 그녀도 자신처럼 살았다면 자신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명영이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복아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언제나 진심을 보여주고, 변치 않는 존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명영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백매의 곁에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 백매에게 신룡이 자신이 변치 않는 진심이 되겠다고 했지만, 과거에 수많은 사람에게 배신당한 백매는 그마저도 믿지 못했다. 그래서 명영도 백매에게 자신이 곧 그녀임을 안다고 말한다.

 나에게 백매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그를 딱하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그녀의 악행들을 모르는 척하거나 묻으려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저지른 악행으로 이미 그녀는 악이라고 정의되기 충분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도 명확하다. 다만 어째서 악이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와 동시에 악한 사회의 해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백매는 피해자였다.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존재였고, 그러면서 수없이 상처 입었다. 그렇지만 그런 백매가 힘을 잡자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다른 이들을 수없이 상처입히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것이다. 악한 사회는 끊임없이 피해자를 생산하고,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다시 피해자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뉴스에서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을 가해하던 부모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이야기는 안타깝지만, 그가 살인했다는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탓하기는 참 모호하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사람들은 힘을 모아 선함을 추구하려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다. 사회는 이렇게 조금씩 자정이 되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작가님께서는 후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해서 언급한다.

 인간은 모든 감정과 선악을 전부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모든 내면에는 선이 있으니 사용하고자 노력하고, 악이 있으니 조심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순수한 선은 성장을 통해 필연적으로 소멸하며 악을 반드시 마주하게 되고, 그 악을 알게 되면서 선의 진정한 힘과 원리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지금까지 봐온 작품 중 가장 내가 생각하는 ‘권선징악’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은 대체로 ‘선이 이기고, 악은 물리치는’ 개념에 가깝게 보인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는 의미가 가장 좋다고 생각해, 악이라고 반드시 죽음에 이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오히려 사회가 악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법을 통해 징벌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작품은 악의 세력이 인간의 범위를 뛰어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백매는 서사적 이유로 자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어째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선물한다. 또 자신이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멍청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위로하며 더욱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선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거나 삶이 막막한 이들이 한 번쯤은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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