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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ug 29. 2023

<제33화> 촉의 후손들


263년 사마소가 촉을 정벌하는 과정은 예상과는 달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촉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종회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한 대장군 강유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고, 등애도 종회에 의하여 함거에 갇힌 상태에서 위관이 보낸 전속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제갈서는 종회에 의하여 함거에 갇혀 낙양에 보내진 덕분에 전화위복으로 목숨을 구하였고 훗날 진나라에서 위위까지 승진하였습니다. 종회가 강유와 모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위나라 장수들을 모두 가두고 다음 수순을 고민하였으나 갇힌 위나라 장수들이 탈출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촉의 수도인 성도가 무법천지가 되면서 대학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촉의 황제 후주 유선은 성도대학살의 혼란 속에서 태자 유선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마소는 유선을 집안사람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주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명을 내려 유선을 안락현공에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주었습니다. 또 비단 1만 필과 노비 100명도 하사하였습니다. 유선의 아들과 손자 중 3명을 도위로 삼았으며 그 외에도 후에 봉해진 촉의 사람들이 5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옛 촉의 번건, 장소, 초주, 극정, 장통 등도 위에 항복한 공로로 나란히 열후에 봉해졌습니다. 사마소는 아직 오나라가 버티고 있어서인지 촉의 유신들을 후대하였습니다. 


유선이 초주의 계책에 따라 등애에게 항복했을 때 항복문서를 극정이 작성했습니다. 후주 유선에게는 수많은 신하들이 있었지만 이제 망국의 군주가 되어 위나라의 낙양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자 촉의 대신들 가운데 유선을 따라갈 것으로 기대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직 극정과 장통 만이 처자를 내버려 두고 단신으로 유선을 따라가 시중을 들었습니다. 유선은 극정의 인도에 크게 의지했으며 그 덕에 행동거지에 큰 허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유선은 극정을 늦게 알게 된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유선은 낙양에서 사마소 세력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극정과의 대화 내용도 다 사마소에게 보고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소가 질문을 하면 유선은 극정이 시킨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유선의 답변을 듣고 사마소가 물었습니다.

“어쩌면 극정이 말해주었던 것과 똑같이 대답을 하시오!”

유선이 깜짝 놀라 사마소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진실로 말씀하신 내용과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비웃었습니다. 어리숙해 보이며 비웃을 사면서 의심을 피하는 것, 그것이 유선의 생존전략이었습니다. 유선은 273년 낙양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첫째 아들 유선은 성도대학살 와중에 죽었고 유선은 둘째 아들 유요 대신 방탕하다는 평가를 받던 6남 유순이 후사를 잇도록 하였습니다. 


 후주 유선의 태자 유선은 왕귀인의 소생이었습니다. 왕귀인은 장비의 큰 딸인 경애황후 장씨의 시녀였지만 유선의 승은을 입어 224년 자신이 시중을 들던 경애황후보다 먼저 유선의 장남 유선을 낳게 되면서 정식 후궁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223년은 후주 유선의 아버지인 선주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참패하고 백제성에서 와병 혹은 상중인 시기라서 유선의 불효 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게다가 223년은 유선의 정실인 경애황후가 황후로 책봉되고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황후의 시녀를 건드린 것도 비판거리가 되었습니다. 


경애황후의 소생은 기록상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경애황후가 사망한 237년에 후주 유선은 238년 서장자인 유선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다만 태자의 친어머니인 왕귀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차기 황후는 역시 장비의 둘째 딸이자 경애황후의 여동생인 장황 후가 차지하였습니다. 왕귀인의 행적은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으며 다만 황후 다음가는 지위인 귀인에 올랐다는 점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비의 두 딸은 모두 유선에게 시집을 갔고 장비의 장남인 장포는 아비보다 먼저 요절하였으르로 동생 장소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유선이 낙양으로 이주하자 장비의 둘째 아들인 장소도 함께 낙양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장남인 장포의 아들 장준은 등애가 면죽관을 공격했을 때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을 수행하여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사마소가 유선에게 연회를 베풀고 촉의 노래를 부르자 촉 출신들은 모두 슬픔을 느꼈으나 유선만은 즐거이 웃으며 태연하였다고 합니다. 사마소는 측근인 가충에게 제갈량이 살아있더라도 보좌하기 어려웠을 터인데 하물며 강유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비웃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진의 습착지가 남긴 기록이었습니다. 습착지는 촉한의 신하 습정의 후손으로 ‘한진춘추’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감안할 때 항복한 군주나 그 후계자가 영민하거나 뜻이 높으면 반드시 그 목숨이 위태로웠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까지 반역으로 몰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유선이 엎드려 치욕스러운 목숨이나마 보전하고자 했던 것은 촉한의 명맥을 끊기게 하여 역사와 조상 앞에 덮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나 이미 성도대학살을 체험하고 태자를 잃은 유선이 자신에게 충성하고 따르고 있는 무리들의 애매한 죽음만은 면하게 하려는 충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황제로 있던 시절 유선의 이복아우 유영은 환관 황호를 미워하였는데 황호가 유선의 신임을 받고 유영을 참소하니 유선은 유영을 멀리하여 10여 년간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촉한이 멸망한 후 사마소의 위나라는 유영을 봉거도위에 임명하고 제후인 향후로 책봉시키고 낙양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선주 유비와 후주 유선이 다스리던 촉한은 멸망하고 동진에 의하여 통일되었던 익주는 동진의 사마씨가 황족들끼리 서로 잡아 죽이는 치열한 내전을 벌이는 사이에 서방에 있던 저족의 족장인 이특이 성도를 점령하고 성한(303~347)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성한 정권은 이특의 뒤를 이은 이웅이 정치를 잘하여 발전해 나갑니다. 이때 유영의 손자 유현이 난리 통에 익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 있던 성한의 황제 이웅이 유현을 유선의 작위인 안락공에 봉하였습니다. 한나라에는 조조, 위나라에는 사마의라는 권신이 있었듯이 347년에 동진의 권력자인 환온이 정벌군을 이끌고 익주를 공격하여 성한을 멸망시킵니다. 사마소가 촉을 공격할 때는 병력이 17만 정도의 대군을 동원하였는데 한온은 단지 7천 명의 병사로 점령하였다고 하니 성한의 방어력은 형편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당시 성한에서 안락공으로 지내던 유현은 건재하였으며 ‘위씨춘추’의 저자 손성을 만났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손성이 남긴 기록은 배송지에 의하여 삼국지에 추가되었습니다. 지금 유비의 후손을 자처하는 유 씨들은 대다수가 안락공 유현을 시조로 한다고 합니다. 


유선의 다른 이복아우 유리는 안평왕으로 책봉되었으나 244년 요절하였는데 부인은 마초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유리의 장자는 유윤이었으며 256년에 죽었고 유윤의 아들 유승이 후사를 이었으나 257년 사망하였으므로 모두 유선이 황제이던 시절에 사망했습니다. 유리의 차자 유집은 무읍후에 봉해졌다가 261년 아비 유리를 이어 안평왕에 책봉되었고 촉한이 멸망한 후 봉거도위에 임명되었고 향후라는 작위에 봉해졌습니다. 


관우의 장남 관평은 정사에 3번 등장하는데 관우가 조인이 방어하는 번성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금년에 많이 쇠약해졌다. 틀림없이 이번 싸움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오의 반장전에서는 손권이 관우를 정벌할 때 반장은 주연과 함께 관우가 달아나는 길을 차단했다. 그는 임저에 이르러 협석에 주둔했다. 반장의 부하 사마 마충이 관우와 관우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 등을 붙잡았다. 손권은 공로를 인정하여 의도 군의 무현과 자귀현 등 두 현을 나누어 고릉군으로 만들고 반장을 그곳 태수로 임명하고 진위장군으로 삼았으며 율양후로 봉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관우전에는 손권이 관우와 관우의 아들 관평을 임저에서 참수했다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오서 <오범전>의 기록에는 손권은 아침부터 해시계를 세우고 물시계에서 물을 떨어뜨리며 관우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정오가 다 되었는데도 관우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 오지 않자 오범에게 소식이 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오범이 “아직 시각이 정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지나서 바람이 일어 휘장을 흔들리게 하자 오범이 손뼉을 가볍게 치며 말했습니다.

“관우가 붙잡혔습니다.”

잠시 후 밖에서 병사들의 만세소리가 들려오고 관우를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손권은 그 공을 인정하여 오범을 기도위로 삼고 태사령을 겸하도록 했으며. 여러 차례 방문하여 점의 비결을 알고 싶어 하였으나 오범의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손권은 또한 여몽을 남군태수에 임명하고 잔릉후에 봉하고 일억 전의 금전과 황금 500근의 하사했고 육손에게는 우호군, 진서장군의 벼슬을 주고 작위는 누후로 승진시켜 봉했다고 합니다. 


차남 관흥은 형 관평이 아버지와 죽었으므로 아버지의 한수정후 작위를 계승했으며 시중, 중감군이 되었지만, 몇 년 후 죽었고 관흥의 적자 관통이 작위를 이었으나 요절하였고 관통의 후사가 없었으므로 동생인 관이가 한수정후의 작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왕은이 남긴 <촉기>에는 방덕의 아들 방회가 성도대학살 과정에서 관이와 관씨 일가를 찾아내 멸족시겼다고 하는데 신당서의 기록에는 당나라 덕종 시절 재상을 지낸 관파가 관흥의 후손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2001년 관우의 67대손 관중진이 발견되었는데, 족보에 근거하면 그는 관우의 장남 관평의 후손으로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이었으며 관평의 아들의 이름은 관월인데 방회는 성도에서 관우의 후손을 찾아 죽였지만 오나라 형주에 살던 관평의 후손은 살아남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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