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언니랑 술 한 잔 할래?
나는 대한민국 평범한 30대 미혼 여성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지방 국립대 공대 아름이로 졸업하여 대기업 전자 회사에 취직했고, 올해 직장 생활 13년 차 직장인이다. 치열하게 밥벌이를 하러 다닌 덕분에 나름 회사에서 잘 지내고 있다. 뭐.. 이 부분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숙소 잡고 삼일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라다. 어쨌든 나는 이 사회에서 적어도 1인분의 몫은 하고 살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 다니면서.. 그것도 13년 차 이른 나이에 관리자 직급으로 일하고 있지만, 나는 집도 없고 차도 없다. 사회에서 보기엔 가난뱅이다. 대신 나는 남들 하는 경험들은 다 하고 다니고, 남들이 안 하는 경험들도 하고 다닌다. 친구 말로는 돈을 하늘에 뿌리면서 악착같이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 다니고 있고, 1년에 한 번은 준비해서 10km 마라톤도 나가고 있다. 그리고 여름이면 워터밤에 가서 방방 뛰어놀고, 겨울이면 핼러윈 파티를 준비한다. 이렇게 공대 아름이는 기깔나게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 보는 여자 후배한테 연락이 왔다. 같이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싶다는 수줍은 데이트 신청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보낸 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린 같이 일한 적도 없고,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왜 나랑?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용기를 내준 후배를 실망시킬 수 없어 같이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자리에서 내가 가장 처음 물어본 건 '왜 나한테 밥 먹자고 연락했어요?'였다. 그랬더니 후배가 말하기를 요즘 회사 생활에서 고민이 많은데, 동기들이랑 이야기해 봐도 안 풀리고 답답해하고 있으니까 알고 지낸 다른 선배가 나를 찾아가 보라고 이야기해 줬다고 했다. 나야 워낙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이야기하고, 듣는 거 다 좋아해서 후배에게 연락 잘했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많은 이야기들을 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고, 그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만남을 유지하면서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마시러 다니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원래는 선배들이랑 주로 술을 마시러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후배가 한 명이 되고, 두 명이 되고, 세 명이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들을 들어주다 보니 어느 후배가 이런 이야기들을 글로 써보라고 말해줬다. 이런 솔직한 이야기들이 필요한 사람이 많을 거라고, 그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을 했다. 내 생각에 나는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도 조언을 구할 곳이 별로 없었다. 유튜브나 책에 나온 사람들은 다들 너무 대단했고, 회사에서는 잘 살고 있는 나와 비슷한 업무를 하는 여자 선배가 거의 없었다. 정확히는 공대를 나온 연구직 여자 선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자기개발서들도 많이 읽지만 공감하지 못한 경험들이 많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일반인으로서 나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내 이야기들, 그리고 회사 생활을 잘하고 있는 공식 석상에서는 말할 수 없는 선배로서의 솔직한 이야기들, 밀레니엄 세대이지만 관리자급에 있으면서 후배들에게 해 줄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에 대해 글로 적고 싶었다.
생각보다 요즘은 정신과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물질적으로는 많이 풍요로워졌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힘들게 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나를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 보고 풀리지 않은 문제에 실마리를 찾기를 바라고, 마음이 병들었다면 조금이라도 풀리긴 바란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마음이 꺾여가고 있을 때..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 마디 건넬 수 있는 친구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