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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Iris Jan 04. 2021

1. 발레는 나의 애증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하셨어요?
     

살면서 얼마나 될까.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면전에 대고 직접 듣는 일이.


예술 고등학교 생활의 꽃이라고 불리는 ‘예무제’(무용제)의 주인공으로 고등학교 2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대학 입시라는 10대 마지막 관문에 들어선 지 1주일도 채 안되었을 무렵.


내 무릎과 아킬레스건은 말 그대로 ‘아작’이 나있었다.


때 지난 피아니스트 소재의 소년 만화책 같은 장면에서 언젠가 읽었던 것 같은 내용이다.


‘건반 위에 손이 굳어버려 피아노를 칠 수 없었어요.’ 따위의 상황 같았달까.


‘웃기지 마시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나는 이미 패한 싸움임을 절감하면서도 결사항전을 불사하는 장수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눈물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절대 안정,’ ‘No Ballet’를 외치는 의사 선생님을 바라보며 코웃음도 쳤다.

     

“다시는 무용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재활을 강권합니다.”


벌써 두 번째다.

그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들려온 건.


무거운 마음과 고장 난 무릎으로 병원문을 나섰다.



연습을 하려고 올라선 포인트 슈즈(또는 토슈즈) 속 내 아킬레스건의 감각은 어느 날 갑자기 한 치의 예고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어 실감도 나지 않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벌써 돌고 뛰고 테크닉 연습을 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되지도 않는 발을 욱여넣으며 서지도 않는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괜찮아. 재활하면 괜찮을 거야.’


애써 침착하며 자신을 다독여도 봤지만 걱정으로 벌렁대는 심장마저 추스르진 못했다.


지금 내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것이 의사만은 아닐 테니까. 소위 말하는 ‘싸한 기분’이 나를 엄습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게 나의 고3 1학기는 어느새 ‘재활’로 점철되어있었다.



부상 사건이 터지기 1년 전의 일이다.


전공 부서 선생님들과 일반 교과목을 담당하는 선생님들로 나누어져 있는 예술 고등학교에서는

고3 진학 전 담임선생님, 전공 부장 선생님과 각각 진로 상담을 한 후에 '어느 어느 대학교 대비반'이라는 것을 편성한다.


학교마다 실기 순서는 물론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최대한 '입학 가능성이 있는' 곳에 베팅을 하는 것이다.


“학교 입장에선 수능과 국내 대학 진학이 우선 시급한지라... 선생님도 최대한 널 도와주겠지만 아무래도 전반적인 준비는 직접 해야 할 것 같아.”


학교에서 나누어준 설문지 속 ‘희망 대학교란’에

미국의 줄리아드 예술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무용학과를 써넣었었다.


중학교 때부터 확고했던 유학이라는 열망을 처음 꺼내 보인 순간이었지만 이내 사그라지는 자신감이었다.


야심 차게 준비해서 나갔던 세계대회에서 결승에 드는 나름의 성과도 얻고 졸업 무대 격인 무용제에서도 주인공을 맡아 누구보다 뿌듯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건만.


왜인지 고3의 첫 시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너의 전성기는 여기까지라고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는 것 같아서.



병원에서 돌아와 컴퓨터에 즐겨찾기 해둔 미국 대학들의 목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애꿎은 스크롤바만 내릴락 거렸다.


‘망가져 버린 다리로 감히 네가 넘볼 물건이 아니야.’


화면 속에서는 내가 그토록 원해 마지않던 미국 대학 로고들이 마치 날 비웃기라도 하듯 깜빡이고 있었다.


희망찼던 어제가 절망의 오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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