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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묘 Oct 18. 2022

(에세이) 22. 라미란과 안선영

솔직한 것과 싸가지 없는 것을 구분하자.

유튜브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보게 된 MBC 예능 '라디오 스타'. 각기 다른 편에 출연한 두 여자 연예인의 상반된 남성관이 꽤 인상 깊었나 보다. 무아지경에 빠져 숨 가쁘게 탄천을 달리던 도중 불현듯 그녀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별로 유쾌한 주제는 아니지만,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이슈를 들먹이며 특정 연예인을 부관참시(剖棺斬屍)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어차피 그녀는 대중에게 잊혀진 옛 연예인이다.


13년 7월 17일에 방영한 편에서 안선영은 자신의 남성관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밝혔다. "자신은 속물이라서 본인보다 100만 원이라도 더 벌지 않으면 남자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다.", "자신보다 경제력 좋은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이야 이영지나 제이미처럼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쓰는 연예인이 인기가 많지만 그 당시는 늘 그랬듯 겸손이 미덕이었다. 솔직한 말 보다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연예인이 이미지가 좋았고 상품 가치가 더 높았다. 그녀는 예능에웃기기 위해 내뱉은 말 때문에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나빠진 이미지 때문에 호텔 결혼식장 협찬을 취소당했다는 소문과 함께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안선영 발언이 있은 후 다음 해, 라미란은 같은 프로에 출연해 막노동을 하는 남편의 직업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녀는 줄곧 TV 프로에 나와 "막노동하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자기 능력에 맞는 일을 한다."라고 말하며 남편의 직업을 존중하는 발언을 이어왔다. 그녀의 발언은 그녀를 개념 연예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발언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녀는 지금 대세 배우로 종횡무진 중이다.


대한민국 땅에 살아가는 남자를 자극할 수 있는 단어 세 가지가 있다. 키, 군대, 연봉이다. 지난 2009년 지상파 예능 프로에서 한 여대생의 발언으로 점화된 ‘루저’는 남자의 ‘키’를 건드렸다. 퇴폐업소 출입과 잦은 휴가의 특혜를 받은 연애 병사 문제는 ‘군대’를 건드렸다. 마지막으로 ‘100만 원’ 발언을 한 안선영은 ‘연봉’을 건드린 것이다.


안선영의 발언은 시사프로나 다큐가 아닌 예능프로에서 한 말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가볍게 웃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눈치란 게 있다. 대중의 호감이 곧 수입이라는 걸 잘 아는 연예인이 솔직함이라는 캐릭터에 빠져 지나치리만큼 세속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발언을 한 게 문제다. 그녀는 프로답지도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 돼버렸다. 안타깝지만, 안선영에게 필요한 것은 솔직함이 아닌 위선이었던 것 같다.


사람 얼굴이 제 각각인 것처럼 이상형도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키 큰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능력이 좋은 남자를 선호할 수도 있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와 몸매 좋은 여자를 좋아하거나 지적인 여자, 청순한 여자를 각기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주관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안선영은 충분히 다른 표현으로 자신의 예비 신랑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해명처럼 남자의 집안 같은 배경보다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한 남자를 일컫는 표현이었다면, '100만 원 더 버는 남자 대신' 자수성가하는 스타일이나, 한 분야에서 어떤 성과를 일궈낸 사람을 존경한다는 식으로 돌려 표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자신의 SNS에 글을 쓰듯이,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듯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녀의 솔직한 발언에 자신의 처지를 돌아본 남자들은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에게 키와 연봉을 묻는 것은 실례이다. 아무리 쿨한척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도 키나 연봉으로 상처 주는 말을 들으면 발끈할지도 모른다. 물론 대놓고 묻거나 남과 비교할 사람은 없겠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무의식 중에 여러 번 비교당한 것은 사실이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차별 또한 존재한다. 대부분의 남자가 스트레나 열등감에 시달려 본 주제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외모 지상주의 사회에서 누군들 키 크고 싶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들 고액의 연봉을 받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회생활에 적을 할 무렵, 서른 즈음에 이르면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연봉 같은 건 개인의 노력에 따라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아래 표를 보면 한국은 좀 어려울 것 같다.



인도보다 낮은 한국의 자수성가 비율 실소가 터지지만 이내 쓴웃음으로 바뀐다. 타고난 키는 바꾸기 힘들어도 연봉 정도는 노력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한국이란 나라에선 쉽지 않아 보인다.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솔직함으로 무장한 어떤 연예인이 사람의 가치를 점수로 매긴다면, 어느 누가 솔직한 사람이라고 반겨줄 수 있을까?


우리는 살면서 위선적인 사람을 종종 마주한다. 그들의 면전 앞에서 대놓고 경계심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내뱉는 달콤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달콤한 음식이 먹기에는 좋지만, 인체에는 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솔직한 말 보다 위선적인 말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아무리 몸매 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도 치팅데이를 명분 삼아 달콤한 음식들을 즐기지 않는가? 진실만으로 살아가기엔 너무 각박한 세상이라 순간순간 환상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르시시스트를 경험한 이후로 너무 솔직한 사람이 불편해졌다. 솔직함으로 위장한 무례는 위선보다 더 불쾌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관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관계는 너무 솔직한 사람보다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사람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선의의 거짓말은 기만일지라도 정신 건강에는 이로울 것이다.


안선영과 라미란은 동시대에 예능에서 다른 가치관을 보여줬다. 한 명은 각광받았고, 한 명은 매장당했다. 대중은 자신의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 둘의 발언에 별 감흥이 없다. 어차피 연예인 자체가 가식 덩어리인데 그들의 말에 의미 부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워딩을 비교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다. 솔직한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위선이나 가식 따위가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배려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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