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퍼널로 유저를 설득할 수 없다면?
• 이거 퍼널 너무 긴 거 아니에요?
• 단계 줄여야 전환율 오르죠.
• 더 적게 누르게 하면 되지 않나요?
기획자로 일하면서 정말 많이 들은 말이었어요. Kick Off 중에도, 화면 설계할 때도, 출시 후 고도화를 고민할 때도... 퍼널을 줄인다는 건, 당장의 수치(특히 클릭률, 전환율)를 빠르게 개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저 또한 '퍼널을 개선한다 = 퍼널을 줄인다'라는 전제로 업무를 진행하곤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진행하고 효과를 측정했을 때, 목표 지표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적이 많았어요. 클릭 수는 줄었고, 페이지는 하나로 합쳐졌고, 프로세스는 간단해졌는데 어디가 문제였을까요? 이때부터 짧아진 퍼널에서 고민하다가 문득 '왜 이 경험을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글에서는 '퍼널은 반드시 짧아야만 하는 걸까?'를 고민했던 썰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오픈된 지 꽤 된 서비스였고, 그동안 여러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부스팅을 해왔어요. 배너, 추천 메뉴, 알림톡 등 노출 위치도 늘리고, 클릭 유도 문구도 개선했고, 광고 소재까지 바꿔가며 계속 다듬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환 지표는 조금씩 계속 떨어지고 있었어요. 한 번도 급격하게 빠진 적은 없었지만, 계속해서 ‘서서히 안 좋아지는’ 그래프가 만들어지고 있었죠.
퍼널 자체는 분명 짧고 깔끔했어요. '랜딩 페이지 → CTA → 신청 화면'이라는 간단한 과정에, 설명도 자세히 되어 있었거든요. '퍼널을 더 줄여야 하나?', '마케팅이 문제인가?' 등 고민에 고민을 하던 즈음, 우연히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요.
“이거 진짜 할인되나요?”
자신이 정말로 할인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유저의 글이었어요. 이 단서를 시작으로 ‘관리비 할인’, ‘카드 조건’, ‘할인 기준’, ‘혜택 적용’… 게시글, 댓글, 대댓글 키워드를 필터링해서 뽑아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정도 고민의 실마리가 보이더라고요.
• 저는 카드 만들었는데 한 번도 할인 못 받았어요...
• 공과금도 실적에 포함되나요?
• 전월 실적 조건이 좀 까다롭던데요?
• 할인이 되는 건 맞는데 기준이 있대요!
아이러니한 건, 유저들이 궁금해하고 있는 대부분은 이미 랜딩 페이지에 다 설명되어 있었다는 점이에요. 전월 실적 조건, 할인 적용 방식, 할인 금액 제한 등. 그런데도 사용자들은 여전히 묻고 있었어요. 그렇게 유저들의 근거를 토대로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 설명을 나열한 것만으로는 납득이 안 됐던 건 아닐까?" 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었어요.
2# 퍼널을 다시 늘릴 건가요?
정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설을 세웠고, 아이데이션을 진행하면서 나온 개선안의 퍼널은 기존보다 길어지게 됐는데요, 그러면서 내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문제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 설명을 나열한 것만으로는 납득이 안 됐던 건 아닐까?"
가설
"사용자가 신청하기 전 가장 궁금해할 만한 정보들을 사전에 제공하면, 신청 완료 건수가 높아질 것이다.(단, 단순 텍스트보다 직관적인 수단으로)"
내부 의견
• 이걸 더 길게 만들면 아예 시작도 안 하지 않을까요?
• 단계가 추가되면서 이탈하는 유저는 점점 늘지 않을까요?
• 그냥 빨리 신청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낫지 않나요?
사실, 저도 그 우려에 동의했어요. 퍼널은 짧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저 역시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한 번 더 고민해 봤고, “이 문제는 사용자마다 다른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사용자의 상태, 목적, 맥락에 따라 ‘짧은 퍼널’이 맞을 수도 있고, '긴 퍼널’이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이미 모든 것을 알고, 목적이 명확한 유저에게는 클릭 수, 노출 단계, 정보량 모두 줄인 '짧은 퍼널' 효과적이었겠지만, 서비스가 생소한 유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유저를 '목적형'과 '탐색형'으로 나누고, 이 서비스는 어떤 유저에게 집중해야 할지 결정하고, 설계 방향을 잡기로 했어요.
목적형 유저(Goal-Oriented User)
명확한 목표나 의도를 가지고 서비스에 방문하는 유저예요. 이들은 이미 무엇을 하려는지, 왜 하려는지 알고 있으며, 불필요한 정보나 단계 없이 최단 경로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탐색형 유저(Exploratory User)
명확한 목표 없이 서비스 전반을 둘러보며 정보를 탐색하는 유저예요. 이들은 특정 행동보다는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고, 납득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 흐름 속에서 관심이 생기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서 살펴봤던 유저들의 목소리를 들어봤을 때 이건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신청이라는 행동’을 하기 전 갖고 있던 불안 요소를 현재 퍼널에서는 해소하지 못하고 있어 발생한 문제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탐색형 유저'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가설을 구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했던 건 플로우였어요. 유저가 불안을 느끼는 지점에서 잘 설득해야 해야만 카드 신청 완료까지 이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긴 퍼널'을 유지하기로 했고,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개선안에는 어쩔 수 없이 '긴 퍼널'이 되었지만, 그만큼 유저를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는 장치들이 생겼어요.
A : 정보 제공 → 유도
B : 탐색 → 제안 → 이해 → 신뢰 → 결정
그렇게 배포를 진행했고, 숫자에서 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났어요. 개선안을 경험한 유저는 신청 완료까지 이어진 비율은 기존보다 증가, 퍼널별 이탈률은 오히려 감소했어요. 유저를 설득하기 위해 추가된 화면/기능들이 ‘장애물’이 아니라 의심을 해소하고, 망설임을 덜어주는 장치로써 제 기능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모든 설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유저의 특성에 맞춰 진행해야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퍼널의 길이는 단순히 줄이는 게 목표가 아니라, 사용자가 목적지에 잘 도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걸 배운 값진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