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뷰 | tvN <구미호뎐> (2020)
* 지극히 주관적인, 오로지 제 시선에서만 바라본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에 정착한 구미호와 그를 쫓는 프로듀서의 판타지액션로맨스
지금껏 구미호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은 많았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KBS <전설의 고향>부터 시작해서 KBS <구미호: 여우누이뎐>, SBS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까지. 그리고 최근, 구미호 목록에 하나 더 추가됐다. 바로 tvN <구미호뎐>이다. 이 드라마에는 눈에 띄는 차별점이 있다. 바로 구미호가 남자라는 것! 구미호라고 하면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여우로, 사람을 홀리는 능력이 있는 상상 속 동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구미호는 대부분 여자였다. 그런데 남자 구미호라니.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설정을 뒤엎은 것부터 매력이 느껴지는 드라마였다.
<구미호뎐>은 한국 전통의 민담, 괴담, 미신, 전래동화 등을 엮어 하나의 세계관으로 구축해냈다. '여우가 시집가는 날 여우비가 내린다'는 설화처럼 '여우누이'의 결혼식 날 쨍쨍하던 하늘에 갑자기 비가 내린다. 여우누이는 여동생으로 둔갑해 가족들의 간을 빼먹었다는 전설 속 동물이다. 악귀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이자 길잡이인 '목장승'은 남지아(조보아)를 교통사고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또 다른 전설 속 동물인 '이무기'도 등장한다. 차가운 물속에서 1000일 동안 지내면 용으로 변한 뒤 여의주를 갖고 굉음과 함께 폭풍우를 불러 하늘로 날아간다는 이무기(이태리)는 지아, 이연(이동욱)과 대립하는 인물로 나온다.
전통을 살리면서도 현대와 적절하게 섞어낸 부분도 눈에 띈다. 총각을 위해 몰래 밥을 해주고 갔다는 '우렁각시'는 서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삼도 냇가에 앉아 죽은 자들의 옷을 벗기고 죄의 경중을 물었다는 '탈의파'는 이제 죄인들의 신상을 엑셀에 기록한다. 저승도 근대화가 일어나 삼도천이 아니라 '내세출입국관리사무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현대의 모습이 합쳐지니 새롭게 느껴지면서도 웃음을 유발한다. 구미호뎐의 세계관 참 탐난다. 아직 이야기화되지 않은 한국의 전통 설화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 세계관을 활용해 시즌제나 스핀오프 드라마를 제작하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cf) 11월 18일 자 <구미호뎐>이 결방하면서 이랑(김범)의 이야기를 담은 짧은 분량의 스핀오프 드라마 <구미호뎐: 못다 한 이야기>가 방영됐다고 한다.
로맨스가 가미된 판타지 드라마라서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먹히지 않을까? 문화권이 비슷한 동아시아에서는 <구미호뎐>의 세계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서양 문화권을 타깃으로 한 시즌제를 만든다면 한국인이 공유하는 괴담, 미신보다는 요괴에 집중해 문화할인율*을 낮추는 게 좋을 것 같다. 선과 악의 대립, 권선징악, 히어로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좋아하는 이야기니까.
그렇지만 이러한 세계관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아무리 한국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담과 요괴를 알고 있지는 못한다. 작가와 제작자는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많이 조사를 했겠지만, 일반인이 이를 모두 알고 있을 확률은 어떻게 될까?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불친절하기는 했다. 요괴의 특성도 모르고, 설화나 미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반인 시청자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붓다 보니까 드라마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 문화할인율: 한 문화권의 문화상품이 다른 문화권으로 진입하였을 때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어느 정도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을 문화적 할인이라고 하며, 그 할인되는 비율을 문화할인율이라고 한다. 문화할인율이 낮다는 것은 한 나라의 문화 상품이 다른 나라에 수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제목도 <구미호뎐>인데 주인공 이연에게서 구미호의 특징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들 구미호라고 하면 여인으로 변신하여 사람들을 홀리고 간을 빼먹는 여우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그려왔던 구미호들도 모두 그랬다. 심지어 구미호는 '몹시 매혹적이어서 남성을 쥐락펴락하는 여성'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연은? 이연에게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구미호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연이 '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왜 이연이 '구미호'여야 했는가.
기존의 구미호와 차별점을 두기 위해 구미호의 성별을 남자로 바꾸었다. 내가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남자 구미호에게 기대했던 것은 '여자 구미호와 달리 남자 구미호는 어떻게 사람들을 홀릴까?'였다. 테스토스테론 뿜뿜 풍기면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다정하고 세심한 면모를 통해 탄성을 자아낼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를 보니 '구미호'라는 이름만 가져왔을 뿐, 구미호가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나타나지 않아 아쉬웠다.
<구미호뎐>의 리뷰를 보면 여자 주인공 지아가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라는 평이 많다. 그러나 내가 느낀 바는 전혀 다르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나도 드라마 초반부에서는 지아의 캐릭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부모님을 찾겠다는 목표가 확실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행동을 한다. 부모의 죽음이 일반적이지 않기에 이에 관한 진실을 알고자 지아는 괴담 프로그램의 PD가 된다. 그래서 괴담이나 요괴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이성적이며 똑똑하다.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지아가 이연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지아는 겁 없이 일부터 저지르고 보는데, 그런 성격에 비해 처리 능력이 뒤따라주지 않는다. 요괴가 공격을 해올 때면 언제나 그렇듯 나타나는 한 사람, 바로 남자 주인공 이연.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구해주는 서사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지아가 벌려놓은 일을 이연이 해결하고, 이연이 지아를 구해주고, 지아 대신 이연이 요괴에 맞서 싸우는데 정말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일반인이 요괴에 맞설 수 없다는 건 안다. 아무리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요괴 앞에서는 무서워하는 게 맞다. 그래도 지아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아가 두려워하며 이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맞서 싸울 기세를 보여줬어야 한다. 요괴에게 돌을 던지든, 불을 지르든. 아무리 생각해도 신체적으로 지아가 이길 방법이 없다면 똑똑한 머리를 써서 탈출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어야 한다.
cf) <더 킹: 영원한 군주> 11회가 생각난다. 정태을(김고은)은 이림(이정진)의 계략에 빠져 대한제국으로 납치된다. 소금공장에 갇힌 정태을, 그러나 그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림의 수하들을 따돌리고 차를 몰아 문화수도 부산까지 질주하며 자신을 쫓아오는 차의 바퀴를 총으로 쏴버린다. 부산에 도착한 후에는 신년 인사 보내기 행사를 이용해 이곤(이민호)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린다. 이림의 수하들이 정태을을 잡으려는 순간, 이곤이 등장한다. 정태을이 소금공장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이곤이 한 건 딱 하나. 흰 말을 타고 타이밍 좋게 달려오는 것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정태을이 스스로 일궈낸 결과였다. <더 킹: 영원한 군주> 초반부에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정태을이 너무 멋있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다.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판타지 존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뱀파이어는 무덤에서 나와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무시무시한 악귀지만, 마늘이나 십자가를 보면 무서워하고 햇볕이 있을 때는 돌아다닐 수 없다. 해리포터는 볼드모트와 대립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지만, 저주가 걸린 마법 주문을 받으면 목숨이 위험하고 지팡이가 있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판타지 존재를 살펴본 이유는 이들에게 모두 '한계'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뭐, 어떤 판타지 존재들은 먼치킨일 수도 있겠다. 그 어떤 위협이 밀려와도 죽지 않고 끄덕 없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갈등과 위기에 처하고, 그것을 헤쳐나가려고 행동할 때 만들어지는 거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위기가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이연의 한계는 뭘까? 드라마 내에선 이연의 한계나 약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어 저승을 왔다 갔다 하고 요괴들을 제압하는 것만 봐도 이연은 능력치가 상당하다. 심지어는 백두대간을 다스렸던 전(前) 산신이라 쉽게 죽을 것 같지도 않다. 능력 MAX인 남자 주인공이 멋있기는 하지만, 이연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일이 없다는 게 문제다. 위기가 없다면 이연이 목표를 너무 쉽게 이루고, 그렇다면 드라마는 1회만에 막을 내릴 것이다.
주인공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계속해서 방해받고 도저히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나오는 긴장감이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따라서 <구미호뎐>에서는 이연 대신 지아가 계속해서 위기에 처한다. 600년 간 기다린 연인 지아가 위험에 처한다는 것은 곧 이연의 위기. 이연은 지아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고, 지아는 위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연의 등장을 기다린다. 지아가 해결해버리면 이연의 위기가 없어지는 거니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지아의 역할이다. 아마도 이연에게 한계가 없기 때문에 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꾸 지아가 위험에 처하는 게 아닐까 싶다. 긴장감을 높일 수 있는 명확한 ‘한계’가 이연에게도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tvN <도깨비>에서 저승사자 역할을 너무나도 찰떡으로 소화해낸 이동욱 배우가 구미호를 맡는다는 기사를 봤을 때, 나는 기대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거기다가 구미호에 맞게 머리도 붉은색으로 염색했다는데 이동욱 배우가 해석할 구미호가 너무 기대됐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조금 아쉬운 지점이 많았던 드라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관만큼은 너무 탐이 나는 드라마, <구미호뎐>이다.
tvN <구미호뎐>
2020.10.07~2020.12.03 / 16부작
최고 시청률 5.8%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 하우픽쳐스 / 연출 강신효, 조남형 / 극본 한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