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구조에 갇힌 절박한 삶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야흐로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100년 전만 해도 영화는 막 보급되기 시작할 때였고 공연을 보려면 몇 안 되는 극장을 찾아야 했다. 과연 전체 인구의 몇 퍼센트나, 그리고 1년에 몇 번이나 극장을 찾아 공연을 즐겼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기는 방법은 아마 책을 읽거나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부모님의 옛날이야기가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처에 콘텐츠가 넘쳐난다. 집 안에서 TV나 PC만 켜도 지구 반대편에서 갓 제작한 영화, 드라마, 공연 실황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 영화감독, 공연 연출가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상투성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시대에 완전히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매트릭스>를 극찬하며 남긴 한줄평을 인용해보자. "현대의 창의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비범하게 선택해서 독창적으로 배열하는 능력." 그렇다. 콘텐츠의 홍수 시대의 창의성이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구성해내는 능력도 포함하는 것이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읽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각이 필요하다. 그 내용이나 형식은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평택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거액의 돈가방을 서로 차지하려는, 정확히 말해 차지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들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주인공 몇몇이 겪는 사건을 시간 순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아닌, 총 8명의 사연이 뒤섞이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이런 식의 구성은 한 인물의 변화를 밀도 있게 다루는 고전적인 플롯 구성과는 차이를 보인다. 다수의 인물 각각에게 15-20분 정도의 분량이 할당되는 이러한 플롯의 묘미는, 인물보다는 그 인물들이 놓인 '구조'를 더 잘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 역시 주요 인물들 8명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지만, 그들이 서로 죽고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절박한 삶 속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철학적으로 '구조주의'는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 이면의 보편적인 법칙과 질서를 찾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영화를 읽었을 때 8명의 다양한 인물을 통해 드러나는 공통된 삶의 구조는 절박함과 야생성이다. 이는 곧바로 실제 삶의 은유로 작동한다. 문명으로 포장된 우리의 세상이지만 삶의 근원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기 때문에. 이제 관건은 그러한 구조와 구조 속 인물, 사건들을 얼마나 재미있게 풀어내느냐이다.
다시 '상투성'으로 돌아가 보자. 살인, 폭력, 사채업자, 형사, 항구, 나이트클럽....... 뻔한 K-조폭영화가 되기 쉬운 요소들이다. 게다가 이처럼 죽고 죽이는 여러 인물이 얽히고설킨 플롯은 이미 거장 쿠엔틴 타란티노가 <펄프 픽션>으로 멋지게 풀어낸 바 있다. 내용도 형식도 이미 익숙한 바, 상투성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독창적인 선택과 배열. 이동진 평론가가 말한 현대적 창의성이 발휘되어야 할 지점이다.
누군가 들고 가는 루이뷔통 가방을 따라가는 타이틀 시퀀스는 이 가방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될 것을 암시한다. 가방이 사우나 락카에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6개의 장은 각자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중만, 태영, 미란 세 인물을 중심으로 태영의 돈을 받으려는 박사장, 태영이 빚을 지게 한 동시에 미란을 이용하는 연희, 미란을 도와주려는 진태, 중만의 가족 순자, 영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 빚
영업이 끝난 빈 사우나에서 청소를 하는 중만(배성우 분)은 락카에 손님이 두고 간 루이뷔통 가방을 발견한다. 가방에는 5만 원권 뭉치가 한가득. 중만은 일단 보관실에 가방을 숨겨두고 집으로 간다. 그 가방만이 물려받은 망한 횟집, 치매 걸린 어머니 순자(윤여정 분), 돈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 영선(진경 분)을 구해줄 유일한 희망인 것 같다.
한편 여객선 터미널 출입국 관리 사무소 직원인 태영(정우성 분)은 사채업자 박사장(정만식 분)을 찾아가 조만간 큰돈이 들어올 것이라며 채무 상환 시기를 늦춰달라고 부탁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최사장의 '빚'보증을 서게 하고 사라진 애인 연희(전도연 분)는 여전히 연락이 안 된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 미란(신현빈 분)은 남편에게 자주 폭행을 당한다. 미란이 진 '빚' 때문에 자신이 고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던 하루, 업소에서 자신에게 반한 불법 체류자 중국인 진태(정가람 분)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온다.
2. 호구
태영은 사기로 얻은 큰돈을 가지고 밀항을 하길 원하는 고교 동창 오동팔을 돕는 척 속여 그 돈을 가로채려 한다. 태영은 미란이 일하는 유흥업소의 직원 붕어(박지환 분)와 수익을 나누기로 하고 '호구' 오동팔을 함께 작업하기로 한다. 한편 지배인(허동원 분)에게 지각 때문에 깨진 중만. 혹시 가방을 찾으러 온 사람이 없었냐고 다른 직원에게 묻지만 돌아온 것은 실종된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뿐이다. 마지막으로 침대에 있는 미란과 진태. 진태는 미란의 몸에서 멍자국을 발견하고 남편을 처리해주겠다 약속한다. 사망 보험금을 확인한 미란은 마음을 굳게 먹는다.
3. 먹이사슬
중만의 현실은 여전히 힘겹다. 치매 환자 어머니 순자 때문에 다쳐 입원한 아내 영선과, 영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순자. 현실을 바꿔줄 방법은 그 돈가방 밖에 없어 보인다. 이어서 태영의 장면. 태영은 약속 시간에 터미널에서 동팔을 기다리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찾아온 것은 동팔을 찾는 형사 명구(윤제문 분). 초면인 명구는 고등학교 선배라며 말을 트기 시작해 태영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이것저것 캐묻는다. 한편 미란은 진태에게 남편의 사진을 보여주고, 진태는 죽일 상대를 확인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미란, 중만, 태영 세 사람의 이야기가 조각난 시퀀스들로 교차되며 펼쳐진다. 이 시퀀스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쏟아져 내리는 비. 진태는 미란의 남편을 차로 들이받고 시체를 산에 묻는다. 하지만 진태가 죽인 것은 남편을 닮은 다른 남자다. 또 지각을 해 해고된 중만은 사우나에 다시 가 돈가방을 챙겨 나온다. 나오는 도중 중만은 사람을 찾는 형사들을 만나고 지배인을 마주치지만 무사히 빠져나온다. 태영은 붕어의 업소에서 호구 작업 계획을 눈치챈 박사장을 만난다. 더 급해진 태영은 동팔을 수소문하던 형사 명구부터 쫓는다.
4. 상어
다시 미란이 일하는 업소. 손님의 행패로 고생하던 미란을 사장이 도와준다. 사장은 다름 아닌 태영의 사라진 애인 연희(전도연 분). 상처 난 얼굴을 보고 미란이 남편에게 맞고 산다는 것을 직감한 연희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한다. 한편 미란은 무관한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 환청에 시달리는 진태를 달래주려고 함께 시체가 묻힌 산으로 가 제사까지 지낸다. 하지만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진태는 미란을 떠나 경찰에 자수하려 하고, 미란은 그런 진태를 차로 받아 죽인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 미란은 사장 연희에게 연락한다. 연희는 진태의 죽음을 처리해줄 뿐만 아니라, 미란이 남편을 자살한 것으로 위장해 죽이고 보험금까지 받도록 도와준다. 이 과정에서 연희는 미란에게 자신의 허벅지에 있는 상어 문신과 비슷한 상어 문신을 연희에게 새겨준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새롭게 태어난 미란은 보험금을 루이뷔통 가방에 챙겨 해외로 도피할 배편을 마련해 준 연희의 집으로 찾아간다. 연희는 새로운 삶을 축하하는 술잔에 약을 타 미란을 기절시켜 토막 살해한 후 돈가방을 챙긴다.
5. 럭키스트라이크
집에 들어선 태영을 맞이한 건 사라졌던 연희다. 연희는 자신 때문에 빚보증을 선 태영에게 상황을 해결해주겠다며 일본으로 가겠다 한다. 일본에 맡겨놓은 큰돈이 있다는 것. 다만 돈을 찾기 위해서는 가명으로 출국해야 한다.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끔 출입국 사무소 직원인 태영을 찾아온 것이다.
이때 갑작스레 태영의 집으로 명구가 찾아와 세 사람은 함께 술자리를 한다. 술을 먹던 중 명구는 토막 난 시체 허벅지의 상어 문신과 군산에서 밀항하려다 붙잡힌 오동팔의 이야기를 한다. '호구'는 사라졌고, 누군가를 죽인 후 가명으로 출국하려는 듯한 연희는 숨겨놓은 돈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태영. 이에 태영은 술을 사 온다는 핑계로 잠시 자리를 비우고 붕어에게 연락해 연희를 함께 '작업'하기로 한다. 문제는 연희를 찾던 박사장의 부하도 이 통화를 들었다는 것.
그런데 태영이 집에 돌아오자 명구가 죽어있다. 연희가 자신 허벅지의 상어 문신을 확인하려는 명구를 죽인 것이다. 태영은 뒤처리를 돕는 척하다 연희를 때려 기절시키고 연희의 차 트렁크에서 루이뷔통 돈가방을 찾아낸다. 태영은 돈을 들고 우선 항구 근처 호텔 사우나로 향해 가방을 락카에 넣는다. 중만이 일하는 그 사우나다. 영화의 첫 장면이 이제 연결된다.
한편 태영의 집에는 연희를 찾던 박사장 일행이 와 있다. 박사장은 연희에게 태영이 보증 선 돈을 요구하지만 연희는 태영이 자신의 돈을 가져갔다고 한다. 첫 배를 타기 위해 분명 평택항 근처에 태영이 있으리라 확신한 연희와 박사장은 태영을 찾아 나선다. 사우나에서 잠시 담배 '럭키스트라이크'를 사러 나온 태영을 찾아낸 박사장 일행. 추격전 중 태영은 폐기물 수거차량에 치어 숨진다. 여전히 돈가방은 사우나 락카에 있다.
6. 돈가방
여기부터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 전개된다. 중만은 월급 잔금을 처리해주겠다는 지배인의 전화를 받고 호텔 카페로 찾아간다. 카페에는 가방을 분실했다는 연희와 신고받은 형사라고 주장하는 박사장이 있다. 돈가방을 챙겨 나오던 날 중만을 본 지배인이 가방을 수소문하던 박사장과 연희에게 말한 것이다. 끝까지 부인한 중만을 따라간 박사장과 연희는 중만의 집에서 돈가방을 찾아낸다.
가방을 챙겨 떠나려는 연희와 박사장을 막아선 것은 어머니 순자다. 순자가 박사장 손의 문신을 보고 형사가 아니라고 난리를 피며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박사장은 중만과 순자를 다리미로 쳐 기절시키고, 연희는 칼로 박사장을 찔러 죽인다. 현장에 불을 지르고 자리를 뜬 연희. 박사장의 부하가 이를 발견하고 연희를 쫓는다. 불타는 횟집을 보며 우는 중만에게 순자는 팔다리만 멀쩡하면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위로한다.
돈가방을 챙긴 연희는 평택항 사물함에 가방을 넣고 화장실에 간다. 화장실에서 연희를 발견한 박사장의 부하는 연희를 살해하지만 여전히 가방은 사물함에 있다. 돈가방이 든 사물함 열쇠를 발견한 것은 바로 중만의 아내 영선. 영선은 사물함에서 돈가방을 챙겨 어디론가 향한다. 순자가 말한 대로 중만의 가족은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장점은 우선 탄탄한 구성이다. 여러 인물들과 시간을 오고 가며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는 사건 전개를 잘 따라가게끔 여러 힌트를 활용했다. 1장 초반 중만이 사우나 청소를 할 때 나오는 뉴스의 내용을 살펴보자. 호수의 토막 난 시체, 폐기물 수거 차량에 치어 숨진 남성, 투자금을 가로챈 사기범의 검거. 벌써 눈치챘겠지만 토막 난 시체는 4장에서 연희가 죽인 미란의 시체, 차량에 치어 숨진 남성은 5장에서 박사장의 추격을 피하다 숨진 태영, 검거된 사기범은 '호구' 오동팔이다.
이처럼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지만 곳곳에서 뉴스 보도를 통해 사건의 진행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뉴스 보도 이외에도 2장에서 중만이 사우나에서 받은 실종된 남성을 찾는 전단 속 인물은 진태가 차로 치어 죽인 사람이다. 또한 3장의 종만 집에서 순자가 시청하는 뉴스에서도 여전히 토막 살인의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도되는 등 미란의 시퀀스들은 종만의 시퀀스들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영의 이야기 역시 종만의 이야기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다. 3장에서 해고된 종만이 사우나에서 돈가방을 챙겨 나올 때 형사들이 사진을 보여주며 찾는 사람은 명구다. 즉 3장 종만의 시간은 5장에서 연희가 태영의 집에서 명구를 죽인 이후의 시간인 것이다. 또한 6장 마지막의 뉴스 보도는 전체 사건들을 정리해준다. 살해된 연희와 명구, 명구를 살해한 범인으로 유력한 태영의 죽음. 즉 종만의 시간 속 뉴스 보도들과 전단, 사진 등은 다른 시간 속 인물들과 종만을 연결해주고 사건 전개 과정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한 가지 탁월한 점은 바로 평택항이라는 장소 선정이다. 한 사회의 허술한 경계인 항구도시라는 설정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게 해 준다. 보통 영화에서 주로 '공항'은 한 사회 내에서 정체가 명확하고 역할이 뚜렷한 인물들이 주로 이용한다면, '항구'는 밀항부터 시작해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드나드는 장소로 많이 그려진다. 실제로도 국가 요인 등 높으신 분들이 항구를 통해 해외를 드나들지는 않는다.
더불어 육지는 의미가 충분히 구축된 의식의 세계를, 바다는 불분명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표상하기도 한다. 때문에 여러 영화에서 삶의 경계에 놓인 인물들이 바닷가에 있는 모습을 자주 그리곤 한다. 가령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앙뜨완(장 피에르 레오 분)이 보호 시설을 탈출해 한없이 달리다가 해안가에 다다른 후 카메라를 응시하며 마무리된다. 도시 속 그 어디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소년이 밀려나고 밀려나다 세계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과 의식, 야생과 문명, 불안정과 안정의 경계로서 평택항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바다 건너 미지의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여러 인물 군상을 그리기에 최적의 공간인 것이다.
잘 짜인 구성과 최적의 장소 선정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인물의 구축이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연희의 행동 동기는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중만, 태영, 미란의 경우 공통적으로 1장 '빚'에서 각자가 처한 상황이 자세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후 그들이 하는 행동은 납득이 갔다. 반면 연희는 큰 유흥업소 사장에 번듯한 집도 있는데 왜 살인까지 저지르며 큰돈을 가지려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영화를 한 번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포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인물들에 비해 행동의 근거가 덜 마련된 연희는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기억에 더 남았다.
더 중요한 것은 복잡한 플롯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벌어질 사건들의 전개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는 점이다. 돈가방을 둘러싼 추격과 쟁탈, 이 뻔한 소재로 어떤 예측 불가한 새로움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순자가 박사장 손의 문신을 보고 중만에게 "이 등신아, 저 놈 형사 아니야!"라고 하는 장면은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재밌는 지점이었다. 숨겨진 사실이 예측 못한 방식으로 드러날 때 관객은 큰 즐거움을 느낀다. 치매 환자로 아무것도 모르는 짐덩어리라고만 생각되어온 순자가 오히려 최고의 통찰력을 보이다니.
아쉽게도 이 장면 외에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선에서 사건이 전개되었는데, 거기에는 음악이 한몫을 한다. 앞서 언급했던 <펄프 픽션>에서는 누군가 죽을 때 대부분 음악이 사용되지 않는다. 총소리, 시체 터지는 소리, 차 사고 현장에서 나는 소음 등 철저하게 영화의 상황 안에서 발생하는 소리들만 나올 뿐이다. 그 소리와 이미지들만으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갑작스러운 템포로.
반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의미심장하게 잘 만들어진 음악이 선행한다. 그 음악이 들리면 나는 '이제 곧 무슨 일이 벌어지겠군' 하며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예측하는 동시에 긴장을 놓게 된다. 또한 사건 후 인물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홀로 남은 인물을 음악과 함께 담아내는 시퀀스들이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전체 리듬과 템포의 다이내믹을 떨어뜨리는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영화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절실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벌이는 잔인함과 폭력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칼로 찌르고 톱으로 썰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영화의 미학은 그 뻔한 일들 중 어떤 모습을 화면에 담아 쇼트라는 기본 단위를 구성하고, 그 쇼트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서 출발한다. 그 구성과 조합이 독창적이고 예측에서 벗어나 있을 때 독특한 방식의 사건 전개가 펼쳐지는 것이며 낯선 유형의 인물이 구축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그리는 절박한 상황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결국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삶의 본질적 구조임을 말한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생존 투쟁만큼이나 덜 절박한 투쟁이 또 있을까. 잘 포착해낸 어디로 튈지 모르는 끝자락 인간들이 정교한 구성에 담겨 그 불안정성을 잃어버린 듯하다. 영화 곳곳에서 정성 어린 손떼가 묻은 흔적이 많이 보여 아쉬움이 부각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조금만 덜 신경 써도 정교함이 떨어지고, 너무 신경 쓰면 치밀함이 지나쳐 많은 것들이 미리 읽히게 되고. 결국 좋은 영화 만들기란 앞서 말한 육지와 바다 사이 어딘가의 해안가, 이해의 영역과 미지의 세계 사이의 수많은 해석 가능성의 파도가 일렁이는 그 해안가를 찾는 여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