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에 나는 현금을 챙긴다. 글 쓰기 수업 강의실과 지하철역 사이에 있는 과일가게에 가기 위해서다. 다양한 품종의 과일과 채소가 갖춰져 있고 저렴하기까지 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현금만 받는다.
요즘 한창 비싼 오이랑 토마토를 사 볼까 아님 새로 뭐가 나왔을까 호기심을 가지고 들른 가게에는 오늘따라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가 잔뜩 쌓여 있다. 게다가 가격도 우리 동네 것의 오분의 일밖에 안 된다. 부피만 작으면 두 박스라도 사고 싶었는데 이고 지는 데에 한계가 있어 한 상자만 들고 집으로 향한다.
오는 길, 지하철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오묘한 냄새가 난다. 킁킁거리며 이게 무슨 냄새인가 궁금해하다 눈길을 아까 산 무화과 쪽으로 돌리니…뭔가 이상하다. 바닥에 놓은 비닐봉지 아래쪽에 물이 고여 있다. 비가 온 것도 아닌데 무슨 물인가 싶어 환승하는 길에 화장실에 들어가 살펴본다. 제일 위쪽의 무화과를 들어보니 전부 상해있다. 멀쩡한 게 없다. 제일 윗줄의 것들도 보이는 데만 괜찮았지 뒤집어보니 짓뭉개져 있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나지만 집에 가서 잘 씻어 먹자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집에 오자마자 눌리고 무른 무화과들을 행여 더 망가질까 싶어 살살 씻어서 접시에 담는다. 제일 멀쩡한 것 하나마저도 절반은 물러서 반은 버리고 반만 베어 문다. 입에 무는 순간 훅 끼치는 역한 냄새. 너무나 익어서 상하기 직전의 퀴퀴한 냄새가 난다. 꾸역꾸역 삼키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처) 넣어 버린다. 나중에 다시 먹어보자 싶지만 나중에도 더 나중에도 그 무화과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들까 싶다. 아까워서라도 먹어야 하는데 입맛이 뚝 떨어져서 쳐다보기도 싫다.
가만 되짚어 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블루베리가 우리 동네 가격의 딱 절반이었다. 웬 횡재인가 싶어 잔뜩 사가지고 와서 입에 넣는 순간 후회했다. 너무나 시었다. 신 걸 좋아하는 나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그럼 그렇지. 싼 이유가 있었구나”싶었다. 싸다고 너무 많이 산 나 자신을 탓했다. 토마토 역시 우리 동네 가격보다 훨씬 저렴해서 한아름 사가지고 와서 먹었는데 뭔가가 부족했다. 이런 무無맛의 토마토는 또 처음이었다.
결국 그 가게 물건이 싼 이유가 낮은 상품가치 때문이었던가. 하나를 선택한다는 건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이구나. 화복은 꼬인 밧줄과 같다더니…
나는 이제 삼라만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려 한다. 가까운 동네에서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적당히 사서 먹으련다. 몇 푼 돈 아끼려고 쏟아붓는 품에 육체도 정신도 피로하다. 너무 싸게 파는 물건을 보고는 저렇게나 싸게 팔면 저 물건을 만든 노동자들은 도대체 얼마를 받는다는 말인가라며 탄식했던 박완서 작가님 같은 분도 있는데 말이다.
끝 간 데 없는 욕심은 물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에 대한, 지위나 처지에 대한 과욕을 훌훌 털어버리는 날이 내 자유의 날이 될 것이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찾아 읽는 아베 피에르 신부님의 삶이 떠오른다. 신부님은 엄청난 부, 높은 귀족 신분과 명예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미련 없이 다 버렸다. 스스로 청소부가 되어 성당 옆 작은 창고에서 평생을 살았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과 시간을 다 쓰셨다. 그런데 정작 이 분이 다른 성자와 구별되는 건 그다음 행보 때문일 것이다. 신부님은 “가장 낮아지는 건 나의 적들에게 모욕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살해당하는)을 맞이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하여 자발적으로 그런 마지막을 이끌어내었다.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마음 앞에 서 본다. 나의 이중성과 초라함이 보인다.
각설하고, 우선은 내가 모아 왔던 금붙이부터 놓아버려야겠다. 마음을 한수 접고 보니 화려하고 광채 있게 보이던 금붙이가 한낱 누런 광물로 여겨질 뿐이다. 일단 금 시세부터 알아보자. 좀 더 오를 때까지 기다려보아야겠다 생각하며 노트북을 끄는데 문득 말과 행동이 다른 내가 보인다. 하여 바로 일어나 금싸라기들을 챙겨 동네 금은방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