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도, 게으른 완벽주의인가요?
여느때와 같은 수요일 오후 3시, 항상 가지고 다니는 레몬색 노트를 펼쳤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맘에 쏙 들어버린 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마치 챗GPT가 답변을 내놓는 속도로 빠르게 머릿속에서 확장되고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얼른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사명감마저 일으키면서.
노트를 빠르게 뒤적여 [10월 아이디어]라고 적힌 부분을 펼치자마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양쪽 페이지가 모두 빼곡한 글씨로 차있었던 것이다. '흩어진 기록을 한데 모아주는 온오프통합 기록 앱', '유휴공간(옥상) 수익화 플랫폼', '안쓰는 회원권 p2p거래 서비스'... 분명 쓸 때는 눈이 반짝였던 것 같은데, 서랍에 넣어두고 안쓰는 연필처럼 낡아버린 모양새였다.
스무개도 넘는 이 아이디어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 가는데,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 많은 아이디어 중 단 하나도, 제대로 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어 내려가는 창의적인 나'라는 이미지에 중독된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오늘의 아이디어가 노트에 적히고, 어제의 아이디어가 희미해지며 이 페이지가 꽉 차버리는 동안에도 나는 실행이라는 적극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아이템은 공부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이건 아무래도 자본금이 좀 많이 들겠는데?"
"우선 리서치부터 자세하게 해보자. 어디보자, 관련 책이.."
...
그럴듯한 핑계였다. 하지만 사실은? 실패가 두려웠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나는, 부족한 상태로 시작하느니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알게 모르게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다 제풀에 지쳐 프로토타입을 만들기도 전에 혼자서 단정하고 보류 혹은 중단해 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일단 부딪혀 보면서 고객의 반응을 보며 빠르게 수정해 나갈 수 있는 게 "유일한" 무기인 창업에 뛰어 들기로 결정했음에도, 내 성향은 너무나도 모순적으로, 그리고 뚝심있게 완벽주의를 외쳤다.
그러다 어느 날, 무의식에 깊게 뿌리내린 완벽주의에 실금이 간 사건이 있었다. 때는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소개하기 위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읽게 된 날이었다. 그 유명한 구절, 외우지 않으려 해도 마음에 콕 박혀버린 문장을 지날 때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누구든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알에 갇혀 있는가?
마음 한켠이 쿡 찔렀다. 알에 실금이 생겼다. 그리고 내가 깨뜨려야 할 건 '완벽한 준비'라는 허상이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나를 빠르게 성장시켜줄 동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실패가 익숙하지 않음을 넘어 두려웠던 나는, 나를 완벽주의라는 틀에 스스로 가두고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목표의식이 생겼다. 비록 이제서야 내 알에 생긴 이 작은 실금으로 세상 밖으로 나갈 순 없겠지만, 실금을 만든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
데미안을 완독한 그 날.
페이지 끝까지 쓰여 빈 공간이 없는 레몬색 노트를 덮고, 노트북을 열어 노션에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었다. '실행 계획'이라고 이름붙인 페이지였다. 더는 완벽한 준비라는 허상을 좇지 않기로, 완벽해질 나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실행계획'이라는 페이지를 만든 순간은 실제로, 그 결심의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그 첫걸음 덕에 지금 이 글이 누군가의 화면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이야'라는 마음으로 브런치 첫글의 첫줄을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던 어느 날, 문장이 아닌 그 망설임을 지워 보기로 했다. 평소보다 결연한 마음으로 백스페이스 키도 절제한 채 써나간 이 글은, 여러분의 시선을 따라 마지막 줄을 향해가고 있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혹시 나처럼 알 안에서 망설이고만 있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인가?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나만 알아볼 만큼 작아도 괜찮으니,
내 알에 실금 하나를 내어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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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드디어 브런치 첫 글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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